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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314화 (314/651)

제314화: 싸가지 없는 피(3)

배웅대가 십억 달러라고 속삭였고 권악수는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액수였다.

“인간의 목숨 값에 비하면 십억 달러도 하찮은 액수지만 천왕그룹 입장이 절박하니 그 선에서 마무리 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 싶습니다.”

배웅대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필 십억 달러일까.

작년 천왕중공업에서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가 열 명이었다.

지난 일 년 대한민국에서 산업재해로 숨진 전체 노동자 숫자는 천오백명 안팎이다.

대한민국 산재 사망률은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인데 단일 기업에서 열 명의 노동자가 한 해에 숨지는 일은 천왕중공업이 처음이었고 그로인해 작년 국정 조사 때 굉장히 시끄러웠다.

자신과 권악수는 국정조사에 불려 나갔고 야당의원들의 호된 추궁과 질책을 받았다.

결국 그 자리에서 권악수는 숨진 열 명의 노동자의 희생을 기리는 추모관과 추모비를 세우고 자녀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모든 경비를 회사에서 부담하겠다는 통 큰 사죄를 했다.

또한 졸업 후에 천왕중공업에 입사를 원하면 특별채용 형식으로 뽑을 것이며 한 발 더 나아가 지금까지 천왕중공업에서 일을 하다 다치거나 사망한 노동자들을 위해 기금을 모으겠다며 목표 액수를 1조원으로 정했다.

국정조사라는 것, 그리고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다는 사실에 철저히 머리를 숙이고 다양한 보상을 약속한 것이다.

지금 말한 권총수의 요구액이 그때 국회에서 권악수가 약속한 일 조(당시 환율로 십억 달러)원과는 전혀 상관없을 수도 있었다.

사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이후 일 조원의 모금 움직임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건 잊혀진다는 걸 권악수는 잘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건 우연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눈에는 묘하게 십억 달러가 그 돈과 연관되어 보이고 있었다.

마치 일 조원의 약속을 지키라는 압력처럼 말이다.

“사막의 흑새라고 들었습니다만?”

권악수가 굳은 얼굴을 물었다.

“그렇습니다.”

“한국이름이?”

“권총수라고 합니다.”

권악수가 멈칫했다.

자신의 이름과 비슷하다는 순간 묘하게 닮았다는 것까지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고향이?”

“서울이죠.”

“실례가 아니라면 부모님께서는?”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없습니다.”

권악수는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형제는?”

“나 혼자죠. 어머니는 나를 낳고 자동차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얼굴 본적도 없고.”

“돌아가셨다는 것입니까?”

“글쎄요. 얼마 전까지 살아 있는 것 같았는데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 메몰라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사람들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하나같이 권총수를 주시하고 있었다.

자신 또한 그제야 권총수와 권악수가 닮았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캡틴, 10억 달러가 진정인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버홀터가 물었다.

“물론입니다. 아까 말했듯 실패하면 단 한 푼도 받지 않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십억 달러라는 액수는 상식에 벗어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상식?”

권총수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과한 요구가 아닙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천왕중공업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실패하면 모르지만 운이 좋아 성공한다면 그 가치가 십억 달러 정도에 미칠까요? 주식이 오를 것은 뻔하고 선원들과 끝까지 함께 하는 회사의 움직임에 뜨거운 의리와 애정 운운하며 신문들이 미친 듯 띄우겠죠. 광고 효과만도 수백 억 달러에 이를 겁니다. 천왕중공업 뿐만 아니라 천왕그룹 모든 계열사가 전 세계로부터 인지되면서 천왕이라는 브랜드 자체가 명품 대접을 받을 테니까.”

“으음!”

버홀터는 권총수가 생각없이 요구한 액수가 아니라는 걸 간파하고 앞에 놓인 물을 마셨다.

“좋습니다. 받아들이죠. 성공하면 십억 달러를 드리겠소.”

