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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273화 (273/651)

제273화: 주먹을 쥐고(1)

30여가구의 집들이 모여 있었다.

황토빛 흙담으로 벽을 세우고 지붕까지도 흙으로 덮은 사막 특유의 흙집이었다.

노을이 지면서 마을은 더욱 붉게 타올랐는데 다다다 발자국 소리가 울리더니 아메드가 나타났다.

아메드는 열린 대문 안으로 뛰어 들었다.

“할아버지.”

좁은 마당에는 한 노인이 낡은 양탄자를 깔아 놓고 총알을 탄창에 한 알씩 삽탄하고 있었다.

“아메드, 웬 소란이냐? 설마 양을 잃어버린 건 아니겠지?”

“할아버지 나 그 사람 봤어요. 그 사람 봤다니까?”

“누굴 봤길래 우리 아메드가 양들까지 팽개치고 왔는고?”

“그 아저씨 있잖아요. 우리 발루치족을 못살게 했던 사람 말이에요. 이번에 총 맞아 죽은 사람.”

뚝!

AK 탄창에 총알 삽탄하던 노인이 동작을 멈췄다.

“있잖아요. 와아아, 뛰어 오느라 잊어 먹었잖아. 생각났다. 사막의 흑새.”

“아메드, 그 분은 영웅이고 우리의 한을 풀어준 분이시다. 알라 곁으로 떠나신 분을 욕되게 하면 안 된다.”

“할아버지께서 거짓말 하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진짜 자기 입으로 사막의 흑새라고 했다니까요. 그것뿐인 줄 아세요. 날아갔어요,”

다시 총알을 넣던 노인이 재차 돌아보았다.

“노홀라이 계곡을 한 번에 날아왔어요.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아메드의 열기 넘치는 눈빛에 노인은 탄창을 놓고 일어났다.

“가보자!”

“이미 갔어요.”

“그래도 가보자.”

노인은 마당 한쪽에 메어 놓은 쌍봉낙타에 아메드를 먼저 태우더니 자신도 올라탔다.

착!

양발로 배를 두드리자 낙타는 대문을 향해 걸어 나갔고 고삐를 세차게 당겼다.

촤라락!

척척척!

낙타가 달리자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노홀라이 계곡에 음습한 바람이 불었다.

밤이 되면 계곡에서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바람이 불어오는데 목동들은 짐승의 바람이라고 불렀다.

어둠이 내려앉으면서 그 짐승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노홀라이 계곡에 낙타 한 마리가 나타났다.

“저기 봐요. 보이잖아요.”

아메드가 가리키는 맞은편 절벽을 보는 할아버지 호삼의 눈이 빛났다.

어둡긴 해도 아직까지 맞은편 절벽에 사람 두 명은 충분히 나올 만한 구멍이 뚫렸다.

“저곳으로 나왔어요. 그리고 내가 여기 서 있는데 단 번에 날아왔어요. 진짜 새 같았어요.”

뚫린 구멍과 아메드를 번갈아 보던 호삼은 나직하게 중얼 거렸다.

‘아메드는 지금 사실을 말하고 있다’

평소에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아메드다.

사막의 흑새에 대한 소문은 오래전에 들었다.

발루치족이 사막의 흑새를 마음속으로 존경했던 건 이란과 내통하고 있는 탈레반과 무자헤딘을 상대로 많은 전과를 올렸기 때문이지만 더욱 결정적인 건 얼마 전 하메네이를 죽였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여러 소문이 있었으나 신뢰하지는 않았다.

어수선한 시대에 누군가 등장하여 세상을 뒤집어 놓으면 사람들은 그를 끝없이 포장하기 바쁘다.

하지만 하메네이 암살소식들 듣고는 완전히 믿기로 했다.

신이 아니면 결코 하메네이를 죽일 수 없다고 생각 했는데 그가 발루치족의 한을 풀어준 것이다.

호삼은 머리에 쓰고 있던 터번을 벗어 바닥에 펼치고 무릎을 꿇었다.

메카가 있는 곳을 향해 절을 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메네이를 죽여 감사했고 사막의 흑새가 다시 살아나주어 기쁘다.

호삼의 기도는 날이 어두워 오는데도 쉽게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 * *

아무도 입을 열어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나 하면서 벌써 한 달이 넘도록 기다렸지만 권총수로부터 연락은 오지 않았다.

셋 모두 운명처럼 권총수의 의해 죽음직전 살아났다.

