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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302화 (302/651)

제302화: 외나무 다리(2)

한참을 생각 하는 듯 하더니 실소를 터뜨렸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카이로까지 왔다는 건 놀라운 일임에는 분명했다.

‘재밌는 사람들이군’

얼마 전까지는 죽이기 위해 난리를 피우더니 이제는 만나자고 한다.

권총수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카이로에 언제까지 돌아 올 수 있소?”

“헬기로 왔으니 금방 갈 것입니다.”

헬기라는 빠른 이동 수단이 있으므로 오늘 약속을 잡아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빨리 만나고 싶은 모양이었다.

잠시 생각을 하는 듯 다시 뜸을 들인다.

일부러 시간을 끄는 것이다.

시간을 끄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상대의 의도를 느껴보기 위한 것이다.

진짜인지 아닌지, 덫인지 화해의 장인지 말이다.

두 번째는 일부러 반응을 늦게 보여 상대에게 아직까지 감정이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전달하려는 것이다.

이쪽의 그런 감정상태가 전달되면 만나게 되더라도 분위기 주도권을 자신이 가져올 수 있다.

“로몰아치 아십니까? 34번 국도변에 있는 휴게소죠.”

“압니다.”

“내가 알기로 그곳에서 20여 킬로 떨어진 곳에 미군부대가 있던데 캠프 선(SUN)이던가요?”

“맞습니다.”

“헬기 착륙 가능할 것 아닙니까?”

“물론입니다. 그곳에 차로 곧장 가도록 하죠.”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를 넘겨주는 듯 잠시 조용하다.

“만나려고?”

오민철이 낮게 속삭인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날 만나기 위해 랭글리 총수가 왔다는데 피할 필요 없잖아.”

“함정 아닐까?”

오민철의 말에 권총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나친 의심도 문제이지만 상대를 경계해서 나쁠 것 또한 없다.

의뢰를 해놓고 뒤에서 방아쇠를 당겨 버린 자들이다.

“병력 깔아?”

용병들을 대기시키자는 말이다.

“걱정되면 형만 그 헬기에 동승해 오던가? 작전 같은 것 필요 없어.”

“하긴 병력이 있다고 죽을 목숨 사는 것도 아니고, 죽으려면 접시 물에 코 박고서도 뒈지는 것이 인생이지. 흐흐흐! 알았어.”

전화가 끊어졌다.

권총수는 핸드폰을 내리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스르르르!

앞 유리를 내리며 팔을 창문에 걸쳤다.

‘오민철’

혈육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쏟는 마음 씀씀이는 눈물겹다.

이래서 혈육 혈육 하는가 싶다.

아는 이 한 명 없는 세상이지만 오민철이 곁에 있어서 가끔은 웃는다.

부우웅!

로몰아치까지는 100킬로가 조금 안 된다.

국도라지만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두 시간쯤 소요될 것이다.

포드 익스플로러가 도로 저편으로 사라졌다.

번스국장은 미군부대에 있었다.

대사관보다 미군부대가 안전하다.

공식적인 방문이면 이집트 정부에서 특별 경호를 지원하지만 변장을 하고 조용히 들어왔기 때문에 눈에 띄는 대사관 보다는 부대가 위험으로부터 안정적이다.

번스국장은 맥보란의 전화를 받았고 커다란 대추야자나무 아래 놓인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넥타이도 메지 않는 간단한 정장인데 얼굴표정은 썩 밝지 못했다.

권총수가 만남을 받아 들였다지만 과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계획은 없다.

미국은 명령하는 나라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나라이다 보니 모든 것이 고압적이고 외교에서도 그런 행태가 도드라져 이따금 무례하다는 욕을 먹는다.

특히 CIA국장은 전 세계 모든 정보를 틀어쥐고 있어 더욱 차가운 존재, 두려운 인물로 그려진다.

그런데 사막의 흑새라는 이름 앞에서는 묘하게 흔들린다.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반응이 못마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했다.

군인들이 하나둘 다가오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하려는 것이었다.

부대 지휘관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자신이 CIA국장이라는 걸 알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늘이 만들어진 야자나무 아래로 병사들이 몰려들었다.

몇몇 병사들은 누구냐는 듯 옆의 동료를 팔꿈치로 치며 묻지만 속 시원하게 대답해주는 이는 없었다.

