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1화: 도시자객(3)
긴급 작전이라면 전화가 아닌 랭글리만의 특별 양식이 있는데 음어로 보낸다.
“맥입니다.”
“오랜만일세. 데이비스일세.”
“국장님!”
전략분석국장 데이비스이다.
처음 입사했을 때 데이비스 밑에서 1년 정도 일을 했으며 긴급작전에 대한 분석과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전략분석국이다.
자신의 직속상관은 아담스이다.
“당장 들어오게. 회의에 참석하게.”
갑작스런 귀국 명령에 맥보란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있었다.
“아담스 국장이 사망했네. 아파트에서 뛰어내렸지. 우선 발표는 자살로 했지만 그가 자기 생명 난도질 할 사람인가.”
꿀걱!
맥보란은 마른침을 삼켰다.
“골드 셀리도 낚시중 숨졌네. 익사 처리했지만 CIA블랙요원이 계곡의 급류에 휘말려 죽을 사람인가. 보호자도 같이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맥보란은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있었다.
“왜 말이 없나? 집히는 곳이라도 있나?”
맥보란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바로 귀국 하겠습니다.”
맥보란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들이 마신 맥보란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권총수의 행방이 CIA 감시선에서 벗어나는 순간 불길함을 예감했었다.
하지만 이토록 속전속결로 모든 걸 정리해버릴 줄은 몰랐다.
딸칵!
담배를 물었다.
최악의 결과가 나타나고 만 것이다.
마음 한편에서는 권총수에 대한 미안함이 작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은 미중앙정보국 요원이다.
미안하지만 권총수가 골드 셀리 제거에 실패하길 바랐다.
후우!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될까.
CIA가 이대로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피가 튀기는 보복전이 벌어지겠지’
문제는 누가 이겨도 엄청난 피해를 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권총수는 강호무사 출신이고 그에게는 CIA 요원 누구도 모르는 신비한 힘이 있다.
더 두려운 건 사막의 흑새에 대한 소문을 정보국 요원들이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과학을 벗어나는 일이면 무조건 무시해 버린다.
바로 거기에 CIA의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은 사건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일어난다.
정보국 요원들은 CCTV가 있으면 당연히 적이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다.
CCTV를 피한다는 건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권총수는 전혀 촬영되지 않고서도 제집처럼 드나드는 능력을 지녔다.
맥보란은 담배를 끄고 일어나 샤워장으로 들어가 몸을 씻기 시작했다.
그리고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카이로 국제공항에 나타났고 예약한 델타항공으로 워싱턴을 향해 날아갔다.
랭글리는 워싱턴 근교에 있는 조그만 소도시였다.
이곳이 바로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CIA본부가 있다.
백악관 바로 턱 밑에 위치한 것이 CIA의 위상을 분명하게 증명되고 있다.
장방향의 긴 탁자를 놓고 일곱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맥보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마흔 중후반의 인물들로 보였다.
맨 상석에 앉은 콧수염에 짧은 흰머리의 사내가 오늘 회의를 주재한 인물이며 이곳의 총 책임자인 국장 번스다.
새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번스국장에게 이번 사태는 무척 심각하고도 위협적인 사태였다.
회의는 답답하게 흘러갔다.
대책이라고 내놓은 의견들이 거의가 미국의 자존심 운운하며 사막의 흑새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켜보는 맥보란은 답답했다.
‘제까짓게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특수부대가 일제히 덮치면 별 수 있겠느냐’
는 의견들이 대부분이다.
맥보란은 한숨을 쉬었다.
도무지 저런 사람들이 CIA 수뇌급이라는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누군가 중간까지는 실력으로 올라가지만 그 이상은 정치력이 좌우한다고 했는데 저들도 그렇게 저 자리를 잡은 것일까.
“맥, 자네는 왜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가? 자네를 부른건 누구보다도 그자를 가장 잘 알기 때문이야.”
모든 시선이 맥보란에게 멎었다.
