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0화: 도시 자객(2)
권총수는 타고 온 랭글러 지프에 낚시대를 실었다.
쾅!
트렁크를 닫고 운전석 쪽으로 걸어가는데 계곡 쪽에서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권총수는 고개를 들어 계곡 쪽을 바라보았다.
하류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던 아내 엘라가 떠내려온 남편의 시신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계곡은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권총수가 타고 온 랭글러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떠나고 있었다.
결혼 30주년이다.
아내에게 어떤 선물을 해줄 것인지 고민하다보니 어느새 퇴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몇 가지를 생각해 놓긴 했으나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꽃은 너무 흔하다.
또한 꽃은 선물을 빛나게 해주는 부수적인 것이어야 한다.
“국장님 퇴근 안하십니까?”
부하직원 한 명이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먼저가게.”
“내일 뵙죠.”
부하직원은 문을 닫고 사라졌다.
아담스는 습관적으로 손목시계를 보았다.
지금쯤 상당한 기대를 하며 자신이 퇴근해 오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담스는 뭔가 결정을 내린 듯 옷걸이에 걸려 있는 상의를 들고 사무실을 걸어 나갔다.
백화점은 사람들로 붐볐다.
아담스는 명품 백 코너에서 20분째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나름대로 결혼 기념일 때마다 의미 있는 선물을 해주었지만 30주년인 오늘 만큼은 평소 갖고 싶어하던 검정색 샤롤 보이백 금장을 사주겠다고 마음 먹었다.
물론 오래전부터 가격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는데 백화점 마다 차이가 있긴 했지만 크지는 않았다.
“이것 포장해 주시오.”
수행하듯 옆에서 설명을 하던 여직원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매우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고객님, 보이백 금장은 사모님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할 것입니다.”
여직원은 능숙한 솜씨로 택을 제거하고 포장하기 시작했다.
백을 받고 기뻐할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떠오른다.
지이잉!
주머니속에 있는 핸드폰이 울린다.
아담스는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보더니 한쪽으로 걸어가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인가?”
“골드 셀리가 죽었습니다.”
“뭐?”
“셀리가 죽었습니다. 미첼산 계곡에서 낚시를 하던중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충격을 받은 듯 아담스는 주위를 둘러본 뒤 화장실 표시를 따라 걸어갔다.
“보디가드는?”
“그도 죽었습니다.”
“도대체?”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말이 안 되는 얘기다.
후우!
크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스린 아담스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사람이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 아담스는 문을 두드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촤아아!
수도꼭지 물을 세게 틀어놓고 아담스는 통화를 이어갔다.
“범인이 누군가?”
“그게 글쎄.”
“벌건 대낮에 낚시하는 블랙요원과 보호자를 제거할 역량을 지닌 자들이 있나?”
상대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블랙요원은 허수아비들이 아니다.
그를 지키는 보호자 역시 능숙한 솜씨를 갖고 있다.
“사막의 흑새가 들어온 건가?”
“아직 증거는 없지만 그렇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권총수가 입국했다는 보고는 아직 받지 못했고 단지 카이로에서 종적을 감췄다는 것까지만 알고 있다
“어떻게 골드 셀리가 자신을 청소한 인물이라는 걸 알았단 말인가?”
청소부는 명령을 지시한 상관을 포함한 라인에 있는 사람이 아니면 모른다.
라인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맥보란이었다.
그러나 맥보란은 아니다.
그는 조직의 비밀과 자신의 신변을 지키기 위해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던 부하직원이다.
정보요원으로서 끊고 맺는 면에서 조금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으나 누군가에게 블랙요원의 정체를 밝힐 만큼 어리석지도 않다.
“하필 오늘이 결혼기념일일세. 내일 아침 비행기로 갈 테니까 자네가 현장 정리 좀 해주게.”
“염려 마십시오.”
전화가 끊기고 아담스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수돗물은 세차게 쏟아졌고 아담스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더니 두 손을 씻었다.
