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2화: 햇빛 자르기(3)
권총수는 전음을 날렸다.
‘본대로 말하세요’
화들짝!
귓가에 속삭이듯 들리는 전음에 라멜로는 소스라쳤다.
“왜 그런가? 작전 종료인가?”
“클락슨은...죽었습니다.”
“지금?”
“토니 또한 죽었으며 난 포로입니다.”
권총수는 라멜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라멜로 손에 있는 핸드폰이 권총수에게로 날왔다.
라멜로는 너무 놀란 듯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옛날을 생각하기 위해 노력하죠. 너그럽고 온유하자는 생각을 최면 걸듯 하면서 최대한 방아쇠를 자제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내 분노를 마무리 하고 싶습니다. 내 뒤에서 방아쇠를 당긴놈, 그리고 그자에게 날 죽이라고 지시한 놈?”
“나요.”
“끝까지 날 모욕할 셈입니까? 당신은 날 죽이지 못합니다. 나에 대한 이용가치가 많다는 걸 알기 때문에 척을 지는 것 보다는 불편하더라도 동거하는 걸 선택할 사람이죠.”
“나를 죽이고 끝내면 안 되겠소?”
탁!
권총수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복수의 대상자는 절대 대체될 수 없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오민철 일행이 들어섰다.
“아 피 냄새!”
“형, 짐 챙겨.”
“짐?”
“여긴 노출됐어. 한두 명도 아니고 내 손에 다섯 명이 죽어 나갔는데 랭글리가 가만있겠어요?”
무거운 시선으로 권총수를 바라보던 오민철이 안으로 들어갔고 비렌드라와 나카야마는 2층으로 올라갔다.
맥보란이 세 명의 무장요원을 데리고 들어섰다.
대문은 잠기지 않았다.
곧장 마당을 지나 현관으로 들어선 맥보란은 눈을 크게 떴다.
어둠이 깊어 실내의 모습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
탁!
벽의 스위치를 켜는 순간 뒤따라 들어선 두 요원이 놀라 소리쳤다.
“클락슨.”
“토니.”
죽은 사람을 흔들었다.
두 사람의 몸은 이미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다다닥!
흥분한 두 사내는 안방과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두 사내는 집안의 가구들을 뒤집어 엎으면서 권총수를 찾기 위해 발악했다.
한편 무표정한 얼굴로 한쪽 소파에 앉아 있는 라멜로를 바라보는 맥보란의 시선이 복잡하다.
모두를 죽이지 않고 한 명을 살려 놓은 권총수의 의도는 뭘까.
한참동안 우두커니 서 있던 맥보란은 맞은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와당탕!
2층은 공사를 하듯 시끄럽다.
담배연기를 뿜어내는 맥보란의 얼굴은 창백하기까지 했는데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가끔은 맞은편에 앉은 라멜로 바라보기도 했지만 어떤 감정을 담은 시선은 아니었다.
2층과 1층을 샅샅이 수색하던 두 요원이 욕설을 퍼부으며 다가왔다.
지이잉!
진동으로 해놓았으나 조용했기 때문에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맥보란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귀에 댔다.
“또 뭡니까?”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권총수였다.
“나갈 때는 문을 잠그시오. 근처에 부랑아들이 많아 대문이 열려 있으면 난장판이 될 것입니다. 주인한테 연락을 했는데 일이 바빠 이번주 일요일 날이나 와보겠다는군요.”
주인이 제공해준 가구들이 있는데 아무리 화가 나도 그것들에게는 분풀이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처럼 들린다.
그러나 대문을 열어 놓은 건 자신에 대한 편의였고 라멜로를 살려 놓은 것 역시 나의 자비라는 걸 잊지 말라는 뜻이다.
그 모든 걸 이해한 맥보란의 표정이 변했다.
“우리 그만 끝냅시다.”
맥보란은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더니 관자노리에 들이댔다.
“팀장님!”
“서기관님!”
부하들이 소스라친다.
“나 한 명으로 모든 것이 정리되길 바라는 마음이오. 더 이상 희생자가 생기는 걸 원치 않습니다.”
