제318화: 또 다른 아편전쟁(2)
유성십절이라는 사내들이 휩쓸고 간 이번 피바람 속에서 유일하게 목숨을 건진 MI6의 부요카였다.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고 왼쪽 어깨에 칼을 맞았지만 다행히도 부요카의 굳센 체력은 그가 눈을 감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미 런던에서 부요카와 한번 통화를 했기 때문에 이것저것 다시 물을 필요는 없었으나 답답한 마음에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인상착의에 대한 아는 것이 전혀없나?”
“죄송합니다.”
복면이었다.
21세기 과학의 시대에 아주오래전 칼과 화살을 갖고 전쟁을 하던 시절에나 유행하던 복면이 등장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거추장스럽게 복면을 했다가 벗을 바에는 차라리 뛰어난 분장술을 이용한 변장을 하던가 아니면 할로윈 데이 축제 때처럼 얼굴에 색칠만 해도 쉽게 알아보지 못한다.
쉽고 단순한 변장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음!”
적은 이쪽을 보고 있는데 이쪽에서는 적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
호지슨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편 전쟁 이후 또 다시 영국과 중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비록 사람들이 모르는 음성 전쟁이지만 결코 물러날 수는 없다.
왜 대영제국이었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싶다.
불끈!
핸드폰을 쥐고 있는 호지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홍콩 반환 이후 급성장한 경제력으로 미국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는 중국이다.
국제사회에서 영국 정도는 드러내놓고 무시를 한다.
‘한번 해보지’
이왕지사 벌어진 전쟁이다.
원인은 필요 없다.
일어난 전쟁은 이기는 것만이 전부다.
권총수 일행을 태운 비행기가 이슬라마바드 공항에 착륙했다.
과거 이란에서 탈출하여 파키스탄으로 넘어왔었다.
당시 절박했던 상황을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일행은 곧바로 파키스탄 국내선으로 환승하여 발루치스탄주 주도 퀘타로 날아갔다.
비행은 두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선입견 때문일까.
이슬라마바드와 확연히 다르다.
공기도 무겁고 햇볕도 을씨년스러우며 걸어가는 사람들 표정도 밋밋했다.
파키스탄에서 가장 테러가 빈번한 이곳 발루치스탄주이다.
발루치족의 끊임없는 독립 외침과 이슬람근본주의, 탈레반, 무자헤딘, 분리주의까지 뒤섞여 있는 그야말로 걸핏하면 피바람이 부는 지역이다.
여러 나라에서 여행금지 또는 철수 권고, 가급적 방문을 자제해달라고 할 만큼 외국인 대상 테러도 잦았다.
다행히 네 사람은 완전한 이슬람 복장이었고 얼굴에도 약간의 어두운색 화장을 하여 크게 눈에 띄거나 하지는 않았다.
엔터프라이즈호 선원을 납치한 무자헤딘 역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이곳 발루치스탄주를 들어오는 사람들을 감시할 것이다.
즉 공항직원 중에 그들의 동조자가 있을 수 있고, 택시 운전을 하는 사람 중 무자헤딘 조직원이 있지 말란 법은 없다.
입국장 문을 빠져나갔을 때 ‘발루치 사원, 바라바라여행사’란 글씨가 쓰인 A4용지를 들고 서 있는 사내가 있었다.
흰색의 상의는 무릎 근처까지 내려왔고 통이 헐렁한 바지를 걸쳤는데 얼핏 우리의 개량한복과 비슷했다.
사내는 마흔 초반 정도로 보였는데 덥수룩한 구레나룻을 길렀다.
권총수는 자연스럽게 다가가 웃으며 오른 손을 내밀었다.
“미스터 뤼크만?”
“환영합니다.”
뤼크만은 차례대로 악수를 했고 일행을 안내하여 공항청사를 빠져 나갔다.
네 사람은 뤼크만이 몰고 온 자주색 피아트를 타고 시내로 이동했다.
우리나라 지방의 조그만 소도시를 보는 듯 했다.
길가에는 많은 노점상들이 앉아 있었는데 거의가 옥수수를 비롯한 석류와 밀, 쌀을 포함한 농산물을 판매하고 있었다.
신발을 수선하는 사람도 있고, 오래된 물건들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파는 이들도 보였다.
