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9화: 사냥의 노래(3)
랜드로버가 멈췄다.
문이 열리고 터번을 두른 노인이 내렸는데 천천히 길가에 있는 커피숍으로 걸어 들어갔다.
커피숍 안에는 오민철을 비롯한 비렌드라와 나카야마가 앉아 있었다.
“좋았어!”
노인 모습으로 들어서는 랜드로버 운전자는 권총수였다.
권총수가 셋을 불렀는데, 셋에게 달라붙은 CIA를 떼어 낼 수가 없다고 했다.
셋은 쫓고 쫓는 일에 프로라고 할 수 있었지만 쫓는 그들 역시 베테랑들이다.
더욱이 이쪽보다 카이로 지리와 차선, 그리고 신호체계를 더 잘 아는 그들을 따돌린다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권총수가 노인으로 분장하여 미행을 훼방한 것이다.
“뭔 일인데?”
오민철이 눈을 빛냈다.
“정확하지는 않아. 내일 아니면 모레 사이에 미국인 세 명이 들어올거야. 카이로 여행 금지령이 내려졌다는 건 알 것이고.”
“여행 금지령이 내려졌는데 대사관이나 기업인도 아닌 일반인 세 명이 들어온다는 건?”
나카야마가 눈을 빛냈다.
“추측이지만 그들일 가능성이 높아.”
“그들이라면?”
“SAC(Special Activities Center).”
“특수 공작국?”
비렌드라 눈이 빛났다.
“아마 그곳의 흑색요원일거야. 날 없애기 위해 보낸 것으로 판단하고 있어.”
셋 모두가 크게 놀란다.
아직 한 번도 그들과 조우 해 본 적은 없지만 현역 군인신분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고, 제대하고 곧장 그곳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까지는 알고 있다.
“정확히 어느 정도인 친구들이지?”
비렌드라가 묻자 권총수는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어 말했다.
“암살, 납치, 파괴 이쪽 분야의 정점으로 불리는 친구들이야. 전원이 씰이나 데브그루에서 잔뼈가 굵었지.”
꿀꺽!
나카야마가 긴장한 모양이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피할 수 없어.”
“우리가 뭘 하면 돼. 말만 해.”
나카야마가 결의를 다진다.
“뒤로 숨기 전 앞에 있을 때 전광석화처럼 해치워 버려야해.”
권총수가 세 사람을 훑어본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미국 대사관 감시야. 정상적이라면 이런 일에 대사관은 관여하지 않아. 하지만 여행 금지령이 내려질 만큼 미국인에게 카이로는 위험한 지역이지.”
“미국대사관 차원에서 어떤 조치가 내려질 것이다?”
오민철이 묻는다.
“어쩌면 범인이 사막의 흑새라는 걸 이집트 경찰과 이미 공유했고 협조를 부탁했었을 수도 있어. 날 잡으면 일단 이집트 경찰이 체포한 것으로 언론에는 알리고 간단한 조사가 끝난 후 미국인 살해범으로 미국으로 신병을 인도하는 시나리오가 가장 유력해.”
“정확히 보았어!”
비렌드라는 거의 백프로 그런 형태로 사건이 진행될 것이라고 단정했다.
“민철이 형은 이집트 경찰을 감시하고, 눈 형과 나카야마 형은 미국 대사관을 살펴봐. 내 추측이 맞다면 반드시 어떤 움직임들이 있을 거야.”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총수야. 조금 전 했던 말은 무슨 뜻이지? 뒤로 숨기 전에 앞에 있을 때 끝내야 한다고 했잖아.”
“그들은 전술적으로 은폐와 엄폐 위장, 변장, 도주 미행에 뛰어난 친구들이지. 도시 속으로 들어와 버리면 피곤해진다는 얘기야.”
“앞에 있을 때 손본다는 건 설마?”
비렌드라와 나카야마 역시 눈을 크게 뜨고 보았다.
“동반하는 위험이 작지는 않지만 현장에서 치워버려야 돼.”
권총수는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칸 칼릴리 시장에서 가장 빨리 열고 가장 늦게 닫는 대장간이 조용했다.
귀가 멍멍할 만큼 흘러나오던 망치소리도 멈추고 이글거리는 화로의 불길도 꺼져 있었다.
턱!
권총수가 들어섰다.