타아앙!
방아쇠가 당겨졌고 맥보란은 그대로 넘어졌다.
“이런 빌어먹을!”
사내들이 재빨리 맥보란을 반드시 눕혔고 즉시 심폐소생술을 실시했다.
라멜로는 긴급 전화 123을 눌렀다.
“빨리 출동해 주시오. 여긴 카이로 36번가 마흘7번지 환자는 총상이오.”
라멜로는 악을 썼다.
권총수는 전화를 들고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왜 그래?”
오민철이 다가왔다.
낮에 이미 권총수는 새로운 집을 구했는데 복층 아파트였다.
이제야 말로 CIA와 전면전이라면서 일반 주택보다는 아파트가 안전도에서 높다고 판단했다.
그중 최고의 안전도는 주민들이다.
아무리 CIA라고 해도 남의 나라에서 마음대로 총기를 사용한다는 건 쉽지 않다.
더욱이 사망자라도 발생한다면 백악관이 흔들릴 것이다.
주민들을 방패막이로 쓰는 건데 어쩔 수 없었다.
권총수는 굳은 얼굴로 핸드폰을 내렸다.
“음!”
권총수의 표정이 심상찮음을 발견한 나카야마와 비렌드라가 2층에서 내려다보았다.
“한심한, 맥보란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진짜!”
“왜 죽어?”
비렌드라와 오민철이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자신을 끝으로 모든 걸 종결하자는 거야. 이 상태로 나간다면 피의 소용돌이가 절대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거지. 나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미중앙정보국이 양보할리는 더욱 없고.”
얼굴이 굳어진 오민철이 천천히 거실 소파로 걸어가더니 풀썩 주저앉았다.
“패죽일, 지가 왜 죽어.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맥보란에 대해서는 조금 안다고.”
오민철이 거칠게 말했다.
“절대 뒤통수 칠 인간은 못돼. 총수 청소하는데 그는 절대 관여하지 않았어. 장담한다고.”
“나도 그렇게 봐.”
비렌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요원치고는 무척 신사적인 친구야. 애국심도 중요하지만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무척 소중히 여기는 인품이었지.”
“아니면 아니라고 해야지 자기가 왜 죽어? CIA가 무슨 야마구치구미야. 윗놈 잘못을 대신해 아랫놈이 자살하게.”
나카야마가 인상을 썼다.
권총수가 이란에서 돌아오지 않을 당시에는 맥보란에게 이를 갈긴 했으나 누구도 그의 작품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특히 오민철은 말은 살벌하게 했으나 겪어본 맥보란은 인간미가 있었다.
결국 맥보란은 상관과 조직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끊은 것이다.
권총수는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권총수는 아파트를 나와 근처 공중전화로 걸어갔다.
이른 새벽의 아파트는 조용했는데 카드를 넣고 번호를 돌린다.
“123이죠. 어제 밤 카이로 36번가 마흘7번지에서 혹시 응급 환자 발생했습니까?”
“누구시죠. 극히 위험한 상태로 이집트대학병원으로 긴급 후송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감사합니다. 알라후 아크바르.”
전화를 끊은 권총수는 곧장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부우웅!
잠시 후 주차장에서 흰색의 벤츠가 튀어나오더니 밖으로 사라졌다.
핸들을 잡은 권총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목숨이 두 개가 아닌 이상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맥보란은 상관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조직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죽어버리면 안 된다.
아딜과 할아버지 아자드에게 진 빚만으로도 어깨가 너무 무겁다.
그런데 맥보란의 자살까지 커다란 짐이 되어 버린다면 그 무게를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다.
맥보란이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우정도 인연도 아니다.
그가 살아 있어야 죽어야 할 자들을 향해 당기는 자신의 방아쇠가 좀 더 가벼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맥보란은 아직 숨진 건 아니었다.
대수술 끝에 머리에 박힌 총알을 빼내는데 성공했지만 아직 의식을 차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생존 가능성은 아주 낮지만 어쨌든 현장에서 즉사하지 않은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했다.
