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0화: 운명의 소용돌이(1)
벙커 안은 침묵에 잠겼다.
천규석은 힘주어 말했다.
“그렇겠죠. 대신 언론에 보도되지 않도록 협조 부탁드립니다.”
“그야 당연한 일인데 문제는 이렇게 되면 결국 테러조직에게 응분의 금전을 지불하고 배와 선원을 데려 오는 국제적 선례를 남기게 되는데...”
“최대한 배에 실린 원유는 넘기는 대신 선원들만 안전하게 돌려 보내달라는 협상안을 건네 볼 생각입니다.”
외교부 장관 강세창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일단 대통령께 특사 파견을 건의 드리는 것으로 오늘 회의를 종결하죠.”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누구도 밝은 표정을 짓지는 못했다.
결과에 따라서 대한민국이 국제적 망신거리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 위기를 타개할 영웅이 나타나야 하는데’
외교부 장관 강세창은 푸념하듯 중얼 거렸다.
* * *
휴가를 신청했다.
민간 보안업계에서 휴가는 본인이 신청한다.
일 년에 25일의 휴가가 주어지는데 사용하지 않으면 그대로 소멸된다.
일반 군인처럼 휴가를 가지 못하면 그대로 마일리지 쌓이듯 하는 것이 아니었다.
겸사 겸사하여 카이로 지사에 나온 권총수는 오민철과 마주 앉아 바둑판을 놓고 앉았다.
사무실 바둑은 오민철이 구입해 놓았다.
두 사람은 지금 오목을 두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달아올라 있었다.
“흐흐흐!”
바둑판을 노려보던 오민철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흑을 놨다.
“받아 보시고?”
“뭐야?”
“뭐긴 뭐야? 졌지. 이 돈 내거야.”
한쪽에 놓인 이백 달러를 재빨리 낚아 채려고 했으나 늦었다.
퍼억!
어느새 권총수가 오민철의 손등을 눌렀다.
“이게 무슨 행패야. 너 임마 졌잖아.”
“잘 봐. 삼삼이잖아. 삼삼은 반칙이야.”
“가운데 터진 삼삼은 괜찮다는 걸 몰라.”
“어떤 개자식이 그래.”
화악!
오민철의 눈이 커졌다.
“어떤 개자식?”
“아니 형 보고 하는 소리가 아니고, 삼삼은 오목에서 반칙이라고.”
“야 쪽바리 너 한 번 말해봐. 가운데 뚫린 삼삼이 반칙이냐?”
구경하고 있던 나카야마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후 소변 마려.”
“임마 쪽바리. 야 쪽발아.”
나카야마는 못들은 체하며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쾅!
“이것 안놔.”
“반칙이라니까?”
권총수는 돈을 쥔 오민철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이제 보니 이 자식 진짜 치사하네. 야 붙은 삼삼은 반칙이지만 가운데 뚫린 건 괜찮다고.”
“누가 그러는데? 대사관에 전화 해봐?”
“무슨 오목을 두는데 대사관에 전화까지 하냐고, 더러운 자식. 에이!”
오민철은 자기 돈 백 달러만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까지 둬야지 어딜 가.”
“됐어 짜샤. 그렇게 안 봤는데.”
오민철이 투덜거리며 담배를 물고 밖으로 나가버린다.
권총수는 구겨진 자신의 백 달러를 곱게 펴서 다시 지갑에 넣고 역시 담배를 물고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간 권총수가 멈칫했다.
복도 끝에 휴게실이 있는데 오민철이 나카야마를 세워 놓고 큰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야 쪽바리 일본도 오목있지?”
“당연히 있지?”
“일본 오목은 삼삼을 어떻게 보냐?”
“일본 오목도 삼삼은 반칙이야. 그렇지만 조금 전처럼 가운데가 터진 삼삼은 삼삼으로 치지 않아.”
“그렇지. 그 개자식, 진짜 야비하고 추접스러운 놈.”
툭!
나카야마가 재빨리 팔꿈치로 쳤다.
권총수가 온다는 신호에 오민철은 재빨리 태연한 척 했다.
“날씨 좋은데.”
권총수는 담배를 물고 휴게실로 들어섰다.
환풍기 두 대가 돌아가며 담배 연기를 밖으로 빼내고 있었지만 권총수는 창문을 열었다.
“이런 날은 나일강에서 카약을 타고 놀면 제격인데.”
오민철은 돌아 앉아 쪽쪽 소리가 나도록 담배를 빨았고 나카야마는 권총수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휴게실 문이 열리고 외출했던 지사장 버홀터가 들어섰다.