권총수가 아니었다면 절대 살아 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들의 구출을 위해 CIA로부터 도움을 받았고 그 댓가로 이번사건을 청부 받은 것이다.

“너무 잔인한 얘길까.”

나카야마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더듬거린다.

“캡틴에게 가족이 없다는 것이 천만다행이군. 한 명의 혈육이라도 있었다면 이 아픔을 어찌 감당했을까.”

평생 우리 세 사람만이 가슴에 안고 가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뜻이었다.

“내가 죽어서라도 캡틴이 살아난다면 당장 죽겠는데.”

나카야마는 넋두리 하듯 계속 혼잣말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캡틴은 강호 고수야. 너희들은 제대로 완전히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난 어려서부터 무공을 배웠기 때문에 그 쪽 세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 비록 현대무기가 강호무공을 압도하지만 그렇다고 캡틴 같은 절대고수를 손쉽게 죽이지는 못해.”

침묵하던 비렌드라가 눈을 빛냈다.

“저격에 성공했다는 건 주위에 위험이 전혀 없었다는 뜻도 되는 거야. 즉 멀쩡했다는 거지. 사막이나 바다처럼 은폐 엄폐물이 없는 곳도 아닌 테헤란이라는 도시 속에서 누가 캡틴을 쉽게 추적할 수 있을까?”

오민철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렌드라의 말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찾아내려는 것이었다.

“절대 잡힐 리 없는 총수가 사라졌다는 건 이란 혁명수비대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는 거야?”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카야마도 비렌드라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설마?”

오민철의 가늘어진 눈이 커졌다.

“누구에게 뒤통수를 맞았단 말이야?”

“장담할 수는 없지. 프랑스에 오기 전 디펜스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지. 영국MI6 공작원의 활약상을 그린 것인데 인상적인 장면이 있어. 영화속에 그리스의 대부호가 나오지. 그의 지갑에서 적지 않은 돈이 아일랜드 독립을 외치는 아이아르에이(IRA) 활동 자금으로 들어가지. 그런데 그 부호가 굉장히 포커 도박을 좋아해. 결국 MI6에서는 체코의 유명한 도박사를 포섭하여 그에게 접근시키지. 도박을 좋아하는 노름꾼에게 전문도박사는 매력적인 친구잖아. 둘은 가까워지고 마지막에 그리스의 부호는 바다에서 시체로 떠올라. 목에 에이스 카드 한 장이 박혀 있어. 도박사의 손에 암살된 거야. 문제는 이틀 후 체코의 도박사 역시 지중해에서 시신으로 떠올랐다는 거지.”

오민철이 나카야마를 돌아보았다.

“MI6 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의 정보국들은 자신들의 일거리를 해결한 제3의 인물은 반드시 없애 버린다는 거야. 증거인멸을 위해.”

비렌드라는 확신을 가진 모양이었다.

“죽여 없애는 걸 청소한다고 한다던데, 캡틴 역시 그랬을 가능성이 커.”

뿌드득!

오민철이 이를 갈았다.

“사실이라면 맥보란 넌 나한데 찢겨 죽는다. 아니 네 가족은 물론 관계된 놈들 모두.”

오민철의 눈에서 푸른 살기가 번득였다.

“일단 청소 당했을 가능성에 놓고 좀 더 알아 보는게 좋을 것 같아.”

“오케이!”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여전히 어둡다.

아무런 단서도 없고,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권총수는 국경 근처에 서 있었다.

국경이라고 하여 우리나라처럼 휴전선 동서로 철조망이 쳐져있는 건 아니었다.

국경이라는 걸 알리는 깃발과 이따금 무단월경시 발포한다는 경고문이 붙은 철탑과 군인들이 없는 텅빈 초소가 전부였다.

마침내 이란의 국경을 넘어 파키스탄으로 넘어간 것이다.

지금 밟고 있는 땅은 파키스탄의 발루치스탄주다.

중동에서 발루치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주이자 유엔에서 여행금지 구역으로 선포했다.

발루치족이라고 하여 모두가 독립국가를 원하는 건 아니다.

그러다 보니 같은 부족끼리 유혈 충돌이 자주 일어나고 거기다 크고 작은 이슬람근본주의 집단들의 테러까지 더해지면서 발루치스탄주는 아주 위험한 지역으로 낙인찍혀 있다.

스으으!

권총수는 불영보를 이용해 빠르게 산을 가로질러 갔다.

