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6화: 또 한 번의 도박(2)
던힐이다.
부요카가 담배 한 개비를 뽑아 물자 상체를 숙여 불까지 붙여주고 자신도 피워 물었다.
“이 얘기는 절대 사무실 밖으로 흘러 나가서는 안 되는 일일세.”
멈칫!
담배를 빨던 부요카가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보았다.
“나중에 운이 좋아 살아서 은퇴를 하고 회고록 같은 걸 쓴다해도 기록해서 좋을 것이 전혀 없는 얘기라는 것이지.”
갑자기 담배 맛이 떨어진다.
부요카는 입에 물린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내렸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게. 있는 그대로를 설명하여 자네의 판단을 받아 보고자 하네.”
호지슨은 기침을 한 뒤 권총수가 자신에게 건넨 제안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집트 석유 채굴권을 놓고 중국 국영회사 시베이유전과 영국 BP의 치열한 개발권 경쟁에 대한 전망을 내 놓았다.
그리고 개발권이 지금 상황으로는 중국 쪽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며 염려했다.
유난히 BP가 밀리고 있다는 대목을 강조했다.
그건 부요카의 생각이 어느 한쪽으로 더 향하도록 몰아가려는 나름대로의 의도였다.
눈치 빠른 부요카가 직속상관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다.
호지슨은 자신에게 지금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혼자서 결정하려니 너무 벅차고 자신이 조금의 긍정적인 태도만 취해줘도 용기를 얻고 밀어붙이겠다는 것이다.
부담은 권총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호지슨이 자신의 제의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가능성이 있다면 현재 호지슨이 처한 입장이었다.
시나이 앞바다에서 발견된 유전 개발권을 놓고 중국을 대표하는 국영회사 시베이유전과 영국의 BP가 이집트 정부를 상태로 치열한 로비전을 펼치고 있다.
중국에서는 시진핑 국가주석이 며칠전 직접 이집트를 국빈방문하기까지 했다.
물론 양국 정상간에 있는 통상적인 방문이라고 하지만 시기적으로 하필 지금이냐는 것이었다.
권총수가 볼 때 6대4 정도로 BP가 밀린다.
워낙 매장량이 엄청난 유전이기 때문에 향후 어느 회사건 채굴권을 차지하면 최소한 50년은 막대한 수익을 창출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었다.
흘러가는 상황은 호지슨에게 불리하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의 비상식적인 제안을 받아들일 건지는 장담 할 수 없었다.
지이이!
핸드폰이 울렸다.
재빨리 액정을 보았는데 오민철이다.
“잘 도착했어?”
권총수가 물었다.
“장난 아닌데?”
“안 좋아?”
“단일 대오가 아냐.”
단일 대오가 아니라는 건 싸워야 할 적이 하나가 아니라 이념과 종파에 따라 여러 집단으로 나눠져 있다는 것이다.
적이 한 명이면 그 한 명을 놓고 공격하면 되지만 여러 곳에 흩어져 다양한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면 골치 아프다.
한쪽만 경계해서는 안 되며 사방으로 시선을 돌려야 하기 때문에 애로사항이 많다.
“상황이 그러면 그런대로 싸워야 돼. 좀 더 편해보자고 무리한 전략을 세웠다가는 크게 맞을 수 있어. 무슨 말인지 알지?”
“그렇긴 한데.”
오민철의 대답이 시큰둥했는데 그건 생각보다 현지 상황이 나쁘다는 뜻이다.
권총수는 사태가 예상보다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형 이렇게 하는 게 어때?”
“말해봐.”
“지금은 특정 집단을 표적으로 놓고 싸우기 보다는 그들끼리 충돌시키는 방법을 연구해봐.”
“공작을 하라는 거야?”
“할 수 있으면 해야지. 그런 것 있잖아 강호무사들이 자주 사용하는 금선탈각지계(金蟬脫殼之計)같은 것 말이야.”
갑자기 오민철이 조용해졌다.
당황한 모양이다.
“형, 내 말 듣고 있어?”
“금 뭐라고?”
“스승님한테 배운 거야. 뭐라더라 음모를 꾸며서 남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버리는 전술 같은 것이지.”
“오오오! 콜!”
오민철이 놀란다.
“정말 괜찮은 방법이다. B라는 놈을 우리가 죽여 놓고 C 라는 놈이 죽인 것으로 하라는 것 아냐.”