“조금전 특수부대를 동원하고 아파치 헬기 운운하셨는데 어떤 식으로 동원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는 전 세계가 증오하는 테러범도 아닙니다. 오로지 랭글리와 감정이 깊은 관계일 뿐인데 그를 없애기 위해 군부대를 동원하고 아파치를 띄운다고 했습니까?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미국 본토가 아닌 남의 나라 영토에서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잠깐 달아올랐던 회의실 공기가 급속히 식었다.
“북극이나 남극 같은 사람이 살지 않고 어떤 전투가 일어나도 세상 사람이 모를테니 괜찮겠지만 카이로 중심가에서 폭탄을 터뜨립니까?”
“자네 지금 우릴 비아냥거리는가?”
대테러센터 도르시 국장이 인상을 썼다.
“저는 지금 여러분들이 내놓은 계획에 대해 참담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빈 라덴을 잡을 때도 파키스탄 정부 몰래 들어가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미국도 아닌 이집트에 있는 그를 어떤 식으로 특수부대가 제압하려는지요. 빈 라덴처럼 사람들이 드문 외곽에 사는 것도 아니고 일반 시민들 속에 있습니다?”
“계속 얘기 해보게.”
번스 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절대 그를 이기지 못합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10층 건물을 날아 오를 수 있는분 계십니까?”
“자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이봐. 자네 아주 건방지군.”
간부들이 버럭 소릴 질렀다.
맥보란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10층 건물을 아무런 주위 도움을 받지 않고 단번에 올라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농담이 지나치거나 부풀리면 결례일세.”
전략분석국의 국장 브라멜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닙니다. 오히려 사실을 무척 축소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설명하면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기에,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그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있을지 몰라도 죽인다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봅니다. 물론 아무도 없는 텅빈 사막에 세워놓고 미사일을 날린다면 가능할 테지만 그가 그런 위험에 빠질리 없죠.”
“놈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하여 불렀는데 혹만 붙이고 있군.”
전략분석국 브라멜 국장이 투덜거리더니 정색하여 물었다.
“그럼 자네 생각을 말해보게.”
“공존이죠.”
말이 끝나자마자 맥보란이 말했다.
“세상을 이익만 보며 살 수는 없죠. 때로는 손해인 줄 알면서도 한발 물러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같이 살자는 얘긴데?”
“그를 우리편으로 끌어 안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우리 CIA를 이토록 참혹하게 만든 놈과 저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자는 말인가?”
대테러센터 도르시 국장이 거칠게 뱉었다.
“적과는 공존불가라는 것이 미합중국의 기본 방침일세.”
“포용할 수 있는 적이라면 싸우는 것보다는 훨씬 이득이 되겠지요.”
회의는 끝날 줄 몰랐다.
맥보란은 권총수와 동행을 강조했으나 국장을 제외한 나머지는 제거에 초점을 맞췄다.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맥보란은 옷매무새를 다시 한 번 살핀 뒤 노크를 했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지만 맥보란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미중앙정보국장 번스가 들어서는 맥보라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앉게.”
창가에 서 있던 번스는 소파를 가리켰다.
맥보란이 소파에 앉고 번스 국장은 등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맥보란은 뻘쭘히 앉아 있었다.
부른 사람이 등을 돌린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으니 자신도 마땅히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번스 국장이 자신을 골탕 먹이기 위해 담배를 피우고 있는 건 절대 아니다.
번스 국장은 지금 어떤 고민을 갖고 있다.
그 고민이 덜 해결되어 담배를 피우며 마지막 정리를 하려는 것이다.
시간을 버는 행동인 것이다.
“맥!”
번스국장이 돌아섰다.
“공존보다 아름다운 말은 많지 않다네.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냐.”
“아주 쉬운 일입니다. 최소한 사막의 흑새에게는 어렵지 않죠. 그는 소통이 되는 사람입니다.”
“극찬이군.”
“직접 한 번 만나 보시죠. 제가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그 편이 가장 빠를 듯 합니다.”
