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4화: 삶의 공식(2)
가레스는 다시 의자에 앉았고 맥보란은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천만 다행 입니다.”
맥보란은 듣기만 했다.
상대는 권총수였다.
결코 가까이 할 수 없는 적대적인 관계지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말을 하려니 꿀 먹은 벙어리다.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걸 권총수는 어떻게 알았을까.
더욱 당황스러운 건 자신에게 위로를 전하고 있으며 목소리에서 진심이 묻어난다는 것이다.
그때 투툭 하는 핸드폰 진동이 있었고 액정을 보았다.
다른 전화가 걸려온 듯 사람 이름 하나가 찍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냥 무시하고 계속 통화를 하려다 무심결에 본 찍힌 이름이 낯익다.
‘OH’
오민철이다.
지금 권총수와 같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오민철이 자신에게 전화를 할 일은 없다.
권총수 문제로 서로가 거북했지만 살아 돌아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서먹함은 풀렸다.
순간적으로 오민철의 전화를 받아 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난다.
“잠깐 내가 다시 전화 하겠소. 미국에서 가족 전화가 와서.”
“그러시죠.”
권총수가 전화를 끊었고 맥보란은 오민철과 통화를 시도했다.
“반갑습니다.”
“운이 좋군요. 어떻게 글록을 머리에 박았는데도 살아난단 말입니까?”
오민철 특유의 은근 슬쩍 빈정거린다.
“당신은 평생 총수에게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이오. 나 같았으면 절대 도와주지 않았을 것이오.”
“무슨 얘깁니까? 캡틴이 날 도왔다뇨?”
“하긴 저승 문턱에 있었으니 알 리가 없지. 당신이 지금 숨 쉬고 있는 건 모두가 총수 덕이오. 강호무사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내공을 당신을 살리기 위해 상당부분 소진시켰단 말입니다. 아셨소? 당신들은 등에 비수를 꽂았지만 우리 총수는 달랐단 말이오. 이런데도 테헤란에서 방아쇠를 당긴 놈과 지시한 놈을 숨기겠소?”
“캡틴이 날?”
“맥보란이란 사람이 정보기관원 치고는 인간적이라나, 우리 눈에는 똑같이 더러운 놈으로 보이는데 , 암튼 지켜보겠소.”
권총수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는지 계속 모르쇠로 일관 하는지 보겠다는 말을 남기며 끊었다.
맥보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너무 충격적인 얘기였다.
“서기관님!”
가레스가 다가왔다.
전화기를 쥔 맥보란의 오른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툭!
급기야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으음!”
맥보란은 신음을 흘리며 침대로 벌렁 쓰러져 버렸다.
“서기관님, 서기관님!”
맥보란을 흔들었으나 의식이 없다.
“여보세요. 담당 의사를 좀 불러주시오. 어서!”
가레스는 벽에 걸린 인터폰을 통해 외쳐 말했다.
가레스는 재빨리 다가와 심장을 살폈는데 심정지는 아니었다.
“서기관님! 정신 차리십시오!”
벌컹!
그때 문이 열리고 의료진들이 뛰어 들어왔다.
경천동지할 사건이다.
자신들은 죽이려 했는데 그는 자신을 살렸다.
‘검(劍)에는 사검(死劍)과 활검(活劍)이 있소. 똑 같은 검이지만 어떤 이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휘두르지만 검을 휘둘러 사람을 살리는 사람도 있죠.’
언제가 권총수가 했던 말이었다.
강호무사가 아닌 만큼 의미있게 전달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커다란 외침이 되어 자신을 흔들었다.
검이란 살상의 병기이지만 어떻게 휘두르느냐에 따라 인간의 생명을 끊을 수도, 살릴 수도 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흥분과 감동, 또 한편으로는 어느 책에서도 읽지도 보지도 못한 깨우침이었다.
같은 칼을 잡아도 의사는 사람을 살리고 깡패는 사람을 헤친다.
“가레스!”
의자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가레스가 다가왔다.
“나 좀 부축해 주게.”
맥보란은 가레스의 도움으로 침대를 내려와 휠체어에 앉았다.
“바깥으로 좀 나가지.”
“괜찮을까요?”
“가자구!”
맥보란은 마른 웃음을 지었다.
자살을 시도한 사람이 침대에 가만 누워 있으라는 의사 말 따위를 뭘 신경쓰느냐는 뜻이다.