노인은 딱딱한 나무 의자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권총수를 발견한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안쪽 선반에서 마른 대나무 한 자루를 가지고 나왔다.
주문한 그대로 1미터가 조금 넘어 보이는 길이였다.
권총수는 지팡이처럼 짚어 보았는데 노인들 지팡이 높이와 정확히 일치했다.
“살펴 보시오.”
밤을 세워가며 부자 간에 심혈을 기울였다.
권총수는 대나무를 쓰다듬으며 만지더니 손잡이를 잡고 검을 뽑았다.
스스스스!
대나무 검집 속에서 뽑혀 나온 검 날에서는 새하얀 냉기가 쏟아져 나왔는데 권총수는 검을 들어 바라보았다.
좁은 검신에 얼굴이 선명하게 비친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대장간은 어둑했는데 권총수는 쥐고 있는 검을 좌우로 몇 번 움직였다.
파팟!
검신에서 밝은 빛이 쏟아져 나오는 것에 노인은 깜짝 놀랐다.
검을 만든 자신도 심혈을 기울였지만 어둠을 밝힐 만큼 광채가 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크우우우!
주입하는 내공의 강도가 세질수록 검은 더욱 빛났고 대장간은 전등을 켜 놓은 듯 환해졌다.
경이로운 현상에 더 이상 앉아서 볼 수만은 없다는 듯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촥!
그다지 넓지 않은 대장간에 번개가 쳤다.
그러나 이어 들려와야 할 뇌성은 없었고 툭 하는 소리에 노인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어른 손가락 굵기 정도 되는 조그만 철근 토막이 떨어져 있었다.
시선을 위로 들자 자재로 쌓아 놓은 철근들이 있는데 그중 한 개가 매끈하게 잘려나갔다.
철근을 잘랐다.
그것도 기계가 아닌 검으로 자른 것이다.
어떤 기계로 자른다고 해도 이토록 짧은 순간에 절단할 수는 없다.
“마음에 듭니다. 아주 명검을 만드셨습니다.”
내공이 주입되었다 고는 해도 철근을 잘랐는데 검은 아무런 흠집도 생기지 않았다.
권총수는 수고비로 백 달러짜리 한 장을 더 내놓고 대장간을 나왔다.
노인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두 눈으로 봤지만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슥!
노인은 잘라진 철근 단면을 만져 보았다.
절단기로 자르면 거친 표면에 자칫 손을 벨 수가 있는데 곱게 다듬어 놓은 듯 미끈했다.
허리를 구부려 바닥에 떨어진 잘라진 철근 토막을 주워들었다.
역시 잘린 면은 매끄러웠는데 노인은 헛소리 하듯 중얼 거렸다.
‘내가 지금 뭘 본거지’
조금 전 상황을 다시 떠올려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골목에 세워둔 승용차에 막 오르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오민철이었다.
“잘 지키고 있지?”
“조금전 오메이사가 탄 차량이 경찰서를 나갔어.”
오메이사는 이집트 보안경찰의 제로팀 소속 경찰관이다.
“지금 어딘데?”
“당연히 미행하고 있지. 카스란 놈도 같이 탔어.”
오메이사는 자신이 제거한 CIA 요원 파비오 사건 수사를 지휘하고 있다.
경찰서 폭발사건이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아 오메이사는 계획대로 현 정부에 불만을 가진 야당인사들이 배후 조종한 반민주적인 폭거로 규정하는 조작에 들어갔다.
하지만 수사 방향이 바뀌었다.
특히 며칠전 맥보란이 경찰서에서 나오는 것이 목격되면서 해답이 나왔다.
CIA에서 어떤 정보를 건네준 것이다.
그렇게 양국 국가기관들은 권총수를 잡기 위해 손을 잡았다.
“어어! 공항으로 가는 것 같은데.”
오민철이 놀란다.
“공항 가네. 공항 쪽으로 좌회전 했어. 백프로야.”
“형 차분해야 돼. 일단 나도 갈 테니까 핸드폰 관리 잘해.”
권총수는 맞은편 교차로에서 맨 안쪽 차선으로 들어갔다.
화살표가 그려진 이정표에 공항(airport)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곧장 좌회전 신호가 떨어졌고 권총수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오민철이 자신의 판단이 맞았다며 흥분했다.