번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후 표정을 풀고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어떻게 알았을까. 블랙요원의 신상은 1급 비밀인데 말일세. 그가 하늘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다 보는 전지전능한 분도 아닐테고 말이야?”
“이 또한 그의 능력이라고 봅니다.”
“무슨 말인가?”
“그는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든 항상 그 밖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힘들고 어려운 일도 사막의 흑새에게는 쉬운 일이라는 의미였다.
번스 국장은 상체를 뒤로 붙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 * *
포드 익스플로러 한 대가 멈춰 섰다.
모래주머니를 단단하게 쌓아 올린 초소의 차단기가 앞을 막고 있으며 M4를 든 용병이 다가왔다.
스르르!
용병이 다가오자 운전석 유리가 내려갔다.
“오민철 팀장을 만나러 왔소.”
“팀장님과 어떻게 되십니까?”
“캡틴이 왔다고 전해 주시오.”
그러면서 머리에 터번을 두른 권총수가 다인코프에서 발행한 사원증을 내밀었다.
사원증을 확인한 용병은 다시 건네주며 빙긋 웃었다.
“들어가도 좋습니다.”
그러면서 안쪽에 있는 동료에게 사인을 보내자 차단기가 올라갔다.
부우웅!
포드 익스플러로가 철조망이 사방으로 쳐진 부대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은 모두 세 동이다.
한 동은 생활관이고 다른 하나는 식당일 것이다.
맨 끝에 있는 가장 작은 규모의 건물은 의무실이 분명했다.
끼익!
차가 멈추고 이슬람복장을 한 권총수가 차에서 내렸다.
카이로에서 이틀을 달려 이곳 시나이까지 온 것이다.
권총수는 막사 1층 문을 열고 들어섰다.
모두가 작전을 나간 듯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멈칫!
생활관 내부를 살피던 권총수의 눈이 커졌다.
현역 군인들이 아니라 용병부대 생활관이다.
오랜 용병생활을 했기 때문에 생활관의 정리정돈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용병들 생활관은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정리 정돈을 강조하지만 대충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생활관은 신병훈련소가 따로 없었다.
완벽한 각은 잡히지 않았으나 긴장감이 느껴질 만큼 정돈이 잘되어 있었다.
씨익!
권총수는 문을 열고 나오며 웃음을 지었다.
보지 않아도 그림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오민철은 의외로 깔끔하다.
지저분하거나 흐트러진 걸 보지 못하는 약간의 결벽증이 있다.
‘살벌했겠군’
용병사회에도 계급이 있다.
즉 직책인데 대부분이 특수부대 출신들이고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탓에 웬만해서는 통제가 되지 않는다.
결국 서열은 주먹으로 정해진다.
알게 모르게 적수공권을 이용한 수많은 싸움이 벌어지면서 차츰 자리를 잡는 것이다.
용병은 오로지 힘 앞에서만 굴복한다.
정리정돈 상태를 보아 오자마자 오민철이 치열한 싸움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층도 한 바퀴 둘러보고 난 권총수는 식당으로 향했다.
세 명의 사내가 한가하게 체스를 두고 있었다.
취사병들인데 이들은 애초 계약할 때 취사를 목적으로 서류에 사인을 한다.
물론 전장의 용병들보다는 몸값이 싸지만 웬만한 민간 직장보다 높은 보수를 받는다.
“설마 총수?”
체스판을 내려다보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어, 첼스키?”
“맞아. 민철이가 유럽 촌놈이라고 부르던 첼스키!”
사내는 단번에 달려와 권총수를 끌어안았다.
“이런.”
권총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첼스키는 슬로베니아 출신이다.
동구권 사내들이 외인부대를 지원하는 건 가난을 벗어 던지기 위한 몸부림이었는데 첼스키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난 돈 벌거야. 벌어서 포도 농장을 할 계획이야'
퇴소를 일주일 앞두고 첼스키는 자신의 꿈을 분명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