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8화: 천하 통일(2)
권총수는 담배를 물고 있었다.
팔소매를 걷어붙인 채 전면 벽에 걸린 보드판을 바라보았는데 낙서를 하듯 빨간색과 검정색 매직으로 쓴 글씨들이 빼곡했다.
뭔가 풀리지 않는 듯 권총수의 이마는 잔뜩 찌푸리다가 의자에 앉아 있는 지강을 돌아보았다.
지강의 생각을 말해보라는 눈짓이었다.
지강 역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무거운 얼굴로 있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보드판을 향해 걸어가던 지강이 매직을 들어 귀곡사라는 이름에 엑스자를 그어 버렸다.
권총수의 눈이 커졌다.
“뭐하자는 거요?”
“보나마나 이번 작전을 총괄 지휘할 것입니다.”
“그래서 없애자?”
“귀곡사가 살아있는 한 시베이 유전으로 개발권이 넘어갈 가능성이 99.99프로 입니다.”
권총수 역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지강의 설명과 자신이 취합한 정보에 따르면, 귀곡사가 대단한 건 사실이었다.
웬만한 일은 시진핑이 믿고 맡길 정도였다.
그러므로 귀곡사를 어떤 식으로 상대하느냐가 이번 작전의 성패를 좌우 한다고 판단을 내렸다.
지강의 뜻대로 그를 없애 버린다면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귀곡사는 시진핑 국가주석의 오른팔일 만큼 그의 위치는 강력하고 절대적인 것이다.
그를 없앤다는 건 중국정부에 총구를 겨누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죽여야 합니다.”
지강은 다시 강조했다.
시진핑을 증오하는 자신의 개인적 감정 때문이 절대 아니라고 했다.
수많은 중국의 반체제 인사들의 실종 배후에는 귀곡사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그래도 암살은 안 됩니다. 꼭 죽여야 한다면 철저히 암살의 징후가 발견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말은 했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프로페셔널 킬러들도 최대한 사고나 자연사로 위장하여 표적을 제거하지만 끝에 가서는 암살이라는 것이 들통나고야 만다.
“절대 살려둬서는 안됩니다. 내가 위험을 감수하며 이집트로 날아온 것도 그를 죽이기 위해서죠.”
지강은 자신의 주장을 넘어 권총수에게 귀곡사를 죽여 달라고 사정을 하고 있었다.
“러시아 푸틴은 신경가스를 포함한 화학제를 이용해 정적을 죽이지만 시진핑은 귀곡사가 그 역할을 하죠. 중국 정치인이나 재벌들중 갑자기 실종된 인물이 있다면 시진핑의 지시를 받은 귀곡사가 제거했다고 보면 됩니다.”
권총수는 창문의 커텐을 열어젖혔다.
사방이 어둠이다.
가난한 동네의 밤은 유난히 더 어둡다.
모까땀은 카이로 전역에서 생긴 쓰레기가 모여 분리 처리되는 곳이다.
이른바 쓰레기 마을로 불리는데 이곳 모까땀 노동관리소 소장 스코치치가 사무실을 들어섰다.
모까땀 노동관리소는 쓰레기 마을에 들어오는 수 많은 차량들을 상대로 입차(入車)료를 받는다.
딸칵!
출근하자마자 담배를 피워 문 스코치치는 창문을 열었다.
아직 아침인 까닭에 악취가 덜하지만 해가 뜨거워지기 시작하면 온 동네는 냄새로 찌들기 시작한다.
처음 맡는 사람들은 골이 지근거리고 토하기도 하지만 오래 생활하다보면 그럭저럭 지낼 만 하다.
똑똑!
노크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문이 열리더니 대나무 지팡이를 짚은 노인 들어서자 스코치치는 눈살을 찌푸렸다.
소장인 자신을 포함해 사무실 직원은 모두 셋이다.
한 명은 입구에서 입차료를 받는 징수원이고 다른 한 명은 여직원이다.
“누구십니까?”
노인은 육십 후반 정도로 보였다.
모자까지 달린 회색의 긴 젤라바(롱 코트처럼 발목까지 내려오는 장옷)에 빛바랜 검정색 구두를 신었다.
“어이쿠!”
노인은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스코치치는 피우던 담배를 끄고 천천히 다가와 맞은편에 앉아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노인은 주머니를 뒤척이더니 말보로 레드를 꺼내 한 개비 입에 물었다.
지포 라이터를 꺼내더니 몇 번 딸칵 거렸다.
