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7화: 또 다른 아편전쟁(1)
여섯 시다.
직원들 모두가 퇴근한 쓰레기 마을 노동관리소 사무실에는 소장 스코치치 혼자 남아 잔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갈수록 쓰레기는 늘어나고 있었다.
쓰레기가 많이 발생할수록 스코치치의 주머니는 두둑해진다.
즉 들어오는 청소차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날 결산은 그날로 끝내야 한다.
돈 문제는 절대 다른 직원들에게 맡기지 않는다.
또한 현금 말고는 어떤 수단으로도 통용되지 않기 때문에 책상 서랍에는 오늘 거두어들인 차입요금이 가득했다.
돈을 지폐 권 별로 나누고 가지런히 한 다음 기계에 넣고 세기 시작했다.
드르르르!
얼굴 쪽으로 지폐가 넘어가며 일으키는 바람이 스친다.
이 느낌이 좋다.
바람에는 돈 냄새가 실려온다.
지상의 어떤 향수도 이 보다는 더 향기롭지 못할 것이다.
덜컹!
돈 계산을 할 때는 항상 사무실 문을 걸어 잠근다.
그런데 출입문이 열리더니 두 명의 사내가 들어섰는데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그다지 큰 키는 아니었으나 다부진 체격이었고 동북아 계로 보였다.
아시아계도 동남아계와 동북아계는 확연이 구분된다.
동남아계는 피부가 좀 더 까맣고 서남아시아 쪽을 많이 닮았지만 동북아계는 정통 몽골리안이다.
“누구쇼?”
서랍안에 권총이 있다.
현금을 만지기 때문에 총알이 장전되어 언제든지 방아쇠를 당길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씨익!
손이 서랍에 들어가는 걸 보며 오른쪽 사내가 웃는다.
“병신 되는 것 싫으면 권총 잡을 생각 하지 마세요.”
움찔!
스코치치의 눈이 커졌다.
보이지도 않는 권총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오른손의 움직임이 무척 자연스러웠는데도 알아차린다는 건 한 가지 사실을 증명했다.
경찰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시간에 자신이 현금을 만진다는 걸 알고 찾아온 강도는 더욱 아니다.
불현 듯 오래전 만났던 한 사내가 떠올랐다.
그는 노인으로 다가왔지만 결코 본 모습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진면목을 볼 수 있었던 건 아니었으나 여러 가지 말투와 행동에서 젊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느꼈다.
어쨌든 그 노인 또한 지금 병신 되기 싫으면 가만있으라는 사내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일행일까’
이내 고개를 젖는다.
당시 노인은 부드러웠으나 이들은 단단하다.
마치 칼이 살아서 움직이고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스코치치?”
“맞소.”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이사람 알죠?”
오른쪽에 있는 사내 위철명이 A4용지 크기의 커다란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스코치치는 누군가 싶어 눈을 크게 떴다.
슈우욱!
직접 자세히 보라는 듯 사진을 던졌는데 믿을 수 없게도 천천히 날아온다.
스코치치의 눈이 커졌다.
그 사내도 자신이 보는 앞에서 담배를 날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탁!
날아오는 사진을 받았다.
한참 사진을 보던 스코치치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진 속 백인을 본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아는 사이는 아니다.
자신을 불쑥 찾아와 다짜고짜 계좌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협박하듯 말했던 노인과 같이 있는 걸 목격했다.
노인을 만나기 위해 약속장소에 갔는데 예상보다 20분 빨리 도착했다.
퇴근 시간이었기 때문에 차가 막힐 걸 예상하여 좀 일찍 출발한 것이었는데 그날 따라 도로는 텅텅 비었고 평소 40분 걸리는 거리를 20분 만에 주파해 버린 것이다.
노인은 갑자기 자신이 나타나자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같이 있던 백인에게 다음에 보자며 재빨리 보내는 것이었다.
당시 그 백인이 틀림 없었다.
“본적은 있소”
“오케이!”
그러더니 이번에는 다른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 속에는 터번을 두르고 오른손에 M4를 든 사내가 말보로 레드 한 개비를 물고 서 있었다.
