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3화: 삶의 공식(1)
버홀터가 잠깐 시간을 내달라고 하여 나온 것이다.
버홀터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맥보란이 살아났다는데 소식 들었나?”
“우리나라 속담에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도 살 놈은 삽니다.”
어느새 들어온 오민철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긴말 싫어하니 본론만 말하지. 사건 청부 하나가 들어왔는데 자네가 아니면 불가능할 일이야.”
모두의 시선이 버홀터에게 멎었다.
“전쟁을 오래 하다보니 별 이상한 일이 자주 생기더군. 흔히들 전쟁 공황증이라고 하는데.”
버홀터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어 설명하기 시작했다.
던퍼드라는 미해병대원이 있었다.
그는 부사관으로 굉장한 저격수였는데 이라크와 시리아 아프카니스탄 3개국 전투 경험을 갖고 있으며 일백 여 명을 사살하는 공을 세웠다.
그가 받은 훈장만 무려 17개였다.
그런데 반년 전 아프카니스탄에서 작전중 실종되었다.
시신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군은 전사처리를 하지 않았고, 포로가 되었다면 탈레반으로부터 어떤 반응이 있을텐데 그렇지도 않았다.
미군은 특수 수색대를 편성하여 던퍼드 중사 찾기에 나섰다.
세 사람은 진지한 표정으로 버홀터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네. 미군 지휘관들이 살해당하기 시작한 거야.”
“누구에게 말입니까?”
오민철이 조금 퉁명스럽게 물었다.
“모르지.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따앙, 한 방이라는 거야.”
“저격 당했단 말입니까?”
“중령 1명, 대위 2명이 죽었지. 중령은 아침 조깅중 당했고 두 명은 카불 시내에서 당했어. 셋 모두 던퍼드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지. 중령은 얼마전 대대장으로 그를 지휘했고 대위 둘은 하사시절 지휘관이었어.”
“셋 모두 옛 부하에게 암살당했다?”
비렌드라의 눈이 빛난다.
“1차 이라크전 때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지. 당시 해병대 상병이었던 배럿은 놀라운 스나이퍼 재능을 보여줬지. 하지만 자신의 총에 사살된 이라크 병사들이 모두 가난한 농부들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양심의 가책을 느낀거야. 그러던 중 편집광증을 보였고 지휘하던 중대장 소대장과 바로 자기 위 선임 두 명을 죽이고 자살했지.”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일어나는 일들이다.
전쟁은 그토록 인간의 영혼까지 파괴하는 무자비한 게임이다.
외인부대 시절 전쟁의 흉포함을 이기지 못하고 탈영한 사병들을 적지 않게 보았다.
덩치는 커도 의외로 섬세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지닌 자들이 많았고 쉽게 상처를 받는다.
“국방부에서 떨어진 오더입니까?”
“아닐세. 미해병 1사단장이 청부했네.”
권총수가 눈을 크게 떴다.
“지사장님.”
“알지. 자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잘 알아. 국방부 정도에서 해결 청부가 들어오지 않으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위험이 있긴 해. 하지만 던퍼드는 이미 실종으로 처리되었네.”
“사망 처리가 되면 받겠다고 하십시오. 죽지 않은 인물 건드렸다가 무슨 바가지를 쓰려구요. 더욱이 현역 해병대원입니다. 사단장의 마음 압니다. 자신의 지휘 통제 아래 있는 고급 장교들이 연달아 살해된다는 건 나중 진급에도 문제가 있겠죠. 하지만 상부 보고도 없이 단지 정황증거만으로 그를 사살한다는 건 무리수 아닐까요? 실종된 던퍼드 중사가 그들을 죽였다는 증거만 가져오시죠.”
권총수는 단호했다.
아무리 회사에서 내려온 지시라고 해도 수행할 것이 있고 손을 대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탈영을 했던 누군가를 죽였든 미 군내 문제다.
이건 민간 보안업체가 나설 일이 아닌 것이다.
지휘관은 전장에서 부하에 대한 즉결 처형권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물증이 없는데 목숨을 마음대로 빼앗을 수는 없다.
“증거는 있네. 마지막으로 사망한 중대장 칼 대위 시신 근처 나무에 M2010 탄알이 박혀 있었네.”
M2010은 미해병 제식 저격총이다.
