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5화: 암살단(2)
경혜창은 단호히 말했다.
“보여 달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자율이 명령했다.
“소림의 자랑인 백보신권부터 펼쳐 보이지.”
스으으!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내들 몸이 허공으로 일장(3미터) 높이로 떠올랐다.
잠시 머문 듯 하더니 맞은편 절벽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쉬이이이!
이어 사내들의 양 주먹이 벼락같이 앞으로 뻗었다.
슈유유!
퍼퍼퍽!
산이 울리고 계곡이 흔들렸다.
와르르!
일부 바위들은 부서져 내리기까지 했다.
“오호!”
경혜창의 눈이 커졌다.
누군가 중국영화는 뻥이 너무 심하다고 혹평했다.
하지만 영화가 아닌 실제에서 사람이 날아갔고 주먹으로 바위를 부수는 것을 지금 보았다.
사내들은 처음 자리로 돌아왔는데 흔들림이 없다.
“다음은 소림이 자랑하는 비도술인 금혈추살비(金血追殺匕)를 보시겠습니다.”
이자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내들의 오른손이 앞으로 뻗어 나갔다.
슈우우!
금빛 광채가 나타났는가 싶었는데 파파팍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름드리 소나무에 열 개의 비도가 글씨를 만들었다.
‘중화천하(中華天下)’
깜짝 놀라던 경혜창이 손뼉을 쳤다.
짝짝짝!
인자무적동에 들어가기 전 이들의 신분은 중국의 최정예부대인 설표돌격대 소속이었다.
현대전에 대한 모든 전략 전술은 익숙해져 있었다.
이제 소림의 무공까지 얻었으니, 그야말로 이들에게 대적할 상대는 없을 것이다.
‘유성십절(流星十絶)’
육 년전 시진핑이 직접 내린 이름이다.
“때가 되었다. 너희들이 6년 반 동안 어둠 속에서 뼈를 깎는 수련을 한 보상을 받을 때가 되었다.”
스윽!
등에 지고 있던 배낭을 내리더니 안에서 커다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누군지 알겠나?”
유성십절로 불리는 열 명의 사내들 눈이 빛났다.
“스코치치란 놈이다. 카이로 쓰레기 마을 노동관리소장이지. 아주 거친사내다.”
사내들의 눈에서 레이저 같은 광선이 쏟아져 나왔다.
내공을 눈빛에 담아 사진의 모든 것을 기억에 담으려는 소림의 보리관목인(菩摛觀目印)이다.
지이잉!
한번 기억되고 눈에 확인되면 절대 잊혀지지 않는다.
보리관목인의 놀라운 점은 상대가 웬만한 변장을 해도 금세 알아본다는 것이었다.
보리관목인에 원래 얼굴이 각인되고 나면, 그걸 바탕으로 변형될 수 있는 많은 얼굴을 유추해낸다.
즉 완벽한 변장이 아니면 보리관목인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카이로에 있다. 반드시 놈을 잡아야 한다. 놈이 끝은 아닐 것이다. 그 뒤에 있는 놈을 끌어내야지”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유성십절이 불영보를 펼치며 계곡을 따라 순식간에 사라졌다.
잠시 그들이 사라진 계곡 아래를 바라보던 경혜창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얼마전 귀곡사의 죽음이 치밀한 암살이라는 걸 기어이 알아내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이집트 정부의 도움을 받아 쓰레기차 운전사 타메르를 중국으로 데려왔다.
갖은 고문을 동원한 취조에도 자신의 운전실수 일 뿐이라고 했다.
고문이 가해지고, 때로는 큰 돈으로 부를 약속하는 회유 작전도 폈다.
그런데 같은 질문, 같은 고문이 지속적으로 가해지고 이뤄지면서 타메르는 이상한 징조를 드러냈다.
일반적으로 그만큼 잠을 안재우고 고문을 가했으면 없는 거짓말도 만들어 내게 되어 있다.
일단 살고 보기 위해 평소 자신과 원한관계에 있던 사람이나 아니면 주위 누구의 이름이라도 들이대는 것이다.
그런데 죽는다는 비명만 지를 뿐 다른 말을 하지 않으므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해답은 이번에도 대력금강심법에 있었다.
대력금강심법의 내용중 내기가 흐르는 경락과 잠시 모이는 혈도가 있다. 그중 기억력을 관장하는 승령혈(承靈穴)이 있는데 그곳에 문제가 있다는 걸 발견한 것이다.