지금 사내는 본적이 없다.
단지 말보로 레드라는 담배는 상당히 낯이 익다.
‘아아!’
스코치치는 기억해냈다.
그 노인이다.
자신과 거래를 했던 그 노인이 말보로 레드를 피웠다.
“그 남자는 모르겠소만 앞에 여기 백인은 분명히 보았소.”
스코치치는 지금의 상황이 매우 엄중하다는 걸 직감했다.
아차 말 한 마디 잘못 뱉었다가는 35년 동안 잘 지켜온 목숨이 오늘 정리 될 수도 있다는 걸 간파한 것이다.
두 사내는 분명 프로페셔널이다.
위철명이 이슬람 복장의 권총수 사진을 내민 건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자신들이 고문했던 청소트럭의 운전자 타메르의 승령혈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넘어져 다친 것으로 판단했지만 치밀한 조사 끝에 인위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누군가 강호의 수법을 알고 있고 그래서 타메르의 승령혈을 의도적으로 점혈하여 기억을 지운 것이다.
그런 능력을 지닌 인물은 권총수 뿐이다.
처음에는 권총수가 강호의 고수이며, 허공을 날아간다는 용병시장에서의 소문을 일축했다.
누구보다도 강호 무림에 대해 해박한 중국 정부였다.
동정호 서쪽 천목산에서 봉우리와 봉우리를 날아가는 사람을 보았다는 설이 간헐적으로 들려오고, 티벳의 고승들중 일부가 역시 수직 절벽을 걸어 올라갔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공식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단순 소문으로만 치부하지 않고 있었다.
‘사막의 흑새다’
오랜 조사와 치밀한 추적 끝에 귀곡사 교통사고 사건 행동대장은 권총수며, 그 배후에 영국의 MI6이 있다는 결론이 났다.
결정적인 증거로 사건이 벌어지던 날을 전후하여 MI6의 고위 인물인 호지슨이 카이로에 있었다는 걸 밝혀냈다
그런 거물이 하루이틀도 아닌 오랫동안 카이로에 묵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 남자는 분명한가?”
위철명이 책상 위에 올려진 사진을 가리켰다.
“확실히 봤습니다. 그리고.”
잠시 주춤했다.
스코치치는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라고 생각 했다.
모든 걸 있는 그대로 털어 놓는 것이었다.
선수를 쳤다.
“내가 말한 노인 말입니다. 사실 그가 내게 사건 청부를 의뢰했습니다. 우리 쓰레기 마을을 들락거리는 청소차 운전사 한 명을 골라서 교통사고 한 건을 만들어 달라고.”
스토치치는 권총수와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털어 놓았다.
“결국 그 늙은이가 사막의 흑새라는 건가?”
“그것까지는 모릅니다. 전 단지.”
슈욱!
위철명과 같이 있던 사내 이역봉의 오른손이 앞으로 뻗어나왔다.
짧은 광채가 번쩍 하는가 싶더니 스코치치의 목에 비수 한 자루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컥!”
비수는 목을 뚫고 뒷덜미까지 빠져나왔다.
목을 관통해 버린 것이다.
“커럭!”
비수가 관통해버리면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끄으으으!”
스코치치는 괴성을 질렀다.
그러면서 왜 모든 걸 말했는데 날 죽이냐는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소용 없었다.
위철명은 무심히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수확이 있습니다. 예, 예! 사막의 흑새와 호지슨의 작품으로 보입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위철명이 말했다.
“핸드폰 챙기고 그만 가지.”
이역봉이 스코치치의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일행은 사무실을 나갔다.
스코치치만이 책상에 엎드린 채로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위철명은 유성십절의 우두머리다.
그의 정식 신분은 설표 독격대소속 현역 대위이며 아홉 명의 부하들은 가장 근골이 뛰어난 자들로 직접 선발하여 6년 반 동안 인자무적동에서 대력금강심법을 익혔다.
유성십절의 임무는 귀곡사 죽음에 얽힌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것이었다.
차량 한 대가 방향지시등을 켜더니 오른쪽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흰색 벤츠였다.