“너도 알지 저 인간 백정(오메이사)을 노리는 놈이 워낙 많아 차안에 권총뿐만 아니라 수류탄까지 갖고 다닌다는 것 말이야.”
그건 조심하라는 얘기였다.
권총수는 빙긋 웃으며 걱정말라고 했다.
미 대사관을 감시하고 있는 비렌드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긴 어때?”
“조용해. 맥보란은 평소처럼 출근했어.”
“계속 지켜보세요!”
어느 나라이건 미국 대사관은 감시의 주 대상이다.
영원한 군사적 라이벌인 러시아 연방 정보총국(GRU)과 중국의 국가안전부는 물론 정보전에서 만큼은 피아를 구분 않는다는 철칙에 따라 모사드나 MI6에서도 살핀다.
외교부 직원이 정보요원일수 있고, 정보요원으로 알았던 인물이 외교부의 공무원일 수도 있다.
화이트 요원이자 중동의 CIA 컨트롤 맨인 맥보란이 움직이면 그들 세 사람이 평범한 관광객이 아니라는 것이 정확하게 증명 되는 것 아니겠냐는 것이 비렌드라와 나카야마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권총수는 생각을 달리하고 있었다.
맥보란은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움직인다면 몸이 아닌 전화기를 통한 명령과 지시일 가능성이 높았다.
자신을 보는 눈이 너무 많다는 걸 맥보란 자신이 알기 때문이다.
“공항이야. 지금 도착했다”
“나도 가고 있어.”
권총수는 가속페달을 밟았고 차는 빠르게 달려갔다.
오민철은 가짜 구레나룻을 하고 금테안경을 했다.
거기다 검정색 터번을 두르고 있어 자세히 살피듯 보지 않으면 아랍인으로 보일 정도로 완벽했다.
‘자식들’
신문을 보는 척하며 오민철은 가끔씩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메이사와 카스가 청사 한쪽에 있는 텅 빈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얘길 나누고 있었다.
차를 마시며 느긋한 것이 아직 도착하려면 시간이 있는 듯 보인다.
멈칫!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주위를 한 바퀴 살펴보던 오민철의 시선이 한곳에 멎었다.
자주색 젤라바(롱 코트처럼 발목까지 내려오는데 뒤에 모자가 달려 있다)를 걸친 비쩍 마른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걸어오고 있었다.
주름살이 새끼줄처럼 얼굴을 덮고 있어 나이를 추측할 수 없었고 코에 돋보기 안경이 간신히 걸려 있다.
오민철이 관심을 갖고 바라본 건 특이한 복장이라거나 아니면 지팡이를 짚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초등학교 6학년때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마른 대나무 지팡이를 집고 모자가 달린 자색 우비를 자주 걸쳤다.
할아버지가 자주 입던 우비와 걸어오는 노인의 젤라바가 너무 똑같다.
“아버지!”
그때 터번을 쓴 한 명의 사내가 노인을 향해 다가갔다.
“안 나오셔도 된다니까 뭐하러 오십니까?”
“아직 멀었느냐?”
“조금 기다려야 합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아들로 보이는 사내가 노인을 의자에 앉혔다.
“뭣 좀 드시겠습니까?”
“홍차 한 잔 만 사오거라.”
“네 아버지!”
아들은 홍차를 사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사라졌다.
오민철은 핸드폰 시계를 본 뒤 권총수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문자 한 통이 먼저 도착했다.
‘형이 할 일은 끝났어. 주차장에 가 있어.’
‘넌 어딘데’
오민철은 주위를 돌아보며 문자를 보냈다.
‘걱정말고 차에 앉아 대기하고 있어. 왜 대기해야 하는지 알게 될거야’
오민철은 더욱 주위를 살폈다.
‘차라리 사막의 흑새가 근처에 있다고 신고를 해라’
권총수가 짜증스런 문자를 보내자 오민철이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미안’
오민철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갑자기 왜 주차장에서 대기하라고 하는 걸까.
오민철은 오른손을 뒤로 돌려 뒷주머니에 꽂아 놓았던 글록 18을 만졌다.
권총수의 지시만 떨어지면 표적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이제는 갚아야 한다.
그동안 권총수에게 너무 큰 신세를 지고 있다.
이번 작전에서는 뭔가 확실히 보여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