“바로 그거야. 형 대단하다. 한 방에 뚫어 보는구나. 그렇게 하면 B와 C는 박 터지게 싸우는 거지.”
“누가 이기든 지쳐 있을 때 우리가 그냥 쓸어버린다. 정말 군대전술이 이토록 아름답게 여겨지기는 처음이다. 아참 어떻게 됐어. 그쪽에서 입질 있어?”
“미끼는 던졌는데 물기가 아주 부담스러운가봐.”
“그렇겠지. 그 바닥 의리상 적국도 아닌 동맹국의 정보원에 대한 정보를 누설한다는 건 야비한 짓이지. 아무튼 조심해.”
“첫째도 집으로, 둘째도 집으로라는 것 잊지마. 여기 일 끝나면 나도 내려갈 테니까.”
권총수는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 때 오른쪽 바지주머니가 투덜거렸다. 진동이 온 것이다.
핸드폰을 꺼낸 권총수의 눈이 커졌다.
“예!”
상대는 호지슨이었다.
“그러죠!”
통화는 간단히 끝났다.
권총수는 웃었다.
만나서 좀 더 많은 얘기를 나눠보자는 것이었는데 권총수는 승부의 패(覇)가 자신에게 왔음을 확신했다.
불가능하다면 만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우방이고 미국이라고 해도 당장 눈앞에 닥친 석유채굴권이 중요할 것이다.
단순 노무자들은 이집트 현지인을 쓴다지만 엔지니어들은 모두 BP직원들로 채워진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BP가 채굴권을 따낼 경우 정유공장을 짓고 여러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들어가는 돈만 백억달러가 넘을 것으로 추정했다.
거기에 채굴권으로 BP가 확보한 지분까지 포함한다면 영국 경제에 근래에 없는 절대 호황이 닥칠 것이라고 했다.
‘판이 클수록 위험도 크다는 건 상식이지’
권총수는 씨익 웃음 지었다.
쓰레기 마을의 밤은 시끄러웠다.
카이로의 모든 쓰레기들이 몰려들어 이곳에서 분리되어 재생과 폐기를 거친다.
밤이 늦었지만 마을은 잠들지 않았다.
아이들은 쓰레기들이 굴러다니는 골목에서 떼를 지어 공놀이를 했고, 남자들은 쌓인 쓰레기 더미를 헤치며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찾고 있었다.
호지슨은 희미한 가로등 아래서 공을 차는 아이들을 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흘깃!
왼쪽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보았는데 정확히 밤 8시였다.
약속 시간인 것이다.
흠칫!
고개를 돌린 호지슨은 깜짝 놀랐다.
손목시계를 보기 전까지는 분명 없었다.
그런데 시계를 보았던 약 2초 사이에 권총수가 다가와 서 있다.
“쓰레기 마을이어서 그런지 쥐가 많군요.”
호지슨의 표정이 굳어졌다.
권총수가 말하는 쥐는 구멍을 파고 땅속에서 사는 그런 쥐가 아니다.
만약을 대비해 근처에서 잠복하고 있는 MI6요원들이 많다는 걸 의미하고 있었다.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호지슨의 말에 권총수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호지슨의 말은 이어졌다.
“우리도 부탁이 있습니다.”
“거래란 주고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슥!
호지슨은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작은 종지 쪽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
이어 호지슨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골목 저편으로 걸어 사라졌다.
권총수는 호지슨이 주고 간 쪽지를 펼쳤다.
Supwipyeong(섭위평)
Boggi(복기)
Gwigoksa(귀곡사)
Paeyulma(패율마)
그리고 맨 밑에 굵직한 글씨 하나가 쓰여 있었다.
‘death(죽여라)’
권총수는 종이를 말아 쥐었다.
푸스스!
잠시 후 손바닥에서 연기가 나며 종이는 재로 변해 사라졌다.
권총수는 골목을 나와 멀찍이 주차 해놓은 자신의 차로 걸어갔다.
운전석 와이퍼에 주차위반 딱지로 보이는 종이 한 장이 끼어 있었다.
권총수는 이마를 찡그리며 종이를 뽑아 살폈는데 눈이 커졌다.