문제는 마비된 승령혈이 고의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냐 아니면 자연발생적, 즉 넘어져 바닥에 부딪치거나 하면서 일어난 일이냐는 것이었다.
어쨌든 지워진 승령혈 속의 기억을 되살리는데 성공했고, 스코치치로부터 지시를 받았다는 대답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자네는 뒤에 누가 있다고 보나?”
경혜창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스코치치가 주범이라는 걸 믿지는 않을테고 말이야.”
“그렇습니다. 그따위 쓰레기 노동사무소 책임자가 이런 엄청난 사건을 지시할 이유도 없고 끼어 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요.”
“결국은?”
“영국 아니겠습니까?”
“맞아. 내 말이 그렇네. 사건 전모가 밝혀지면 상황은 다시 바뀌겠지.”
“다시 바뀐다고 하면?”
“이집트 정부에게 얼마든지 개발사를 바꿔야 한다는 충분한 명분이 서는 것 아니겠나? 이집트에서도 당연히 거부할 이유가 없고.”
“결국 이번 일로 우리와 이집트는 더욱 거리가 좁혀 지는군요.”
“전화위복이 되는 셈이지.”
담배연기를 뿜어내는 경혜창 얼굴에 야심 가득한 웃음이 피어났다.
홍콩주재 영국 영사 베너블스는 퇴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홍콩 보안법이 통과된 이후 중국정부의 인권탄압은 더욱 노골화 되었고 조금이라도 반정부 구호를 외치는 사람은 즉시 체포하여 징역을 살게 했다.
홍콩의 살벌해진 공기에 숨이 막힌다.
이 아름다운 도시에 더이상 꿈과 낭만, 자유와 평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이잉!
책상위에 놔둔 자신의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 액정에 찍힌 번호가 낯설다.
“여보세요.”
잠시 듣고 있던 베너블스는 그만 끊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핸드폰을 내려놨다.
이른바 보이스 피싱 전화였다.
책상 위 가방을 들고 퇴근하려던 베너블스의 눈이 갑자기 반짝 거렸다.
재빨리 걸려온 전화번호를 보았는데 낯선 번호였고 그걸 뒷받침이라도 하듯 분명히 통화 내용도 은행대출에 관한 보이스 피싱이었다.
‘이런’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있어 재빨리 오른쪽 책상 서랍을 열고 손을 집어 넣었다.
안쪽 깊숙이 들어간 손은 서랍 천장에 붙은 십원짜리 동전 크기 버튼을 찾아 움직였다.
워낙 작은데다 책상 밑면과 부드러움이 동일하여 천천히 살피지 않으면 찾아내지 못한다.
슥!
약간 느낌이 다른 것에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스르륵!
뭔가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 안에서 꺼낸 건 아주 작은 핸드폰이었다.
영사관은 대부분 자국민의 안전이나 수출입 업무에 전념할 뿐이며 영사 역시 주재국의 인권이나 정책에 대해 본국정부를 대변하여 비판이나 평가를 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
대사와 달리 영사에게는 면책특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모든 나라의 정보활동이 대사관 위주로 진행되는 것 또한 그런 이유에서인데 핸드폰을 비밀스런 장소에 숨겨 놨다는 것은 일반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화악!
핸드폰을 꺼내 살피던 베너블스의 눈이 커졌다.
‘AAA’
영문 알파벳 에이(A) 세 개가 찍혀 있다.
조금전 보이스 피싱 전화는 그냥 걸려온 것이 아니었다.
보낸 문자에 대한 이쪽의 확인이 늦어지자 빨리 살피라는 독촉 전화인 것이다.
베너블스는 비밀전화를 이용해 누군가에게 재빨리 문자를 보낸 뒤 다시 서랍 비밀장소에 넣었다.
통화는 되지 않는 전화기다.
오로지 문자로 송수신이 가능하고 더욱 놀라운 건 기록이 남지 않는다.
확인이 끝나면 자동으로 내용이 지워진다.
오 분쯤 지났을 때 자신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뭐하나 베너블스.”
랜드로버 홍콩 대표이사이며 친구인 바비였다.
“바비!”
“오늘 약속 없으면 저녁 어떤가?”
“한가한가 보군.”