저녁 무렵 10여 가구가 사는 산속 마을을 발견했다.

마을이 있다는 건, 곧 도로가 있다는 뜻이다.

마을 앞으로 비포장이지만 승용차 한 대 정도는 다닐 수 있는 길이 깔려 있다.

인적이 없어 권총수는 불영보를 극성으로 펼쳤다.

스으으으!

걸어가는 듯 하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10여 킬로쯤 내려가자 도로가 넓어지더니 아스팔트 포장길이 나타났다.

포장도로가 있다는 건 이곳까지 대중교통이 운행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동쪽 하늘에 달이 떠올랐다.

핸드폰이고 뭐고 모조리 잊어 버려 시간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나 달의 위치를 보고 대충 저녁 여덟시쯤으로 예상했다.

깜깜한 시골이므로 대중교통수단이 일찍 끊어질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기다렸다.

기다림은 적중했다.

20여분 서 있는데 굵은 엔진소리가 들리고 버스가 나타났다.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이 회차하는 곳이었다.

버스가 돌려지기를 기다렸다가 열린 앞문으로 올라갔다.

버스 안에는 한 사람도 없었고 달랑 기사 한 명이다.

“이 버스. 어디까지 갑니까?”

“파괄타까지 갑니다. 손님은 어디까지 가시오?”

“파괄타까지 갈 것입니다.”

파괄타는 주도 퀘타에서 서남쪽으로 150킬로 정도 떨어진 지방 소도시다.

버스는 20여분 정도 더 기다리더니 권총수 한 명 만을 태우고 떠났다.

차가 속도를 내면서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운전사에게 다가갔다.

“전화 한 통 쓸 수 있겠소?”

그러면서 이란의 새로운 화폐 100토만을 건넸다.

과거 화폐였던 리알을 1만대1의 비율로 축소하여 1만 리알이면 1토만, 즉 백리알이다.

100토만을 과거 화폐로 계산한다면 일만리알을 건네준 골이다.

도주 과정에서 지니고 있던 소지품 거의 전부가 사라졌지만 주머니에 넣고 있던 이란 지폐일부는 분실되지 않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룸미러를 통해 권총수를 몇 번 살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얼마든지 쓰시오.”

그러면서 권총수가 내 놓은 100토만을 재빨리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꿈은 아니다.

버스 기사는 몰래 뺨을 꼬집고 혓바닥을 당겨봤는데 아프다.

100토알이면 자신의 한 달 월급의 절반이다.

평소 화를 내지 않고 최선을 다해 승객들을 모시다 보니 이런 복이 떨어진 것이라고 믿었다.

기사는 흘긋 룸미러로 권총수를 보았는데 바로 뒷좌석에 앉아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 * *

맥보란을 만날 수가 없다.

전화번호는 이미 바뀌었고 대사관을 찾아갔는데 본국 발령을 받고 떠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셋 모두 그 말을 믿지 않았다.

CIA에서 중동의 정치 지형을 맥보란 보다 더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은 없다.

최고의 전문가를 본국으로 불러들여 뭘 시키자는 건지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안 된다.

“죽일 놈들, 어디 한번 해보자 이거지.”

숙소로 들어온 오민철이 거품을 물었다.

세 사람은 장기전을 대비해 카이로 외곽에 있는 주택을 임대했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공격에 대비해 일부러 다른 이웃과 동떨어져 있는 집을 선택했고 담장 안쪽으로 다인코프에서 지원받은 지뢰로 덮어버렸다.

사실 권총수의 죽음으로 가장 피해를 보고 있는 집단은 다인코프였다.

사막의 흑새가 사망했다는 소식에 기고만장 할 만큼 탄탄하게 상승하던 주식이 연일 약세를 면치 못하면서 지난 한 달 여 동안 약 10억 달러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러나 CIA라는 절대적 고객을 두고 있는 다인코프로서는 어떤 반응도 보일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만 끓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비렌드라와 나카야마가 자청해서 다인코프 입사를 자원했다.

능력이 검증된 특급 용병 두 명이 제 발로 찾아오자 꿩대신 닭 정도로 위로는 되었지만 여전히 권총수에 대한 아쉬움은 크다.

기존의 오민철까지 셋이면 권총수의 절반은 된다는 것이 회사 입장이지만 카이로 지사장 버홀터는 입맛을 다셨다.

권총수는 권총수이다.

누구도 그와 같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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