권악수가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까 말했듯 실패하면 우린 받지 않습니다. 물론 착수금 운운하는 그런 일도 없습니다. 성공하는 순간 우리가 원하는 계좌에 십억 달러를 입금하면 이번 거래는 마무리됩니다.”

권총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총수를 따라 일행은 회의장을 빠져 나갔는데 오민철이 다급히 말했다.

“공짜로 해주자고?”

“무슨 공짜?”

권총수가 돌아보았다.

“착수금을 받아야 할 것 아냐. 우리도 통장에 돈이 들어와야 힘도 나고 승부욕도 활활 타오르는거지.”

“십억 달러 비즈니스에 착수금으로 얼마 달라고 할 거야?”

사람 작아 보인다.

크게 불렀으면 그에 맞게 처신해야 상대가 받는 부담이 커진다.

“그래도 나는 돈을 받아야 힘이 나는데.”

오민철은 중얼거리며 불편한 시선으로 권총수를 보았다.

권총수 일행이 빠져나간 회의실은 무겁다.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권악수도 메몰라 역시도 십억 달러 요구에 당황한 건 사실이었다.

메몰라는 권총수가 십억 달러를 요구하는 순간 하기 싫은 모양이라고 단정했다.

그런데 권악수가 오케이 해버리자 버리자 메몰라는 더 놀랐다.

주르륵!

메몰라는 생수 병의 물을 마셨다.

메몰라는 지금 맞은편에 앉아 있는 권악수에게서 한 가지를 느낄 수 있었다.

십억 달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권악수는 결코 작전이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다.

또한 선원들 생명도 챙길 마음도 그다지 없어 보인다.

민간 용병들까지 동원하여 회사로서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만 보여주려는 것이다.

십억 달러를 놓고 벌이는 게임의 승자는 누가 될까.

“우린 더 이상 마주 앉아 있을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럴 것 같군요.”

양쪽은 자리에서 일어나 헤어졌다.

차안은 조용했다.

권악수는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얼굴이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좋은 일이 있는 듯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십억 달러.”

혼잣말처럼 중얼 거린다.

“나 권악수를 우습게 봤다 이거지.”

어차피 이번사건의 마무리는 해피엔딩이 될 수 없다.

처음부터 새드 엔딩으로 맞춰져 있다.

정부차원의 특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이상 민간차원에서 돈이 아니면 절대 해결 되지 않는다.

무자헤딘 쪽에서 며칠 전 은밀하게 인질들 몸값으로 십억 달러를 요구했다.

어차피 십억 달러가 나갈 일이라면 사막의 흑새에게 청부를 하는 것이 낫다.

물론 그들은 실패 할 것이다.

중요한 건 양측이 치고 박다 보면 희생자 발생은 분명하고 무자헤딘은 선원들에게 보복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번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 되는 것이다.

선원들 죽음을 용병들에게 돌리는 것이다.

즉 무리한 작전을 펼치다 피해가 컸다는 발표 한 마디면 되는 것이다.

유족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한다는 한 마디와 퇴직금을 포함한 위로금 몇 푼 던져주면 지긋지긋한 이번 사건은 끝난다.

퇴직금 위로금 포함해봤자 우리 돈 100억도 들어가지 않는다.

한화 1조가 넘게 나가는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고 껌 값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미쳤다고 십억 달러를 쓰는가.

“권 뭐라고 했죠? 권총수라고 했지? 그 친구 우리 권씨더군요?”

옆에 앉은 배웅대를 돌아보았다.

“본관을 물어 볼 걸 그랬습니다?”

“보나마나 안동이라고 하겠죠. 권씨들은 개나 소나 누가 물으면 안동이 본관이라고 합니다. 본관이 안동이 아닌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워낙 집안이 좋다 보니까 슬쩍 합승하는 거죠.”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배웅대가 말했다.

“뭐가 말입니까?”

권악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사장님과 닮았던데?”

그러면서 조수석에 앉은 LA 지사장 안평철을 보았다.

“안 그래요 안 지사장.”

“맞습니다. 저도 처음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쌍둥이인줄 착각 했다니까요.”