“그런 소리 말게 차가 팔리지 않아 미칠 지경일세. 바쁠수록 돌아가랬다고 차분하게 자네와 저녁이나 하면서 잠시 비즈니스는 잊고 싶은 마음이네.”
“일벌레인 자네 입에서 그런 푸념이 나오는 걸 보면 장사가 안되긴 안되는 모양이군. 그러지 어디서 만날까?”
베너블스는 식당 이름을 전달받은 뒤 전화를 끊었다.
사람 많은 식당이다.
시끄러운 공간일수록 두 사람의 대화는 편해진다.
시끄럽다 보니 누군가 도청을 한다거나 엿듣는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만나는 곳은 항상 사람들이 붐빈다.
바비의 눈이 빛난다.
“트리플 A라면 긴급에 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 아닌가?”
바비는 랜드로버 홍콩 지사장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MI6정보요원이기도 했다.
“북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트리플 A를 보낸 걸까?”
북경에서 암약하고 있는 블랙요원으로부터 온 AAA는 긴급을 요할 때 사용하는 암호였다.
“일단은 런던으로 보내야 하지 않나?”
“보내야지.”
지이잉!
베너블스는 약간 무거운 표정으로 만두 한 개를 집어 입에 넣었는데 주머니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찍힌 번호가 낯설다.
팟!
순간적으로 눈이 빛나면서 스팸 따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유성십절, 카이로에 비상 선포가 불가피합니다’
사내는 그 한마디를 하고 전화는 끊어졌다.
아무리 도감청 실력이 뛰어나도 10초 이내의 짧은 통화는 절대 잡아내지 못한다.
상대는 그걸 이용하여 본론만 뱉고 끊는다.
그래도 혹시 몰라 사용했던 전화기는 불에 태워 없애 버릴 것이다.
“그만 일어나야 할 것 같네.”
두 사람은 더 이상 앉아서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재빨리 런던으로 통지해야 했다.
* * *
이란 차바하르는 차바하르주의 중심 도시이다.
아라비아해에 위치한 항구도시이자 미국의 제재를 피해 이란으로 몰래 들어오고 나가는 화물선들의 비밀 무역항이기도 했다.
더욱 미국을 속이기 좋은 것이 옆 국가들인 오만과 인도가 자국의 물류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차바하르시 항구 일부를 10년 동안 임대하면서 들고 나는 배가 더 많아졌다.
인도 배인지, 오만국적인지 아니면 이란정부와 거래를 하는 비밀 무역선인지 구별해내기가 더욱 복잡해져 버린 것이다.
2019년 미국의 무인 드론이 차바하르 항구를 공중 정찰하다 이란 미사일에 격추가 되는 일이 발생하면서 양국 관계는 더욱 살벌해졌는데, 미국은 차바하르를 통해 이란의 원유가 들어오고 나간다는 강한 의심을 숨기지 않는다.
또한 이란 정부의 묵인하에 수 많은 테러조직들의 자금줄로 활용되는 밀무역이 횡행하고 있는 곳이 차바하르였다.
합법과 불법이 마구 뒤섞여 돌아가는 항구인 것이다.
거대한 유조선 한 척이 부두에서 멀지 않는 해상에 떠 있었다.
큰 배들은 곧장 접안하지 않고 화물 하역 순서가 될 때까지 부두 밖에서 기다린다.
밤이 깊어가면서 잠시 조용하던 부두는 새벽이 되어 다시 붐비기 시작했다.
부두의 새벽을 깨우는 건 어선들이었다.
페르시아만과 아라비해에서 유자망 조업으로 고기를 잡는 어선들이 출항을 하면서 부두는 소란스러워졌다.
유자망 조업은 그물을 수면에 수직으로 펼쳐서 조류를 따라 흘려보내면서 물고기가 그물코에 꽂히게 하여 잡는 방식인데, 부르릉 거리며 20여 톤쯤 되어 보이는 어선 한 척이 부두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좋은 어장을 선점하기 위한 어선들의 경쟁이 시작되면서 깜빡이는 불빛들이 바다 저편 어둠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그 중 한 척의 배도 마찬가지였다.
메트리스(Mattress)라는 뱃전의 글씨는 자세히 보면 읽을 수 없을 만큼 지워져 있는 것이 다른 어선과 다른 점은 없다.
갑판에 그물이 가득 쌓였고 다섯 명의 어부들이 그물을 꿰매며 손질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