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280화 (280/651)

제280화: 햇빛 자르기(1)

비행기가 내려앉았다.

입국장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거의가 무슬림 복장을 한 사람들이다.

한 나라의 정정이 불안하면 치안까지 어지러워지고 외국인들은 범죄에 가장 빨리 노출된다.

그러다 보니 비 이슬람권 복장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으므로 그들의 모습은 빨리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고 복장이 다른 건 아니었다.

터번을 둘렀고 쥐색의 토브(망토처럼 길게 내려온 것)를 걸쳐 어설픈 눈에는 세 명의 백인 역시 독실한 무슬림으로 알 정도였다.

사실 영어권 백인들 중에서도 독실한 이슬람 신자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세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노인은 그들에게서 이슬람 복장을 한 현지인들과 차이점 하나를 찾아내면서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건 토브였다.

거의 바닥을 쓸 듯, 최소한 발등까지는 덮어야 하는데 발목이 드러날 만큼 짧다.

그건 복장을 이용해 자신들의 정체를 어느 정도 감추려는 시도였지만 꼼꼼하지 못했다는 걸 반증했다.

저격수가 길리슈트를 괜히 입는 게 아니다.

숲과 하나가 되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인 것이다.

복장이 어설프다는 건 상대를 저평가 했다는 뜻이다.

세 사람이 입국장을 나오자 오메이사와 카스가 다가갔다.

“미스터! 클락슨!”

가장 앞서 나오는 훤칠한 백인 사내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메이사입니다.”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메이사는 세 명의 백인들과 악수를 나눴고 카스도 같이 인사를 하며 웃음을 지었다.

“가시죠!”

오메이사가 앞장을 섰다.

“경위님! 잠시 화장실을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비행기 화장실은 너무 불편해서.”

백인 중 한 명인 라멜로가 웃었다.

“다녀오세요. 우린 여기 앉아 커피 한 잔 어떻습니까?”

“매우 빛나는 말씀입니다. 경위님!”

클락슨이 감히 청하지는 못했지만 바라던 바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네 사람은 창가에 있는 나무로 된 벤치에 앉았다.

카스는 커피를 사기 위해 커피숍을 향해 걸어갔고 라멜로는 가방을 놔두고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화장실은 네 사람이 있는 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라멜로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지는 것이 급한 모양이다.

오른쪽이 여자고 왼쪽이 남자 화장실이다.

화장실로 들어선 라멜로는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으며 배설하는 소리가 문밖까지 들렸다.

스으윽!

화장실로 지팡이를 짚고 있던 노인이 들어섰다.

노인은 라멜로가 들어간 문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몸을 돌렸다.

‘한 번에 정리해야 한다.’

라멜로를 일단 치고 볼까 했지만 그렇게 하면 커다란 소란은 불가피했다.

화장실 간 동료가 돌아오지 않으므로 일행들이 와볼 것이고 자칫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진다.

목표물을 타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퇴각이 계산되지 않으면 꼬리가 밟힌다.

권총수는 노인처럼 느릿하게 걸어갔는데 조금 전까지 그의 곁에서 아들 역할을 하던 사내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인코프 카이로 지사 직원이다.

잠시 아르바이트 좀 하지 않겠냐며 데려온 것이다.

물론 그는 권총수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모른다.

질문을 했지만 권총수는 대답 대신 돈을 많이 쥐어 주었다.

알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다.

청사 밖으로 걸어 나가는 권총수를 오메이사 경위가 흘긋 바라보았다.

주차장에 다섯 사람이 나타났다.

세 명의 백인을 마중 나온 오메이사 일행이었다.

한편 주차장 자신의 차량에 앉아 하품을 하고 있던 오민철의 귓가로 음성이 들렸다.

“형, 왼쪽 11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봐. 회색 벤츠 한 대가 보일 거야.”

권총수의 전음이었다.

오민철은 재빨리 11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 보여!”

전음을 보내지는 못하지만 주차장 안에 있다면 자신의 대답 정도는 충분히 듣는다.

“만약을 대비해 경호를 나온 CIA야. 그들이 차안에 가만있으면 내버려 두고 그렇지 않고 내리려고 하면 없애 버려.”