휴가 상신을 올렸기 때문에 버홀터를 보는 오민철과 나카야마의 눈이 빛났다.
본사에서 휴가를 가로막을 이유는 없다.
물론 휴가를 오랫동안 가지 않았다고 하여 우선권이 있거나 그렇지는 않다.
다만 지난 4년 동안 단 한 번도 휴가를 간적이 없어 큰 일이 없는 한 통과 될 것이라고 버홀터는 말했다.
“잠깐 앉아보게.”
“비행기 표 예매 합니다?”
오민철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커다란 직사각형의 탁자를 놓고 세 사람이 앉았고 권총수는 창밖을 보며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서먹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 버홀터가 나카야마를 주시했다.
둘 사이에 무슨 일 있었느냐는 질문이었다.
“오목을 두면서 약간의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버홀터도 오목에 대해 알고 있다.
권총수와 오민철이 사무실에 들어서면 뒀기 때문이다.
“혹시 천왕그룹이라고 알고 있나?”
버홀터는 오민철을 향해 물었다.
오민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한국 재계서열 1위인 대기업이죠.”
오민철은 물론이고 권총수까지 요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오민철이 창가에 서 있는 권총수를 흘긋 살폈다.
천왕그룹과 재계서열 7위인 백서그룹의 총수는 형제간이다.
전직 대통령인 권철태까지 포함한 삼형제인 것이다.
천왕그룹의 권철악이 제일 큰 형님이고 둘째가 권철태, 백서그룹의 권철무 회장이 막내다.
권철태가 정치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두 그룹은 쾌속 성장했고 특히 대통령 재임시 두 그룹 모두 기업규모가 다섯 배 이상 성장하는 엄청난 위력을 보여주었다.
그로인한 특혜 시비가 끊이지 않았지만 누구도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다.
“어제 천왕그룹 관계자와 회장님이 텍사스에서 접촉을 했나보더군.”
회장이라면 다인코프 창업주 메몰라를 말하는 것이다.
“정치적 해결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완전히 엉켜 버렸네.”
지난 번 작전 실패로 이란정부는 강경했다.
한국 대사를 초청하여 강력하게 항의했고 심지어는 단교까지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자국민이 위기에 처했을 경우 타국의 영토에 들어가 작전을 결행할 수는 있다.
그런 작전이 가장 빈번한 나라가 미국과 이스라엘, 영국등이다.
미국은 가장 가까운 예로 빈 라덴을 잡기 위해 파키스탄에 허가 없이 들어갔었다.
이스라엘 역시 오래전 자국민을 구출하기 위해 우간다 엔테베 공항을 기습 공격한 적도 있다.
영국도 크고 작은 외국영토 침입 사례는 많다.
이번일은 테러집단의 인질극이자 유조선을 나포한 전쟁행위이기 때문에 유엔의 한국에 대한 시선은 이해되고 있었다.
다만 이란 정부의 반응이었다.
미국의 경제제재로 가뜩이나 어려운 처지인데 한국이 자국 영토를 침범하자 울분을 토하듯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백악관에서도 한 발 빼는 모양이야. 그럴 수밖에 없지. 가뜩이나 이란과의 관계가 험악한데 자칫 발을 잘못 담갔다가는 페르시아만이 불길에 덮일 가능성이 높거든, 특히 중국의 시선이 곱지 않네. 이집트 유전개발을 영국 BP에게 빼앗기면서 굉장히 예민해져 있어. 노골적으로 이란 편을 들고 있네. 그게 무슨 뜻이겠나. 미국에게 경고를 보내는 거지. 끼어들지 말라는 경고 말이야.”
“노실색시(怒室色市)라더니.”
멈칫!
오민철이 권총수를 바라보았는데 두 눈이 빛난다.
나카야마도 쳐다보았고 버홀터 역시 무슨 말이냐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중국 사기에 나오는 사자성어죠.”
꾸울꺽!
오민철이 크게 마른침을 삼켰다.
‘사...사기(史記)’
오민철이 나카야마를 바라보았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건 나카야마 역시 권총수가 말한 사기가 뭔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설마 저 자식이 사기를 읽었단 말인가’
사기라는 중국 고전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읽어본 적은 없다.
“직해하면 집안에서 분노한 것을 길거리에서 푼다는 뜻이죠.”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한다?”
“그렇지. 확실히 형은 뛰어나. 중국 입장에서는 영국에게 한 방 맞고 미국에 화풀이 하는 거지.”