번스국장은 핸드폰을 꺼내 통화버튼을 터치했다.

주위에 휴식중인 군인들이 있었으므로 천천히 그늘 밖으로 나와 통화를 해야 했다.

“도착했습니다.”

네비이 씰 3팀에서 1개 소대병력이 차출되었다.

내이비 씰 소대병력은 대부분 16명 전후로 이뤄지며 소대장 계급은 대위이고 부소대장은 중사 또는 상사가 맡는다.

소대는 2개 분대로 나누어졌다.

랭글리를 출발해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한 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은 치열했다.

사막의 흑새와 화해한다는 건 CIA로서는 다시없을 망신이자 치욕이라는 쪽과 맥보란을 선두로 더 이상의 충돌은 피해만 양산할 뿐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는 쪽이 팽팽히 맞섰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몰라 레바논에 있는 씰3팀에서 1개 소대병력을 부른 것이다.

전화를 걸어온 이는 부하 직원이다.

“일단 휴게소에 잠복하게. 워낙 눈치가 빠른 친구니까 각별히 조심해야 할 걸세.”

“알겠습니다.”

공격을 하지 않든 하든 일단 불러냈으므로 배치는 하기로 마음먹었다.

번스 국장은 북적이는 군인들 사이로 섞이며 다시 담배를 물었다.

초조한 것이다.

로몰아치가 15킬로 남았다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포드 익스플로러는 순식간에 이정표를 지나쳤다.

BBC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을 듣고 가고 있는데 3시가 되면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가장 먼저 흘러나온 뉴스는 역시나 영국의 석유회사 BP가 이집트 석유 채굴권을 얻었다는 것이었다.

영국 현지 반응이 굉장하다고 했다.

워낙 덩치가 큰 사업이고 50년 개발권 운운하면서 위기에 몰린 보수당 정부를 살리고 있었다.

팟!

그때, 뉴스를 듣던 권총수의 눈이 빛났다.

‘아랍계 방송 알자지라는 한국 천왕중공업 유조선 엔터프라이즈호가 아라비아해에서 실종되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오만정부는 엔터프라이즈호의 정확한 위치와 행방을 추적 중에 있으며...’

아라비아해 아덴만 페르시아해 인근에서는 선박사고가 자주 일어난다.

테러단체나 해적들이 유조선을 공격하여 납포하고 금전을 놓고 협상을 벌인다.

물론 자신들의 활동자금을 만들기 위한 것인데 협상으로 잘 마무리 된 예도 있지만 끝내 선원들을 죽이고 유조선에 실린 기름은 개인이나 민간회사에 팔아 버리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었다.

오래전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화물선이 나포 되었으나 해군 특수전 여단에 의해 선원과 배를 안전하게 구출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천왕중공업이면 권씨가문 아냐’

권씨(權氏).

피식!

권총수는 갑자기 실소를 지었다.

자신도 권씨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 언급한 그 권씨와 자신의 권씨는 한 집안이다.

천왕그룹 권철악 회장은 한국의 전직대통령을 지낸 권철태의 바로 위 형님이다.

권철태는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천왕그룹은 작년 시가총액으로 한국재계서열 1위로 올라섰다.

동생이자 셋째 권철무가 운영하는 백서그룹 또한 재계서열 5위에 올라 있는 그야말로 황금가문(黃金家門)이다.

20만 톤짜리 유조선이면 대략 140만 배럴의 원유가 실린다.

어림잡아 7천만 달러의 가치다.

천왕그룹의 규모로 볼 때 별것 아니지만, 유조선을 향한 테러조직의 공격은 갈수록 빈번해지고 있고 한 번씩 사건이 발생하면 유가는 폭등하며 춤을 춘다.

끼이익!

권총수는 갑자기 차를 길가에 세웠다.

고개를 넘어가는 산길이다.

사람도 없고 오는 차량도 보이지 않는다.

온통 누런 황토 빛 산과 듬성듬성 서 있는 올리브 나무가 전부이다.

이 고개를 넘어가면 르몰아치 휴게소가 나온다.

거리로 따지면 2킬로 조금 더 되는 거리인데 갑자기 차를 세운 권총수는 이마를 찡그렸다.

요 며칠 너무 바쁘게 움직인 데서 오는 피로일까.

권총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공을 지닌 강호무사가 피로를 느끼지 말란 법은 없다.