“알았어!”

오민철은 다부지게 대답하고 글록 18을 꺼내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소음기도 이상 없고 19발이 들어가는 탄창을 꺼내 재차 살피며 눈을 빛냈다.

다섯 명이 렉서스 SUV가 주차된 곳으로 걸어갈 때 맞은편에서 노인이 걸어왔다.

모두가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오메이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공항 청사에서 스치듯 보았기 때문이었다.

권총수는 느릿하게 다가왔고 오메이사 오른 손이 옆구리에 차고 있는 권총 손잡이에 닿는다.

‘백정답게 다르군’

권총수에게서 불편한 기운을 감지 한 것이 분명했다.

권총수는 그들과 비켜 지나갈 것처럼 똑바로 걸었다.

오메이사는 가장 선두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일행과 크게 거리를 두지는 않고 한두 걸음 정도 앞서 걸었다.

오메이사 오른손이 권총 손잡이에서 떨어졌다.

권총수가 지나갈 것 같은 걸음이었기 때문인데 오메이사의 눈이 커졌다.

취잇!

때마치 석양이 지고 있었는데 흰빛 섬광 하나가 떨어지는 태양을 정확히 반토막 내고 있었다.

태양을 반토막 낸 흰 광채는 어느새 면전으로 파고들었고 오메이사는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은빛 섬광이 사라지며 머리가 띵 했다.

그리고 갑자기 둔기로 한 대 맞은 것처럼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면서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카스 형사가 위험을 직감하고 권총을 뽑으려 했지만 그 역시 한 박자 늦었다.

검은 정확히 그의 목을 관통하여 목뒤로 빠져 나왔다.

촤악!

검을 뽑자 목에서 핏물이 쏟아져 내렸다.

한편 벤츠 문이 거칠게 열리며 두 명의 CIA정보요원이 내렸다.

차안에서 상황을 지켜본 것이었다.

푸슉!

슉!

두 사내는 곧장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열린 유리문 사이로 소음기를 끼운 오민철의 권총이 보였다.

오민철은 차에서 내려 사내들에게 다가가 죽음을 분명하게 확인했다.

“게임 아웃!”

오민철은 권총수에게 보고하듯 말했다.

세 명의 백인사내들은 창백해졌다.

권총수 오른손에 쥐어진 검에는 핏방울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권총수가 빙긋 웃었다.

“처음에는 당신들 셋 모두 없애 버릴 계획이었소. 공항에서 발견즉시 정리하려고 했지.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내 마음이 많이 누그러졌습니다.”

탁!

권총수는 검을 대나무로 만든 집에 찔러 넣었다.

“난 당신들이 누군지 무엇을 위해 미국인 여행금지국인 이집트에 들어왔는지도 알고 있죠. 당신들과는 감정 없소.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 목숨까지 빼앗고 싶은 마음은 없다는 얘기요. 맥보란은 물론, 당신들을 보낸 사람에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반드시 전달하시오. 내게 사과하고 테헤란에서 날 공격한 청소부의 정체를 얘기하면 모든 건 없었던 것으로 처리할 용의가 있다고 말입니다.”

권총수는 등을 돌렸다.

서너 걸음 걷더니 다시 돌아보며 말했다.

“내 말 명심해야 할 것이오. 체면, 명예 따위에 함몰되어 복수하려 들었다가는 그땐 살려두지 않을 것이오.”

특수전에 달인들이라는 자존심 운운하면서 다시 찾아온다면 그때는 반드시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부우우웅!

그때 오민철이 핸들을 잡은 승용차가 왔고 권총수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우리 동생 말 명심하라고, 괜히 ‘내 고향 푸른 잔디’ 타령하며 후회하지 말고.”

오민철이 열린 문을 통해 소리 높여 말했다.

사형수가 고향을 찾아갔다.

자신이 살던 고향 마을, 친구들과 뛰어 놀던 푸른 잔디와 사랑하는 부모님, 체리빛 입술을 가진 금발의 사랑하는 애인 메리를 만난다.

애인 메리와 유년 시절에 뛰어 놀랐던 고향길을 걸어가다 잠이 깬다.