주택가 골목은 조용했으며 벤츠는 대리석으로 지어진 2층 바로크풍 주택 앞에 멈췄다.
차에서 내린 사내는 백인이었고 서른 중반 정도로 보였다.
사내는 반월형으로 만들어진 대문 앞에서 벨을 눌렀는데 흘긋 습관처럼 대문 구석을 바라보았다.
CCTV였다.
방문자의 모습을 안에서 볼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딸칵!
방문자를 확인했는지 대문이 열렸다.
백인 사내가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서려는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사내 주위로 검은 그림자들이 어른거렸다.
푸욱!
어느새 사내 등에 칼 한 자루가 깊숙이 꽂혀 있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다섯 명의 복면인들이 들이닥치며 암습한 것이다.
휘익!
대문에서 1층 현관까지 거리는 5미터 정도 되었다.
덜컹!
나무로 된 현관문이 안에서 열리는 것과 동시에 푸슉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주던 다른 백인 사내 한 명이 이마에 총을 맞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사사삭!
세 명의 복면인이 2층 계단을 올라갔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머지 두 복면인은 아래층을 훑었는데 더 이상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꽈당!
컥!
2층으로부터 요란한 소리들이 들렸으나 잠시 후 조용해졌다.
타타탕하는 소리가 들리며 2층으로 올라갔던 세 명의 복면인이 두 명의 백인을 들쳐 메고 내려와 거실 바닥에 던져 놓았다.
퍼어억!
모두 가슴에 총을 맞고 숨이 멎은 사람들이다.
차에서 내린 사내와, 현관문을 열던 중 죽은 사내까지 포함해 모두 넷이다.
다섯 명의 복면인들 손에는 권총과 천장의 형광등 불빛을 받아 번쩍이는 칼이 들려 있었는데 50여센티 정도 되는 중도(中刀)였다.
중도는 길이가 짧아 몸속에 티 나지 않게 숨길 수 있어 주로 자객들이 많이 사용한다 .
스윽!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명이 눈 아랫부분의 복면을 내렸다.
위철명이었다.
“이상 없나?”
“네 명이 전부입니다.”
“철수!”
슥!
다시 복면을 끌어 올려 가린 뒤 사내들은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발칵 뒤집혔다.
카이로에 있는 MI6 안가 두 곳이 기습을 받아 모두 여섯 명이 사망한 것이다.
문제는 공격자들의 정체였다.
모두 복면을 했고 CCTV가 있는데도 보란 듯 MI6관계자들을 제거해 버렸다.
호지슨은 일이 잘못되었음을 간파했고 곧바로 카이로를 향해 출발했다.
신변 안전을 염려하여 주위에서 방문을 막았지만 결자해지(結者解之)해야 한다고 뿌리치고 나섰다.
그리고 카이로에 도착한 호지슨이 가장 먼저 듣게 된 소식은 쓰레기마을 노동관리소장 스코치치가 살해 되었다는 것이었다.
어렵지 않게 이번 사건의 성격을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스코치치 책상에 자신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는 이집트 경찰 간부의 귀띔은 돌아가는 상황과 앞으로 전개될 사건의 방향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결국 중국과 영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유성십절’
베이징에서 활동하는 블랙요원의 보고를 종합하면 중국 국안부에서 귀곡사의 죽음에 영국 MI6이 깊이 개입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다고 했다.
유성십절이라는 자객들을 카이로에 보낸 이유는 간단했다.
귀곡사에 대한 복수였다.
그 복수에는 영국정부와 BP사가 합작하여 꾸민 이집트 원유 개발에 대한 음모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엄청난 비난과 특히 이집트 국내 여론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BP사는 이집트 유전개발에서 스스로 발을 빼겠다고 발표해야 한다.
결국 BP사가 발을 뺀 자리를 중국의 시베이 유전이 차지하는 것이 이번 일의 종착지다.
병원으로 들어섰다.
입구에 앉아 있던 요원이 신문을 보고 있다 일어섰다.
호지슨은 편하게 있으라는 손짓을 하고 침대로 다가갔는데 그곳에는 낯익은 사내가 누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