가레스는 휠체어를 밀고 복도로 나갔다.
병원 뒤뜰로 나온 맥보란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가레스는 조금 떨어져 침울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맥보란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선배이자 상사이다.
아래 부하들은 존경하고 윗사람들로부터는 신뢰를 받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이른바 대화가 통하는 상사인 것이다.
그런 상사를 자살로 몰아간 사막의 흑새에 대한 원망과 증오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타올랐다.
자세한 속 사정은 잘 모르지만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맥보란의 얼굴에는 자신을 자살로 몰아간 권총수에 대한 미움이나 증오와 같은 감정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날 살린 사람이 누군지 아나?”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리 현대 의학이 발달했다고 해도 난 살아 날 수 없는 치명상을 입었지. 그런데 이렇게 거뜬하게 휠체어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네. 자네 주치의 얘기 듣지 않았나?”
“들었습니다.”
“뭐라고 하던가?”
“이상하다고 한 기억이 납니다. 하루 밤 사이에 99.99프로 시신이 된 사람이 어떻게 아침에 눈을 뜰 수 있느냐고 했었죠.”
“날 눈뜨게 한 건 내가 믿는 하느님도 아니고 의사도 아니야. 날 살린 사람은 사막의 흑새라네.”
“네에에?”
가레스가 기겁하며 놀라자 맥보란은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마치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갑작스런 권총수의 방문에 영국 제일의 민간보안업체 킬로 알파 서비스(Kilo Alpha Services:KAS) 카이로 지사장 월터는 당황했다.
“사...사막의 흑새.”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색이 굳어졌다.
맞은편 책상에서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던 백인 사내의 손이 슬그머니 내려간다.
키보드 바로 아래는 책상서랍이고 그곳에는 실탄이 장전된 권총이 있다.
사막의 흑새와 차 한 잔 해본 적이 없지만 단 한 가지는 알고 있는데 숨 쉬는 것까지도 전설이라는 것이다.
“자네 그러다 죽어.”
권총수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서랍을 열려는 사내를 향해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미스터?”
권총수가 이름이 뭐냐고 묻는다.
“뷰캐넌.”
사내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커피 한 잔 부탁해도 되겠나?”
“드리죠!”
뷰캐넌이란 사내가 일어나 사무실 안쪽 주방으로 걸어갔다.
칸막이가 되어 있어 주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도자기 부딪히는 소리, 코드를 꼽는 소리, 수돗물 쏟아지는 소리 따위가 들렸다.
“정말 오랜만이군.”
월터는 남아공에 근무를 했었다.
권총수와 처음 만난 건 외인부대 전역을 마쳤을 때였다.
당시는 KAS 영업이사 신분이었는데 여러모로 편의를 봐줬고 추후 계약을 위해 런던을 찾았을 때도 세심히 배려하고 따뜻하게 맞아준 인물이다.
이후 회사와 현장 용병들 사이에서 융통성 있는 가교 역할을 하면서 권총수와 격의 없이 지낸 뒤 남아공 현지 발령을 받고 헤어진 뒤 오늘 처음 만난 것이다.
“고맙네!”
뷰케넌이 흰색의 머그컵에 커피를 가득 담아 가져왔다.
권총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의자에 앉아 있는 뷰캐넌을 향해 오른손 엄지를 추켜세웠다.
뷰캐넌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쑥 찾아왔든 미리 전화를 하고 왔든 KAS에서 나의 방문을 환영할리는 없고, 본론만 얘기하죠.”
용병이지만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권총수였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하여 권총수와 절친하게 소통하는 국가가 한두 나라가 아니다.
“MI6 제5부장을 만날 수 있게 해줄 수 있소?”
월터는 깜짝 놀랐다.
MI6(영국대외정보부)제5부는 정보분석팀이다.
전 세계에 나가 있는 화이트 요원들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분석하고 해석한다.
꼭 정보요원이 아니어도 모두가 국가를 위해 움직이는데 대표적인 집단이 해외공관원, 즉 외교관들이다.
자신들의 면책특권을 이용해 상당히 고급스러운 정보를 얻어 낼 때가 많다.
제5부장이라면 정보분석팀 우두머리이고 MI6에서 서열 다섯 번째 안에 드는 거물이다.
물론 권총수가 월터를 찾아와 이런 엄청난 부탁을 하는 건 스톤스 회장과 MI6 제 5부장이 대학 동창이기 때문이었다.