차도였지만 손수레와 삼륜차에 무단횡단하는 사람들까지 섞이며 도로는 아비규환이라고 할 만했다.
호텔까지 가는데 무려 1시간 가까이 허비되었다.
“푹 쉬십시오. 내일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네 사람을 내려주고 뤼크만은 돌아갔다.
뤼크만이 돌아가자 가장 먼저 오민철이 투덜거리듯 중얼 거렸다.
“찝찝하네.”
나카야마가 무슨 말이냐는 듯 바라보았다.
오민철은 권총수를 슬쩍 살피며 말을 이었다.
“하도 뒤통수를 맞아서 말이야.”
뤼크만은 맥보란이 소개해준 CIA 정보원이다.
사실 미국과 한국은 지금 몹시 불편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한국의 군사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미국이 슬며시 한 발을 빼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국 정부에서 완전히 손을 뗀 건 아니었다.
세계에서 가장 왕성한 첩보 네트워크를 가진 대국답게 무자헤딘을 쫓고 있으며 이란정부가 개입했는지까지 정밀 추적중이다.
자신들이 가진 그런 왕성한 자산을 통해 얻은 정보를 수시로 한국정부에 제공하고 있었으나 아직까지는 시원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 권총수가 천왕그룹과 십억 달러 계약을 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가뜩이나 한국정부로부터 원망을 듣는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사실 카이로 식당에서 권총수의 출중한 능력을 알면서도 맥보란이 육성 보고를 받은 것 또한 그러한 미국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다.
사실 한 번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는 권총수로서는 번스 국장과 만나 화해를 했으나 완전히 마음을 놓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맥보란이 그런 방법으로 정보를 넘겨주었고 또한 오기 전 번스국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와 최선을 다해 돕겠다는 말에 완전히 벽을 허문 것이다.
‘내가 믿는 하느님께 맹세합니다. 과거와 같은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백악관도 하루빨리 이번 일이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번스국장은 분명하게 말했다.
권총수는 오민철을 보며 웃었다.
“만약 또 뒤통수를 맞는다면 그것 또한 내 운명이겠지.”
일행은 호텔로비를 걸어 들어갔다.
뚝!
방문 열쇠를 받기 위해 프론트로 걸어가던 권총수의 걸음이 멈추고 벽에 걸린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렸다.
뉴스가 나오고 있었는데 카이로 특파원이 한참 리포트 기사를 보내고 있었다.
파키스탄 국영방송 PTV뉴스였는데 권총수가 돌아보자 모두가 텔레비전을 주목했다.
뉴스 내용은 카이로에서 영국인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또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7구 말고 어제 밤 또 한 명의 영국 국적자의 남자가 자택에서 칼에 맞아 숨졌다는 것이었다.
팟!
권총수의 눈이 섬뜩해졌다.
‘칼’
남의 가정집까지 침입해서 칼로 찔러 죽인다는 것이 결코 손 쉬운 일이 아니다.
금품을 노린 강도라면 거의가 툭 터진 집 밖을 범행 장소로 선택한다.
원한이 있어 복수를 계획한 범죄이고 거기에 집안까지 쳐들어 갈 정도면 일반적으로 총기를 사용 하는 것이 칼보다 훨씬 안전하다.
더욱이 죽은 사람이 건장한 남자라면 자칫 이쪽에서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결론은 웬만한 칼잡이가 아닌 이상 건장한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들어가 총이 아닌 칼로 살해한다는 건 힘들다.
‘혹시’
머릿속으로 뭔가 떠오른다.
칼을 가장 잘 사용하는 사람들은 검도인이다.
그중 일본의 칼은 오늘날도 살인에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다.
중국은 칼이라기보다는 찌르는데 집중한 검술(劍術)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청평검술(靑萍劍術)인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무당파의 삼재검법이나 화산의 매화검법도 있으나 정식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건 청평검술이 유일하다.
기자는 시신이 칼에 찔렸다고 했다.
일본 칼은 베는데 특화되어 있다.
지앙!
그때 전화가 울렸는데 호지슨이었다.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로비 한쪽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
“부장님!”
“어딘가 지금 좀 만났으면 하네.”
“카이로에 있지 않습니다만 말씀 하시죠. 괜찮습니다.”