불이 깜빡이기만 하고 심지에 붙지 않자 보다 못해 스코치치가 자신의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었다.
“고맙소!”
노인은 부드러운 웃음을 흘렸다.
노인은 깊게 담배를 빨아 들이더니 연기를 길게 내 뿜었다.
“자네 계좌번호 좀 주겠나?”
“네?”
“은행 계좌 말일세.”
대뜸 은행계좌를 달라는 말에 스코치치는 눈을 깜빡 거렸다.
처음보는 노인이 다짜고짜 은행계좌를 말해달라고 한다.
스코치치는 찌뿌린 표정으로 노인의 위 아래를 훑었는데 치매 걸린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영감!”
“인생에서 기회는 자주 오는게 아닐세.”
그때 카미스(위 아래 하나로 된 토브와 비슷)를 입고 그 위로 카프탄으로 불리는 장포를(여자들이 하는 숄과 비슷) 걸친 사내가 들어섰다.
징수원으로 일하는 올해 스물 아홉 살의 직원 아지지다.
그 역시 낯선 노인의 등장에 눈을 크게 뜨더니 누구냐는 듯 스코치치를 보았다.
“도대체 누군데 내 계좌번호를 달라는 거요?”
계좌번호를 가르쳐 줬다고 통장에 들어있는 돈이 인출되는건 아니다.
그러나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는 있다.
은행직원과 절친한 관계라면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잔고 확인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쓰레기 동네에서 태어나 쓰레기 동네에서 성장했다.
나름 태어나면서부터 인생 쓴맛 단맛 볼 만큼 본 것이다.
자신이 쓰레기 마을 사람들의 공동 재산인 입차료를 징수하는 노동관리소 소장이 된 건 철저히 야무지기 때문이다.
히죽!
스코치치는 웃고 말았다.
“영감, 이게 몇 개요?”
스코치치가 손가락 두 개를 세워 보이자 노인이 잔잔한 웃음을 흘렸다.
“두 개 아닌가?”
“이건!”
이번에는 양손가락 열 개를 모두 세웠다.
“열 개.”
“영감 이름이 뭐요?”
“타레미라고 하네.”
대답하는 태도나 모습은 정상이다.
“싫으면 관두고, 그럼 자네 계좌번호 좀 주겠나?”
이번에는 아지지를 보며 말했다.
아지지 역시 깜짝 놀란다.
“사내 녀석들의 간덩이가 이렇게 작아서야 어떻게 동업을 하겠는가.”
노인은 그만 돌아가야겠다는 듯 일어서려고 했다.
그때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한참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스코치치의 눈이 반짝 빛났다.
단순히 실성한 노인의 행동으로 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묘한 느낌이 흐르고 있다.
거기에 결정적인 건 동업이라는 말이었다.
종이 한 장을 꺼낸 스코치치는 계좌번호를 갈기듯 써서 내밀었다.
“역시 내가 사람 하나는 제대로 보았군.”
노인은 핸드폰을 꺼내 계좌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한참 전화기와 씨름을 하더니 빙긋 웃었는데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딩동!
스코치치는 자신의 핸드폰 액정을 보았다.
문자 한 통이 왔다가 꺼지고 있었다.
재빨리 문자를 확인하던 스코치치의 눈이 커졌다.
“허억!”
소스라치며 다시 한 번 확인을 했다.
보고 또 봐도 자신의 통장에 지금 막 50만 달러가 입금되었다는 문자다.
“말도 안돼.”
눈을 비비고 다시 본다.
틀림없는 오십만 달러다.
“어엇!”
고개를 들었는데 조금전까지 앉아있던 노인이 보이지 않는다.
“노인 어디갔나?”
“갔습니다.”
책상에 앉아 있던 아지지가 말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스코치치는 사무실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밖으로 나온 스코치치는 좌우 골목을 살폈지만 쓰레기 마을로 출근하는 사람들 말고는 보이지 않았다.
지이잉!
그때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낯선 번호가 떴다.
“여보세요.”
짐작되는 바가 있어 망설이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헛헛. 돈 잘 받았나?”
“영감님!”
영감에서 영감님으로 바뀐다.
돈의 위력이다.
“부탁하나 들어주면 그만큼을 더 입금 시켜주겠네.”
“잠깐!”
스코치치는 길게 숨을 한 번 내 쉬었다.
헷갈린다.
꿈은 아닌데 도무지 무슨 일인지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
“영감님 일단 만나시죠. 만나서.”