가끔은 머리에 총알이 박힌 상태인데도 일상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의학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라고 한다.
의술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분명한 한계를 드러낸다.
의학적으로는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고 지금 맥보란이 바로 거기에 포함되는 것이다.
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병원은 조용했고 응급실 간판만 훤하게 불을 켜고 있었다.
현관으로 들어선 권총수는 벽에 쓰인 진료과를 차례대로 훑었다.
중환자실을 찾아냈다.
권총수는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3층에 올라선 권총수는 중환자실 앞을 주시했는데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스으으!
불영보가 펼쳐지면서 순식간에 다가서면서 오른손이 앞으로 뻗어 나왔다.
팟팟!
의자에 앉아 있던 백인 사내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마혈과 수혈이 동시에 제압 된 것이다.
스르르!
문을 열고 들어가 간호사까지 제압한 권총수는 침대에 걸린 환자 이름표를 확인하며 맥보란을 찾았다.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건 기(氣)다. 기가 충만하면 함부로 죽음의 기운에 덮이지 않는다.’
대력금강심법의 요체다.
권총수는 맥보란의 손바닥에 자신의 장심을 댔다.
일반적으로 명문혈을 많이 이용하지만 몸을 바로 세울 수 없을 만큼 상태가 나쁘면 장(掌과) 장(掌)을 맞대고 내공을 주입한다.
물론 사지(四肢)를 이용하면 명문혈보다는 몸에 퍼지는 시간이 더 걸린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에게는 무조건 명문혈을 이용하여 전이대법을 시전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 장심을 이용하는 것도 한 방법인 것이다.
뜨거운 내기가 들어간다.
무공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갑자기 많은 내공을 주입하면 오히려 부작용이 발생할 위험이 크다.
오민철과 비렌드라 모두 내공심법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치료가 쉬웠지만 맥보란은 다르다.
권총수는 서둘지 않고 갓난 아이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내공을 주입했다.
시간이 흘렀고 두 눈을 감고 앉은 권총수의 모습은 흡사 좌탈한 고승으로 느껴진다.
조금씩 세상이 밝아 오고 있었다.
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권총수가 걸어 나왔다.
의자의 사내는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있었다.
권총수는 지풍을 날려 마혈과 수혈을 풀어주고 순식간에 모습을 감춰 버렸다.
사내는 다시 눈을 깜빡 거리며 핸드폰 게임을 계속 하기 시작했다.
권총수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카이로의 아침은 선선했다.
권총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피식!
메마른 실소가 나온다.
어제까지 죽이고 싶어 했던 사내를 적잖은 내공을 소모해 가면서까지 살리려는 자신의 행동이 무척 어색했다.
‘난 당신이 CIA에서 날 청소하는데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
권총수는 담배를 물고 차로 걸어갔다.
딸칵!
문을 열고 들어간 권총수는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당신의 꿈이 블랙요원이었는데 적성검사에서 탈락했다고 했던가’
부우웅!
차는 병원을 나와 도로로 들어섰다
‘지금 생각하니 화이트 요원으로도 부적절 한 것 같소. 정보요원이 그렇게 모질지 못해서야 되겠소. 만약 살아난다면 사표부터 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 편이 남은 인생 조금이나마 두 다리 뻗고 살 것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인데.’
권총수는 길게 숨을 내 쉬었다.
맥보란이 깨어났다는 말은 그로부터 3일후에 들었다.
권총수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오민철은 겉으로는 제 까짓게 살든지 말든지 하며 무뚝뚝한 표정을 했으나 속마음까지 그러지는 못했다.
커피숍 밖으로 걸어나가 담배를 피우는데 안에서와 다르다.
살아나 다행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비렌드라와 나카야마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 역시 맥보란에 대한 감정은 나쁘지 않은 것이다.
“살 사람은 살게 되어 있어.”
나카야마가 혼잣말처럼 뱉었다.
“저기 오는군!”
비렌드라가 입구를 보았다.
낯익은 백인 한 명이 커피숍으로 들어오고 있었는데 다인코프 카이로 지사장 버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