수돗물을 잠근 뒤 휴지를 뽑아 손을 닦은 아담스는 천천히 화장실을 걸어 나왔다.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은 절대 돌려놓을 수가 없다.
대여섯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정보시장에서 잔뼈가 굵었지만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반성한다거나 후회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으로 마음이 흔들린다.
결코 나이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건 아니다.
괜한 벌집을 건드리지 않았는지 자꾸 그날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의 행동은 정당했다.
같은 조직원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비밀이 새어 나갈 위험이 크고 지금까지의 실예도 그렇다.
러시아 연방 보안국 FSB의 전신인 KGB나 일반인들이 전설처럼 여기는 모사드, 영국의 MI6 모두 외부인에 의해 완성된 사건이 아직까지 조용히 잘 묻히고 있는 이유는 일이 끝나면 반드시 청소를 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상대를 죽여 입을 막지 않으면 결국 나중에 엄청난 문제가 되어 터지고 만다.
어느 나라 정보국이든 이번 사건 같은 경우 필히 청소를 했을 것이다. 나중 유언으로라도 내가 CIA청부를 받아 이란의 정신적 지도자인 하메네이를 죽였다고 남겨 버린다면 끝장이다.
그 후폭풍은 상상을 초월한다.
전 세계의 이슬람이 들고 일어서고 중동에서 전쟁이 붙으면 미국과 중국 러시아등으로 확전은 불가피하다.
종교적 문제로 충돌한 전쟁이 한두 번이던가.
정치적인 전쟁과 달리 종교적 전쟁은 휴전이 되지 않는다.
어느 한쪽이 완전히 백기 투항을 해야지만 끝나는 무서운 전쟁인 것이다.
끼이익!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아담스는 룸미러를 바라보며 양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결혼 30주년이다.
불편한 표정은 싹 지우고 아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가 감도는 표정을 만들기 위해 룸미러를 보며 여러 차례 연습을 한 뒤 포장된 백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자신이 사는 아파트는 10층이다.
모두 21층 아파트이니 딱 중간층에서 사는 꼴이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지하 2층에 있어 재빨리 눌렀다.
주차장은 지하1층과 2층으로 되어 있다.
쨍!
지하1층에 멈추고 문이 열렸는데 안에 검정색 안경을 낀 자그마한 체격의 사내가 서류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아마 퇴근을 하는 모양이었다.
아담스는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같은 아파트 주민이라는 사실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상대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담스는 사내가 몇 층에 사는지 슬쩍 버튼을 보았는데 21층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21층은 맨 꼭대기다.
두 사람은 우두커니 서 있었고 엘리베이터는 10층에 도착했다.
“엇!”
그런데 문이 열릴 줄 알았던 아담스는 깜짝 놀랐다.
버튼을 보았는데 10층에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분명 자신은 10층을 눌렀다.
아담스는 10층은 지났지만 조금이라도 가까운 층에 내리겠다는 듯 재빨리 12층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어느 버튼도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퍼퍼퍽!
정신없이 눌러도 엘리베이터는 멈출 기색이 없이 순식간에 21층에 도달하고 말았다.
째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내가 먼저 내리더니 돌아섰다.
“안 내리십니까?”
아담스는 내가 왜 여기서 내리냐는 듯 바라보더니 내려가기 위해 10층을 눌렀다.
“내 발로는 내리지 못하겠다?”
화악!
눈 깜짝할 사이에 사내는 아담스의 멱살을 잡아 엘리베이터 밖으로 끌어냈다.
“당신 누구야?”
사내는 넥타이를 잡고 질질 끌면서 옥상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갔다.
80킬로가 넘는 몸무게인데도 사내는 전혀 힘들어하지 않았다.
지이잉!
옥상으로 통하는 문은 관리실에서 잠가 놓는다.
그런데 사내는 손바닥을 댔고 잠시 후 붉게 달아오른 문이 녹아내리면서 덜컹하고 열리고 말았다.