권악수가 빙긋 웃었다.

“사실 나도 조금 놀라긴 했죠. 성도 같고 이름도 비슷하고, 얼굴도 많이 닮아 혹시 아버지가 숨겨 놓은 아들이 있는 것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농담이라는 듯 껄껄 웃는다.

조수석에 앉은 안평철과 운전기사까지 따라 웃었으나 배웅대는 그렇지 않았다.

사실 일 년전 은퇴한 중공업 관리이사 남준재 고문이 했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기 때문이었다.

퇴임식을 앞두고 둘은 같이 저녁을 먹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때마침 텔레비전에서 ‘그것을 알려주마’라는 시사프로그램이 방영됐는데 아주 오래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여배우 오설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짧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미모의 천재 배우라는 극찬을 하면서 새롭게 조명을 했는데 남준재가 술기운인지 아니면 싸구려 여성지에서 본 기사인지 모를 얘기를 했다.

“참 안됐어. 저 여자.”

“네?”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쳐들었다.

“자네 몰라?”

“뭘 말입니까?”

“지금 나온 오설지라는 배우 말이야. 권철태 전 대통령과 매우 가까웠잖아.”

가깝다는 말에도 배웅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권철태 전 대통령이 남긴 업적중 하나가 문화사업이었다.

문화가 곧 미래라는 확신으로 영화 예술계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고 덕분에 한국 영화와 연예인들의 해외진출이 활발해졌다.

“직접 보지는 않았는데 전 대통령과 굉장했나봐. 팬으로서가 아니라 연인으로서.”

“고문님 그게 정말입니까?”

배웅대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당시에는 대통령이 아닌 국회의원 신분이었지. 어떻게 헤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평범한 사이는 아니었다더군.”

그 말이 권총수가 권악수와 많이 닳은 것에 대한 약간의 의심이었다.

물론 오설지는 자식이 없는 처녀의 몸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얼굴도 본적이 없죠.’

조금 전 권총수는 아버지는 얼굴도 본적이 없다고 했지 죽었다고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면 상당히 흥미로운 추론을 해 볼 수가 있었다.

즉, 앞뒤가 제법 맞아 떨어진다.

차는 호텔 주차장으로 빨리듯 사라졌다.

강물 위로 배 한 척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나일강이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에 앉아 권총수 일행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양고기 스테이크에 콩을 갈아 여러 가지를 넣고 둥글게 만들어 낸 타메이아(Tameia)란 요리다.

이제 현지인처럼 이집트 음식에 거부감이 있거나 하지는 않는다.

아무것이나 잘 먹고 소화도 부드럽다.

식사를 하면서 일행의 얘기는 천왕중공업과 맺은 10억 달러였다.

나카야마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는 듯 계속 떠들었다.

“십억 달러, 웬만한 기업의 일 년 매출 같은 돈을 우리가 벌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구나.”

“쪽발아, 좋아 할 것 없어. 그 돈 써보지도 못하고 우리가 죽을 수도 있다.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이뤄진 것이 없다고 임마.”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라는 얘기였다.

“미스터 센징, 자고로 사내 대장부라면 무엇이든 된다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어야 하는 거야. 우리가 왜 죽어? 안 죽어.”

“너 주둥이 뭉개지고 싶어. 정말?”

“우린 안 죽어. 안 죽는다고 하면 안 죽는 거야. 뭐든지 기세야. 쫄 것 없어. 성공한다는 확신을 갖는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지. 안 그래 캡틴?”

마지막은 외침에 가까웠다.

순간 오민철의 눈이 커졌다.

나카야마는 지금 두려워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라도 떨지 않는 모습을 갖추기 위해 자신의 말에 일부러 토를 달고 있다.

분노하면 두려움은 사라진다.

오민철은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역시 내 친구다. 그럼 우린 안 죽는다. 빠샤.”

그러면서 주먹을 내밀었다.

퍼억!

나카야마가 기다렸다는 듯 주먹을 쥐고 부딪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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