“그 사단장이라는 사람도 좀 이상합니다? 정식 지휘계통을 밟아 상부에 보고를 올리면 어떻게 하든 조치가 내려올텐데 이런 무리수를 쓰려하다니.”
오민철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투덜댔다.
반응들이 의외로 강경하자 버홀터가 난감한 표정을 했다.
“숨기지 말고 말씀 하시죠?”
권총수의 눈매가 매섭다.
“계약된 신분이지만 거래에 숨김이 있으면 결코 이뤄질 수 없다는 건 아시잖습니까?”
버홀터가 멋쩍은 표정을 했다.
뭔가 훔쳐먹다 들킨 사람처럼 애써 웃음을 지으려 노력했는데 권총수는 커피 잔을 느리게 들어올렸다.
처음부터 버홀터가 뭔가를 속이고 있다는 걸 알아 차렸다.
전쟁중 아군에게 총구를 돌리는 건 다른 군 형법을 모두 제쳐 놓고라도 무조건 반역죄이며 총살형이다.
전장에서 그런 이탈자가 발생하면 철저히 군법에 의해 추적하고 사살하거나 체포해야 한다.
현역병 일에 민간 용병이 끼어든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전쟁중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사례가 있긴 하다.
탈영처리를 하고 군사경찰의 추적으로 한계를 느낄 때 민간에 이첩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상황이 전혀 아니다.
최소한 미해병대 사령관인 데이비드 버거 대장의 사인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버홀터는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슐츠 사단장은 과거 내가 모셨던 직속 상관이었네. 씰 3팀장(중령)을 지내셨지.”
“도와달라던가요?”
오민철이 물었다.
바홀터는 등을 의자에 붙이며 상체를 곧게 폈다.
“그런 비상식적인 부탁이나 할 사람을 미국방부가 해병 1사단장으로 발령을 냈겠나?”
“순전히 지사장님 판단이다?”
“사실이네.”
권총수는 버홀터 말을 믿기로 했다.
지켜보는 버홀터의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남자들에게 군대시절의 인연은 사회생활에서 만난 관계와는 또 다르다.
사회생활은 각자의 이해에 따라 맺어진다고 할 수도 있지만 군대는 오로지 전우애 말고는 들어설 사심이 없다.
진심을 듣고 나니, 일을 하든 하지 않든 바홀터를 바라보는 세 사람의 시선은 상당히 부드러웠다.
총 한 자루에 목숨을 걸고 생사를 넘나들다 보면 사회에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후끈한 마음이 생긴다.
그건 친구나 우정 따위의 감정이 아니다.
같이 죽음을 넘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애정이었다.
버홀터가 떠나고 세 사람만 남았다.
권총수는 가벼운 웃음을 짓더니 툭 던지듯 말했다.
“난 할거야.”
권총수가 한다는 말에 세 사람이 놀라 돌아본다.
“이건 남의 일이야. 회사차원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벌이는 위험한 사건이라고.”
“전우 좋다는 게 뭐야. 전장에서 그만큼 굴러보고서도 몰라? 아침 밥 먹을 때 까지만 해도 꼴도 보기 싫던 놈이 작전 나가서 총에 맞아봐. 그때도 그놈이 밉게 보였어? 미움은 기억에도 없고 내 전우를 죽인 저 놈을 가만 안두겠다고 한두 번 달려갔냐고? 과부가 홀아비 마음 모르면 누가 알아. 버홀터가 그냥 왔겠어? 굉장히 고민했을 거야. 군시절 같이 적진을 넘나들던 직속상관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니 얼마나 안쓰러웠겠냐고.”
순간 좌중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비렌드라는 커피 잔을 들어 올렸고, 나카야마는 콧구멍을 쑤셨다.
오민철은 나오지도 않는 하품을 하겠다고 입을 벌렸는데 너무 적나라했다.
“돈 받고 방아쇠 당기는 용병이지만 가끔은 이런 일에도 나서주는 것이 이 바닥 처세 아니겠어?”
“그 자식 말 한번 진짜 뽀대나게 해버리네.”
오민철이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고등학교도 나오다 말다 한 자식이 어쩔 때는 서울대 출신처럼 말을 한다니까. 나도 콜이다 자식아.”
오민철이 큰 소리로 대답 했다.
“그냥 캡틴은 아니지.”
비렌드라가 웃는다.