촤아악!
강한 바람이 밀려들었고 사내는 아담스를 옥상으로 끌어내더니 문을 닫았다.
질질질!
아무리 발버둥 쳐도 도무지 버틸 수가 없다.
휴대하고 다니던 권총도 차 안에 있다.
아내가 하도 무서워 하여 절대 집으로는 가지고 들어가지 않는다.
툭!
사내가 멈춘 곳은 아파트 난간이었다.
철재를 이용한 난간이 아니다.
아파트를 지을 때 1미터 가까이 되는 높이로 벽돌을 쌓은 것이 전부였는데 칠이 벗겨지고 여기저기 금이 가 있었다.
쉬이이잉!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아담스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끌고 온 사내가 말없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한동안 말없이 담배만 피우던 사내가 천천히 다가와 앉아 있는 아담스 앞에 쭈그리고 앉는다.
우두두둑!
“헛!”
뒤틀리는 얼굴을 보며 기겁했다.
생김새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사내는 끼고 있던 뿔테 안경을 벗었는데 아담스는 신음을 흘렸다.
“사...사막의 흑새!”
“감사합니다. 내 얼굴을 보고 누구냐고 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뻔히 눈뜨고 있는데도 모른다고 시치미를 뗀다면 그 또한 피곤할 일임은 사실이다.
당신을 모른다는 사람을 죽이는 것과 알고 있다는 상대를 제거하는 건 천지차이이다.
전자의 경우 죽여도 그다지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정확한 빚을 받아냈는데도 이른바 찜찜한 것인데 카리미에 이어 아담스까지 자신을 알아보았으므로 권총수는 만족스런 얼굴을 했다.
스윽!
권총수는 쇼핑백을 들어 보았다.
샤롤이라는 영문글씨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다.
“이혼이 판치는 세상에 30년을 금슬좋게 살아오는 것이 쉽지는 않죠.”
30주년을 축하한다는 말이었다.
“자네.”
“말씀하세요.”
권총수는 부드러운 시선을 던졌다.
아담스는 나직하게 말했다.
“날 죽이고 온전할 수 있는 것 같나? 감히 CIA 작전7국장을 죽이고 장수하리라는 생각은 접는 것이 좋을 걸세.”
권총수는 담담하게 웃었다.
“그 말 밖에 할 얘기가 없습니까?”
“CIA는 한 국가를 뒤집을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네. 협상하지. 날 살려주면 모든 걸 없었던 일로 해주겠네.”
권총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한 번 더 기회를 드리죠. 내게 할 말 없습니까?”
“골드 셀리까지는 덮겠네.”
자신만 살려달라는 얘기였다.
그렇게 하면 모든걸 자신이 알아 깨끗하게 정리하겠다는 제안인 것이다.
“CIA에 총구를 겨눈다는 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권총수는 아담스를 까마득한 옥상 아래로 밀어 버렸다.
넘어가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권총수의 힘을 당할 수는 없었다.
으아악!
아담스의 비명이 바람에 실려 날아갔고 거센 바람에 권총수의 옷자락이 펄럭 거렸다.
권총수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파파팡!
옷자락을 찢을 것처럼 세찬 바람에 권총수는 나직이 중얼 거렸다.
'날씨 좋군'
몸을 돌려 옥상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토스트기에서 빵이 툭 튀어 올라왔다.
잘 익은 빵에 양상추와 햄과 토마토 따위를 넣고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우걱!
유리잔 가득 따라 놓은 우유를 마시며 아침에 배달되어온 신문을 보는데 갑자기 핸드폰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맥보란은 들고 있던 토스트를 접시 위에 놓고 휴지에 손을 닦은 뒤 안방으로 들어갔다.
안방 침대 베개 옆에 놓아둔 핸드폰이 몸을 떨었는데 빨간 불이 깜박거렸다.
불이 깜박거리면 랭글리 본부에서 걸려온 전화다
이른 아침에 랭글리 본부에서 무슨 전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