모든 것이 꿈이었다.

현실은 회색빛 교도소 담벼락과 바퀴 벌레가 기어다니는 시궁창 냄새 진동하는 감방이었다.

톰 존스가 불러 히트시킨 그린 그린 그래스 오브 홈(Green Green Grass of Home)의 노랫말중 일부분이다.

즉, 죽어가며 고향 떠올릴 짓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세 사람은 악몽을 꾸는 듯 한동안 멍하니 오민철의 차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지이잉!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클락슨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는데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담스와 맥보란 둘 뿐이다.

“옙!”

짧게 대답했다.

“무슨 일 생긴 건가? 자네들 마중나간 팀원들과 연락이 닿지 않는군?”

지원 나온 정보원들과 연락이 안 된다는 건 한 가지 이유뿐이다.

죽으면 연락이 되지 않는다.

“아악!”

그때 여자 비명 소리에 클락슨은 고개를 돌렸다.

여자는 뭘 발견한 건지 소스라치며 안색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재빨리 뛰어간 클락슨은 벤츠 앞에 나뒹굴고 있는 두 명의 백인 사내를 발견했다.

왼쪽 손목에 검정색 전자시계를 차고 있는 것이 동료들이다.

적진에서 서로 의사를 전달할 수 없을 때 왼쪽 손목의 검정색 전자시계는 동료라는 무언의 교신 역할을 한다.

총소리를 듣지 못했다.

권총수의 검법에 거의 넋이 나갔다고는 하지만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발생했을 총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건 소음기를 부착했다는 뜻이었다.

“왜 말이 없나?”

“죽었군요.”

“뭣이!”

“대사관에서 보내준 이집트 경찰관 두 사람도 죽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앞에서 죽었죠.”

클락슨은 상황을 설명했다.

맥보란은 전화를 내려놓았다.

전혀 예상 하지 못한 돌발 사태였다.

공항 주차장에서 모든 상황이 종료됐다면 SAC 요원들이 들어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믿을 수가 없다.

거기다가 클락슨의 말을 빌리면 검에 죽었다고 했다.

권총수를 알게 되면서 강호라는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았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과학을 넘어서는 능력들을 흔하게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차고 있는 권총을 채 뽑지도 못하고 죽음을 당할 정도면 얼마만큼 빨라야 하는 걸까.

“맥!”

문이 열리고 새로 부임한 미국대사 마이클이었다.

“전화 좀 받아보게.”

맥보란은 책상 위 수화기를 들었다.

맥보란은 가만 듣고만 있더니 알겠다면서 끊었다.

이집트 경찰 측에서 걸려온 전화였는데 관광객으로 위장한 세 사람을 마중 나간 오메이사와 카스가 주차장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정보요원 둘의 죽음도 확인해 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대사 마이클의 표정이 굳었다.

뉴스에라도 나가면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것이다.

다행히 이집트 언론은 통제가 잘되므로 걱정할 것이 없으나 사건 냄새 하나 만큼은 귀신처럼 맡는 카이로 주재 각국 기자들이 수두룩하다.

자칫 발령받자마자 본국으로 소환될지도 모른다.

“서기관님.”

직원 한 명이 입구에서 머뭇거렸다.

손가락 세 개를 들었는데 그건 한 가지에 대한 신호였다.

맥보란은 담배갑과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대사관 내에도 안가가 있다.

집이라기보다는 도청 감청 방지장치는 물론 안에서 총을 쏴도 소리가 문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방음까지 잘된 곳이다.

맥보란은 공항에서 지금 막 도착한 세 사람과 앉아 있었다.

이미 전화로 상황 설명을 들었지만 좀 더 구체적인 내용까지 확인한 맥보란은 이마를 찡그렸다.

“사막의 흑새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면 그의 일행이 근처에 있었다고 봐야지. 우리가 만약을 위해 원거리 경호를 했듯 그들도 이집트 경찰이 아닌 우리 쪽에서 움직임이 있을 것을 예측하여 대비 했을 수도 있으니까?”

맥보란은 보지 않고서도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읽어냈다.

“우리가 그 시간에 입국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클락슨이 물었다.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