“아닐세. 자네도 나도 서로 모를수록 더 좋은 일이지. 얼굴을 본 건 오늘 한 번으로 끝내고 앞으로는 전화나 아니면 메일을 이용하세나.”
스코치치의 눈이 가늘어졌다.
순간적으로 어쩌면 아침에 봤던 연령대인 70보다 훨씬 젊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목소리가 카랑카랑했다.
스코치치는 진지한 얼굴로 노인과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밤의 어둠이 걷히면서 쓰레기를 가득 실은 청소차들이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늦으면 출근 차량으로 도로가 막힌다.
출근길 정체가 생기기 전에 쓰레기 마을로 들어가기 위한 청소 차량들의 질주가 시작되었다.
신호위반은 예사고 과속 또한 당연한 일이다.
쿠쿠쿵!
쓰레기를 가득 실은 트럭 한 대가 외곽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핸들을 잡은 운전사는 노랑색의 작업복을 걸쳤는데 입가에 담배를 물고 있었다.
해가 질 무렵과 동이 트기 직전이 가장 위험하다.
라이트를 켜도 사물 구별이 쉽지 않아 가장 많은 사고가 일어나는 것이다.
엇!
커브길을 돌아가던 운전사의 눈이 커졌다.
차량의 관성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중앙선을 걸치며 돌았는데 맞은편에서 승용차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적재정량 20톤 보다 1.5배 가까이 많이 실었다.
급작스런 핸들 조작은 차량 전복을 불러올 수도 있다.
콰아앙!
거기다 속도까지 붙었고, 마주 오는 승용차 역시 굉장한 스피드였기 때문에 피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충돌 당시 차가 튕겨 나가면 그나마 탑승자가 입게 될 부상이 적어진다.
받는 충격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인데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사고는 그러지 못했다.
승용차는 트럭 밑에 깔린 채 계속 밀려갔고 급기야는 조금씩 안으로 말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트럭은 200여 미터 정도 더 달리다 멈췄다.
승용차는 벤츠였지만 강력한 트럭에 깔려 납작해졌고 지나온 길바닥에는 탑승자들이 흘린 것으로 보이는 핏물이 떨어져 있었다.
기사는 재빨리 차에서 뛰어내리더니 허리를 구부려 트럭 바닥을 살폈다.
아스팔트로 떨어지는 핏물을 보며 잠시 눈을 감더니 핸드폰을 꺼내 123으로 전화를 걸었다.
“빨리 와주십시오. 3번 외곽국도 알 무아즈 학교 앞입니다.”
트럭이 멈춘 곳에서 오른쪽으로 학교가 하나 있었는데 알 무아즈 초등학교란 간판이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기사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잠시 착잡한 얼굴이더니 어느 순간 어금니를 단단하게 물었다.
일주일 전 솔깃한 제의 하나가 들어왔다.
제안자는 쓰레기 마을 모카땀 노동관리소장 스코치치였는데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자네 빚을 많이 지고 있더군?’
이슬람에서 도박은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도박을 전혀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불법 도박시설을 이용해 얼마든지 서방 사람들이 즐겨 찾는 카지노 맛을 낼 수가 있었다.
이른바 도박의 정점이라는 바카라를 비롯해 블랙잭과 포커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누군가 도박중독은 마약중독보다 무섭다고 했는데 그걸 실감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한 푼 두 푼 잃으면서 쌓인 빚이 이집트 화폐로 천만 파운드가 조금 넘는다.
천만 파운드면 일 년 동안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벌어야 하는 거액이었다.
문제는 기간이다.
노름빚은 결코 한 달을 넘기지 않는다.
상환 날짜가 곧 다가온다.
트럭을 팔면 갚을 수는 있으나 당장 생계수단이 사라지게 되므로 그건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제 날짜에 돈을 갚지 못하면 차를 뺏길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그들이다.
그러던 차에 스코치치가 제시한 거래는 망설이거나 주저할 이유가 없는 조건이었다.
과실치사로 7,8년 살고 나오면 된다.
대신 빚은 깨끗하게 청산되고 자신이 없어도 가족들이 7,8년 동안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
삐뽀!
삐뽀!
구급차와 경찰차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견인차까지 도착하면서 청소 트럭이 들렸고 밑에 끼인 승용차를 끄집어 냈다.
모두 세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즉사였다.
하나같이 동양계였다.
“빌어먹을!”
차적 조회를 하던 교통경찰의 눈이 커졌다.
중국 대사관 차량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