운기조식으로 푸는 피로와 잠을 잔다거나 몇 일 집에서 쉬면서 회복하는 피로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찌뿌둥한 몸 상태에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차를 몰았다.

부우웅!

굽이굽이 이어지는 고갯길을 넘어서자 다시 내리막길이다.

가파른 좌우 산들이 조금씩 낮아지고 시야가 트인다.

길 좌우로 수확기에 접어든 누런 밀들이 자라고 있고 불어오는 바람에 출렁거리는 물결이 노랗다.

끼이익!

또 다시 차를 세운다.

앞서와는 달리 권총수의 얼굴은 더욱 심각해졌다.

‘설마!’

분명한 살기다.

고개를 넘기 전에 느꼈던 피로는 본능적으로 살기를 인식한 육체의 반응을 피로로 인식한 것 같았다.

그런데 고개를 넘자 뚜렷하게 피곤함이 아닌 살기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

살기.

지금 살기가 느껴질 이유가 없다.

자신과 화해를 목적으로 온 CIA번스 국장이다.

권총수는 다시 차를 출발시켰고, 이번에는 채 이백 미터도 가지 못하고 세 번째 멈춰 서고 말았다.

‘틀림없는 살기다’

권총수는 어금니를 물었다.

살기는 광범위했다.

그건 적지 않은 인원들이 잠복해 있다는 뜻이었는데 이 정도라면 군병력에 가깝다.

잠시 핸들을 잡고 생각에 잠긴 권총수는 핸드폰을 들고 번호를 눌렀다.

맥보란에게 전화를 걸려는 것이다.

멈칫!

권총수는 액정을 보며 눈을 빛냈다.

통화권 이탈 지역이라는 글씨가 떴다.

사막이 대부분인 이집트이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휴대폰은 잘 터지는 편이지만 이런 산속으로 들어오면 가끔 이런 일이 생긴다.

권총수는 차를 천천히 이동하며 핸드폰을 살폈다.

통화 가능 지역을 찾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판단하는 맥보란은 뒤통수치는 사람은 절대 아니다.

캠프 선(SUN)기지까지 찾아온 사람이 휴게소에 무장병력을 깔아 놓고 자신을 기다린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맥보란에 대해서 워낙 잘 알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더욱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었다.

일단 통화를 해봐야 한다.

‘떳다’

통화 가능지역이라는 신호가 나타났다.

재빨리 맥보란의 번호를 누르고 귓가에 대었다.

신호가 가고 있었다.

“음!”

권총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권총수는 재차 번호를 눌렀지만 이번에도 연결은 불가능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민철에게 연결을 시도했다.

헬기로 이동하는 만큼 맥보란과 동행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젠장!”

오민철도 받지 않는다.

헬기소리 때문에 전화를 받지 못할 일은 없다.

작전 군인들은 헬기에 탑승하면 핸드폰을 손에 쥐도록 되어 있다.

로터 소리에 주머니에 두거나 손이 아닌 어떤 곳에 두어도 전화가 울리는 걸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즉, 두 사람 모두 손에 쥐고 있을 텐데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것에 고개를 갸웃 한 권총수는 이번에는 나카야마에게 걸었다.

알파 부대는 지금 정비중이다.

“캡틴 어디야? 민철이 맥보란과 헬기로 갔는데.”

“야마 형,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안 받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자주는 아니지만 아주 드물게 신호가 가는데도 전화는 울리지 않는 수가 있어. 그걸 무슨 현상이라고 하는데. 뭐라더라. 헌데 왜?”

“아냐!”

“넌 어디야?”

“가는 길이지. 저녁에 보죠.”

권총수는 핸드폰을 내렸다.

다시 차로 돌아와 운전석에 앉은 권총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살기는 누군가 날 죽이기 위해 숨어 있거나 다가올 때 풍긴다.

분명한 살의(殺意)인 것이다.

살의를 갖고 기다리는 적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다.

권총수는 조수석 앞에 있는 콘솔박스를 열었다.

툭!

열자마자 권총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총을 주워든 권총수는 탄창을 뽑아 실탄을 눌러본다.

눌러도 들어가지 않은 것이 19발 모두 들어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소음기를 돌려 끼웠다.

끼르르!

완전하게 돌려 끼운 뒤 콘솔 박스를 뒤져 탄창 한 개를 더 꺼내 주머니에 넣고 닫으려다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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