“중국이 막장으로 나오는군. 이제 우리 영국 정도는 게임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일세. 하긴 충분히 그럴만도 하지 어느새 미국 턱 밑까지 쫓아갔으니.”
권총수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걸 확인했다.
“전쟁일세.”
“저도 그렇게 봅니다. 쓰레기 마을 노동관리소장 스코치치가 죽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곧 나를 찾아오겠죠.”
“언제 돌아오나?”
“날짜를 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고 돌아가죠.”
“좋은 결과 있기 바라네.”
호지슨은 전화를 끊었다.
호지슨은 전쟁이라는 표현을 썼다.
선전포고를 하고 미사일이 날아다니는 양성 전쟁은 세계의 주목이라도 받는다.
하지만 정보기관 사이에 벌어지는 이런 음성 전쟁은 아무리 사람이 많이 죽고 고문이 자행되어도 절대 기사화 되지 않는다.
어쩌면 음성전쟁이야 말로 가장 참혹한 야전인 것이다.
권총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일행을 향해 다가갔다.
다음 날 아침 10시쯤 전화가 걸려왔다.
이미 식사를 한 네 사람은 뤼크만의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렸기에 곧바로 호텔을 나섰다.
일행은 버스를 타고 이동했고 20여분 정도 지나 퀘타 시청이 보이는 맞은편 공원에 도착했다.
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어떤이는 메카를 향해 혼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이도 보였다.
“받으시죠.”
뤼크만이 가방에서 담뱃갑 크기의 무전기를 꺼내 한 개씩 주었다.
물론 권총수가 어제 부탁을 하며 돈을 주었다.
“권총은 조금 기다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무기는 CIA에서 지원하기로 했는데 아직 완전히 갖춰지지 않은 모양이다.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총기라는 것이 평범한 물건이 아니어서 서둘러 구하려다 자칫 뒤를 밟힐 수가 있다.
“사실 지금 엔터프라이즈호를 납치한 무자헤딘에 대한 정보는 어디서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발루치스탄주에 있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만.”
“이 지역에서 가장 큰 테러집단이 어디요?”
“테러 집단보다는 발루치족 독립을 외치는 발루치독립학생기구(Baloch Students Organization, BSO)와 발루치민족평의회 두 곳이 가장 크죠. 두 곳 모두 무장 투쟁조직입니다.”
뤼크만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탈레반 활동도 갈수록 왕성해지고 있고.”
“아프카니스탄의 탈레반과는 같은 조직이오?”
오민철이 물었다.
“전혀 다릅니다. 이름만 같죠. 가장 강력한 규모는 무자헤딘인데 아마 가장 은밀하고 체계적이죠.”
“이란과 연계하고 있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이란에서는 당연히 아니라고 하죠. 미국이 시리아 반군을 지원하면서도 아니라고 부인하듯 말입니다.”
그러면서 씨익 웃는다.
오랜 시간 CIA 정보원 활동을 하며 얻은 여유가 보인다.
“미국 대사관과의 접촉 창구는 누구죠?”
나카야마가 묻자 재빨리 권총수가 나섰다.
“감사합니다. 많은 정보 고맙습니다.”
권총수는 뤼크만과 악수를 했다.
뤼크만이 사라지자 권총수가 나카야마를 보며 말했다.
“형, 질문할 것을 해야지.”
“내가 실수한 건가? 그런 질문은 안 되는 거야?”
“자기들만의 은밀한 관계를 우리가 알려고 할 필요 없잖아. 그쪽에서 스스로 말해주면 몰라도.”
“아, 쏘리!”
나카야마는 그제서야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인정하고 손을 들었다.
“지금처럼 넷이 같이 다니면 안돼. 호텔생활은 더더욱 위험하고.”
“그럼?”
“두 파트로 나누자고. 나와 민철이 형이 한 팀이 되고 눈 형과 나카 형이 같이 행동해.”
“그리고?”
비렌드라가 물었다.
“집을 얻어야 해.”
“집?”
나카야마 눈이 커졌다.
“하루 이틀 사이에 일이 끝날 것 같아?”
“우리가 무슨 수로 처음 온 이곳에서 집을 얻느냐고?”
“사람 사는 곳 다 똑같아.”
“뤼크만에게 부탁해볼까.”
“무슨 소리!”
권총수가 버럭 소릴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