자기 역시 작전에 참여하겠다는 뜻이다.
“쪽바리 넌? 안 할거야? 이런 비겁한 쪽바리.”
“나 나카야마가 이 나이 먹도록 살아오면서 가장 큰 소득이 있다면 용병이 되어 고향에 우동가게를 내고, 5층짜리 건물을 산 것이 아니라 캡틴 같은 멋진 남자를 만났다는 거야.”
“야 쪽발아. 아무리 봐도 넌 조센징 쪽이야. 조상중 조선에서 건너온 사람 있는지 알아봐.”
오민철이 나카야마의 손을 거칠게 잡고 흔들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버홀터는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자신이 보고 겪은 슐츠 사단장은 강직했고 지휘관인데도 위험 앞에 솔선수범 했다.
항상 선두에 있었기 때문에 별명이 ‘넘버 원’이었다.
그가 어깨에 별을 달 것을 의심하는 부하들은 없었다.
상관들도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항상 우호적이었고 당장 별을 어깨에 붙여도 무리가 없는 친구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전역을 하고 용병으로 옷을 갈아입었지만 둘은 계속 교류했고 버홀터는 항상 깍듯하게 예의를 갖췄다.
징!
핸드폰에 문자가 왔다
찌푸린 얼굴로 핸드폰을 보던 버홀터 눈이 커졌다.
‘너무 섭섭해 마십시오. 이번 일 마무리 되면 바로 작전 들어가죠’
버홀터 표정이 밝아졌다.
재빨리 전화를 걸었다.
“고맙네. 역시 캡틴이야.”
너무 흥분한 듯 버홀터의 목소리는 떨렸다.
* * *
생사는 신의 영역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의지로 자신의 생명을 전혀 컨트롤 하지 못한다는 건 아니다.
죽기 위해 극약을 복용하거나 자신처럼 총으로 머리나 심장을 쏘면 죽는 확률은 99.99퍼센다.
즉 살아날 확률은 거의 없다는 뜻이었다.
맥보란은 0.01퍼센트가 자신한테 적용되었다는 사실이 좀체 믿기지 않는다.
살아나긴 했지만 머리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가레스!”
자신의 병실을 지키고 있는 부하직원 가레스를 불렀다.
입구 의자에 앉아 있던 가레스가 일어나 다가왔다.
“자넨 어떻게 생각 하나?”
가레스는 맥보란이 던진 질문이 무슨 뜻인지 아는 듯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총 맞는다고 모두 죽지 않습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 난 건 운이다? 그런 상황에서 운이 작용할 수 있다고 보는가?”
“살아난 것에 감사하십시오.”
그때 환자복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몸서리를 쳤다.
맥보란은 핸드폰 통화버튼을 눌렀는데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축하하네.”
맥보란의 안색이 가볍게 굳는다.
상대는 아담스였다.
“자넨 목숨을 너무 가벼이 여기는군. 성경에 보면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이기에 내 맘대로 절대 끊을 수 없다고 했네.”
“우욱!”
갑자기 맥보란은 구역질을 했다.
“왜 그런가? 속이 불편한가 보군. 나중에 통화하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담스가 성경과 하느님 운운 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구역질이 일어났다.
마음은 그렇지 않았으나 온 몸이 그의 말을 강하게 외면한 것이다.
자신이 누구 때문에 자살을 시도 했는지 모르지 않을 아담스인데 전화기속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너무 당당하다 못해 징그럽기까지 했다.
“어서 회복하게. 그쪽도 이대로 끝나지는 않을 테니 끝장을 봐야 하지 않겠나?”
그쪽이란 권총수를 가리킨다.
“그래야죠.”
“또 통화하지!”
저쪽에서 전화를 껐지만 맥보란은 잠시 동안 핸드폰을 귀에서 떼지 않았다.
입구 의자에 앉아 있던 가레스가 슬쩍 눈치를 살핀다.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려 들 때 또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액정을 봤는데 번호만 찍혀 있었다.
“누구시죠?”
“통화 가능 하겠습니까? 목소리에 힘이 없어 보이는데?”
움찔!
예상밖의 인물이라는 듯 맥보란이 깜짝 놀랐다.
“왜 그러십니까?”
가레스가 다가오려 하자 오지 말라는 듯 왼손을 들어 막았다.
개인적인 통화라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