‘골드 셀(gold cell)’
거기에는 골드 셀이란 코드네임과 함께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한참동안 종이의 내용을 읽은 권총수는 이번에도 삼매진화로 종이를 태워 재로 만들어 버렸다.
‘황금세포(gold cell)’
코드네임 부여는 맘대로 하지 않고 정보국 고위층에서 결정한다.
또한 코드네임을 보면 당사자가 어떤 임무를 주로 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데 황금세포라는 걸 보면 블랙요원치고는 거의 최고라고 봐야 할 것 같았다.
아무 블랙요원에게나 황금(gold)이라는 호칭을 붙여주지 않는다.
권총수는 쉬지 않고 골드 셀이라는 말을 중얼 거렸다.
닷새가 지났다.
권총수는 기다렸다.
골드 셀의 정체를 몰라서 이렇게 늦은 것이 아니라 워낙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카이로 공기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서둘면 안 된다.
MI6과 CIA의 움직임을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아저씨 신문 하나 봐주세요.”
길을 걸어가는데 열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신문 한 부를 내밀었다.
카이로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런데 소년이 웃는다.
신문을 볼 생각도 없었고 수시로 인터넷을 검색하며 모든 것을 살핀다.
“얼마니?”
자신을 보고 웃을 수 있는 아랍소년은 단 한 명도 없다.
즉, 느껴지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산 것이다.
신문을 사든 권총수는 천천히 기사를 훑었는데 내용 보다는 주로 광고 지면 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파팟!
신문을 넘기던 권총수의 동작이 7면에서 멈췄다.
하단 광고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사람을 찾습니다. 이름 알리 카리미, 나이 36세, 주소 뉴저지주 뉴어크 398번지’
권총수는 걸어가다 다른 소년에게서 같은 신문 한 부를 샀고 똑같이 7면을 펼쳤다.
하지만 지금 구입한 신문에는 광고가 없었다.
맞다.
누군가 따로 이 광고만 실린 신문을 소년에게 부탁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보나마나 MI6일 가능성이 높다.
단순히 신문 한 부 사라고 하면 외면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권총수를 바라보며 웃으라는 지시까지 내렸을 것이다.
물론 적지 않은 돈이 쥐어 졌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아랍어 이름이라는 건 골드 셀이란 자가 이란계 미국인이라는 뜻이다’
이란을 포함한 중동에서 활동하는 블랙요원이라면 금발에 백인일 가능성은 적다.
블랙 요원들 대부분은 현지인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테헤란에서 방아쇠를 당겼다고 반드시 그곳에 살고 있으라는 법 또한 없는 것이다.
광고는 미국의 집 주소를 말하고 있다.
전화가 울렸다.
액정에 찍힌 번호가 공중전화였다.
“여보세요.”
“우리쪽 정보에 따르면 골드 셀이 휴가 중이라는 걸 알았소.”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목소리가 호지슨은 아니었다.
변성을 한다고 해도 결코 권총수의 귀를 피하지는 못한다.
‘휴가 중이라면 이란계 미국인이 맞다는 뜻이군’
권총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오른다.
‘아주 영원히 쉬도록 해주지’
권총수는 신문 두 부를 꼭 쥔 채 걸음을 서둘렀다.
작전명 ‘붉은 소나기’가 시작되었다.
카이로를 중심으로 하는 중동 전역에 걸쳐 대대적인 수색 정찰이 시작되었다.
사흘 전 CIA 감시망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붉은 소나기, 즉 권총수만 행적이 사라진 것이다.
일행인 오민철과 나카야마 비렌드라는 지금 시나이 지역에서 작전 중이다.
“으음!”
맥보란은 대사관에 있었다.
퇴원을 했으나 몸은 완벽하지 않았다.
워낙 중요한 시기였기에 출근을 감행 한 것이다.
딸칵!
창문을 열어젖히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어디로 갔을까’
위성을 통해서도 쫓고 있지만 전혀 어느 신호나 징후도 포착되지 않고 있었다.
주머니 속의 핸드폰 추적도 되지 않고 있다.
그건 핸드폰을 버렸거나 완전히 기능을 파쇄했다는 뜻이다.
또한 핸드폰을 없앴다는 건 위성으로도 자신을 추적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조치가 분명했다.
위성을 피하고자 한다는 건 뭔가 중요한 일을 진행 중이라고 봐야 한다.
맥보란은 핸드폰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