월터를 찾아 온 건 스톤스에게 당장 내 말을 전해 달라는 의미였다.
쭈욱!
권총수는 남은 커피를 맥주처럼 단 번에 마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권총수는 월터와 악수하고 나서 뷰캐넌에게 다가갔다.
“커피 맛이 일품이었네.”
척!
두 사람은 힘차게 악수를 했다.
전혀 생각 못한 일이다.
월터의 전화를 받고 난 스톤스 회장은 상당시간 동안 멍한 기분이었다.
그야말로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사막의 흑새다.
이제는 더 이상 얼굴볼일이 없는 완전한 적이 되었고 철저히 반대편에 설 수 밖에 없었다.
“비엘사 말이 생각나는군.”
맞은편에 절친이자 관리이사인 리네커가 앉아 있었다.
비엘사는 스톤스의 친구이며 영국 보수당 국회의원이다.
“어제까지 의사당에서 삿대질 하며 싸우던 의원들이 다음 날 언제 그랬냐는 듯 같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서 내가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물어 본적이 있네.”
“뭐라던가?”
“정치판에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 적을 만들수록 손해고 친구로 사귈수록 불편하다.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게, 그래서 언제든지 필요하면 다가갈 수 있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거야.”
“명언이군. 어찌 보면 사람 사는 세상도 그래야 하는 거야. 친구와 적은 백지 한 장 차이니까. 그런데 사막의 흑새가 대외정보부 제 5부장을 만나려 하는 이유가 뭘까?”
“그러게 말이야.”
스톤스는 아까부터 계속 그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풀릴 기미가 없었다.
대외정보부(MI6) 제5부장 호지슨은 자신과 군 생활도 같이 했었고 대학 동창이기도 하다.
가까운 지인이지만 서로가 기피한다.
이쪽은 민간보안업체 사장이어서 어떻게 해서라도 대외정보부가 쥐고 있는 정보를 얻고 싶고, 그쪽 또한 KAS를 이용해 여러 작전을 벌일 수 있다.
즉 두 사람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이 그런 것이다.
사실 정보국 일이라는 것이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우가 허다한데 절친이 용병사업을 하고 있다는 건 호지슨에게 큰 기회일 수도 있는 것이다.
CIA 간부들이 은퇴하고서 가끔 청문회에 서는 건 현역때 불법적인 작전을 벌인 것 때문이다.
법을 지키며 정보를 취득하고 공작을 자행한다는 건 굉장히 어렵다.
자꾸 불법의 유혹을 받는다.
다행히 아직까지 둘은 적당한 거리를 잘 유지하고는 있지만 기자들의 눈은 호시탐탐이다.
둘이 만나는 장면이 어느 기자의 눈에라도 띄면 당장 ‘죽음의 사냥꾼 스톤스와 정보관계자의 부적절한 만남’이라는 기사가 뜰 건 뻔했다.
“흐음!”
스톤스는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 * *
권총수 일행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나카야마가 오랜만에 일본식 아끼소바 빵을 만들었다.
외인부대시절에도 가끔 솜씨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나카야마의 요리는 매우 뛰어났다.
“앞으로 어쩔 계획이야?”
휴지로 입을 스윽 닦으며 식사를 마친 오민철이 물었다.
권총수는 빵을 입안 가득히 넣고 씹고 있었는데 오민철의 눈이 좁혀졌다.
“총수 네가 살려줬다는 걸 맥보란이 알게 된다면 은혜를 갚는 차원에서 뭔가 비밀을 말해주지 않을까?”
뚝!
빵을 씹던 권총수가 오민철을 바라보았다.
권총수의 시선이 사나워지자 오민철이 손을 흔들었다.
“아니, 만약에 알게 된다면 말이야. 그 사람도 인간인데 구명지은이라는 걸 알 것 아냐?”
“형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이 뭔지 알아. 걸인한데 천 원짜리 한 장 던져주고 엄청난 자선이나 행한 것처럼 떠드는 사람이야.”
“알아. 너야말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죽어도 모르게 한다는 걸 말이야. 내 말은 만약에 알게 된다면? 만약?”
자신이 맥보란에게 따로 전화를 하여 권총수가 살려냈다는 걸 귀띔한 건 지금 말했던 것처럼 어떻게 감정의 변화를 이끌어 내어 청소부에 대한 정체를 말해주지 않을까 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