오민철은 뛰어나다는 말에 깜짝 놀란다.
그건 분명히 화해의 메시지가 분명했다.
오목으로 틀어진 감정을 제자리로 맞춰 놓자는 권총수의 제안을 마다할리 없다.
순간적으로 욱 하는 마음에 욕을 하고 뒷담을 했지만 이 바닥에서 권총수 눈을 벗어나 먹고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별 것도 아닌 걸.”
오민철은 쑥스럽다는 표정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천왕그룹에서 우리에게 의뢰를 해온 모양이야. 더 이상 한국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이지.”
이 상황에서 또 다시 군사작전을 감행 한다면 그건 완전한 선전포고다.
양국이 워낙 멀어 전면전은 불가능하겠지만 외교에서부터 거칠게 충돌할 것이고 특히 중동석유에 의존하는 한국으로서는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석유를 싣고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하는 한국 유조선들을 이란 군이 가만 놔둘리 없다.
“우리 휴가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대기하라는군.”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걱정 말라고 하셨잖아요.”
오민철이 인상을 썼다.
“어제까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됐지. 그런데 갑자기 새벽에 대기하라는 연락이 왔는데 내가 무슨 재주 있나?”
“무조건 갑니다. 아버지께서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누님께서는 돌아가실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아들이라고는 딱 나 하나인데 부모님 임종을 보지 못하면 나중 어떻게 하늘을 보고 살란 말입니까?”
오민철은 버홀터를 한 대 때릴 듯 노려보았다.
“우리 짐 쌉니다?”
“오 팀장, 자네 왜 이래 진짜.”
“뭘요?”
“정말 몰라서 그래?”
“그러니까 뭘 모르냐고요?”
“캡틴의 휴가를 대기시킨 이유가 뭐겠나. 보나마나 한국의 천왕그룹 사태에 우리가 개입한다는 것 아닌가.”
“개입해요. 누가 하지 말라고 합니까? 우리 말고도 팀들 많잖습니까?”
권총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담배를 피워 물며 마치 남의 일인 양 탁자 유리 밑에 깔아 놓은 중동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카야마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목 운동을 했다.
“총수야. 우리 휴가 가야지?”
“가야지.”
권총수는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친구들한테도 휴가 간다고 이미 말해 놨어. 요즘 한국에서 족발이 굉장히 인기래.”
“족발 죽이지. 난 개인적으로 소주 안주에는 족발보다 더 화끈한 것은 없다고 본다. 새우젓에 퍽 찍어 먹으면 세상이 곧 나의 것이지.”
그러면서 오민철은 입맛을 다셨다.
족발이 뭔지 새우젓이 뭔지 알 리 없는 나카야마와 버홀터는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일강이 내려다보이는 흰색의 이층 단독주택이다.
다인코프 인터내셔널(DynCorp INTERNATIONAL)이라는 회사로고가 박힌 커다란 파라솔 아래 권총수 일행이 앉아 있었다.
비렌드라까지 포함한 네 사람은 캔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무거웠다.
술만 입에 들어갔다 하면 707시절 얘기를 포효하듯 토해내는 오민철 역시 부지런히 빈 캔만 늘려가고 있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만약 천왕그룹과 계약이 이뤄졌다면 다인코프에서 최정예라고 할 수 있는 자신들이 투입될 것은 백 프로다.
용병은 전장에 있을 때 그 가치가 빛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가슴 한 곳에 서늘한 기운이 돌고 있다.
위험하다는 신호였다.
“총수야!”
오민철이 입을 열었다.
“우리 계약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계약이 내일까지라도 오늘 일거리 주면 움직여야지 뭐.”
“그렇긴 한데.”
마음이 달라졌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화장실 갈 때와 올 때 마음이 다르다는 걸 인정한다.
처음에는 돈을 벌 욕심으로 물불 가리지 않았는데 이제는 작전의 위험도를 면밀히 분석하고 따진다.
회사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거역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다만 위험이 크다 싶으면 생명수당을 포함한 여러 가지의 보너스가 붙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싫다.
“형 벌어 놓은 돈 얼마나 돼?”
오민철이 씨익 웃는다.
“나 말이야?”
“솔직히 말해봐. 여기서 형 재산 빼앗아 갈 사람 없어. 형이 뺏길 사람도 아니고.”
오민철은 히죽 웃었다.
"몇 푼 안 되는데."
오민철은 나카야마와 비렌드라까지 스윽 한 번 훑더니 헛기침을 했다.
“주식, 부동산, 현금까지 합하면..."
오민철의 눈이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