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2화: 죽으라는 법은 없다(2)
권총수는 놀라지 않았다.
혜광심어라는 불가 최고의 전음이다.
“세존께서는 네가 자비를 잃지 않으면 결코 나도 너에게서 자비를 놓지 않겠다고 했느니라. 너의 깊은 인(仁)과 의(義)의 불심을 보신 석가께서 널 다시 세상에 보내고자 살렸느니라.”
권총수는 빙긋 웃었다.
과연 내가 사람을 죽일 때 인과 의를 갖췄었는지 돌아봐도 그다지 부드러웠던 편은 아니었다.
물론 필요 없는 살인은 자제했으나 가끔은 본의 아니게 방아쇠를 당긴 일도 허다했다.
“걱정 말거라. 세존께서는 너의 마음을 보느니라”
권총수의 속을 들여다보듯 말을 이었다.
“아프냐?”
“예!”
“아플 것이다. 지금 옷을 벗고 만혈녹천(萬穴綠泉)으로 들어가거라.”
만혈녹천이라는 말에 권총수의 눈이 커졌다.
공공선사가 남긴 서신에 보면 강호에는 삼보 삼병(三寶三兵)이 있다고 했다.
삼보는 만년설삼과 공청석유, 그리고 만혈녹천이다.
삼병은 간장과 막사, 그리고 용천검을 이른다.
자신은 이미 공청석유를 한 번 만나는 인연을 맺었다.
“너의 몸은 만혈녹천이 아니면 결코 치료가 되지 않을 만큼 부서져 있느니라.”
일 만 가지의 혈맥을 치료한다고 하여 만혈녹천이라 부른다.
만 개의 혈맥이란 강호무사의 어떤 상처도 말끔하게 회복시킨다는 뜻이었다.
스으윽!
권총수는 옷을 벗고 들어갔다.
정말 뜨겁다.
불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듯 했지만 설마 죽겠는가 싶어 이를 악물었다.
죽을 곳이라면 자신의 사부가 들어가라고 할 리가 없다.
대력금강심법을 운용하며 만혈녹천의 기운을 흡수 하려고 노력했지만 툭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떨구었다.
너무 뜨거워 기절한 것이다.
그러나 지독한 뜨거움은 기절에서 금방 깨어나게 하는 효과도 가져다주었다.
다시 눈을 뜬 권총수는 대력금강심법을 운용했다.
“욱!”
일 분도 버티지 못하고 또다시 기절했다.
쇠가 담금질 되듯 권총수는 기절했다 깨어나고 다시 기절하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뜨거움에 대한 면역성 때문인지 조금씩 버티는 시간이 길어졌다.
처음에는 30초를 넘기지 못하고 기절했는데 이제는 1시간 정도까지 참아 내고 있었다.
“총수야.”
그동안 아무 말이 없던 공공선사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인과 의를 절대 잊지 말거라. 사람이 인과 의를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이니라.”
그것이 끝이었다.
두 번 다시 공공선사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제 기절은 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만혈녹천에 앉아 운기조식 하며 내상 치료에 전념했다.
몸이 점차 가벼워졌고, 끼니해결도 의외로 간단했다.
동굴 안에는 여러 가지 벌레들이 살고 있었으며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굶주림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음지에서 자라는 이끼 따위도 괜찮은 식량이 되었다.
햇볕이 없으므로 시간 흐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온 몸이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흠!’
이곳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이마가 찌푸려졌다.
몸이 나아가면서 걱정거리 하나가 생긴 것이다.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출구(出口)를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서둘지 말자’
몸이 회복되자 급해지고 있었다.
빨리 나아가 자신에게 방아쇠를 당긴 청소부를 찾고 싶어진다.
‘차분하자!’
급하면 놓치는 것이 많다.
권총수는 운기요상을 하며 다급해진 마음을 조금씩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동굴은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권총수는 탐사하듯 동굴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딘가 길은 있을 것이다’
공공선사는 삶은 흐름(流)이고 결(決)이라고 했다.
무리하지 말고 모든 걸 섭리에 맞추고 따르라는 뜻이다.
권총수는 만혈녹천에 앉아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시간이 나면 동굴을 살폈다.
헝클어진 나무뿌리처럼 동굴은 얽히고 설켰다.
그러다보니 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기기도 했지만 자신을 갖기 위해 노력했다.
내상은 거의 나은 듯 보인다.
기경팔맥을 흐르는 내기가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살아 꿈틀거린다.
온 몸에 힘이 넘쳤다.
‘내공이 오른건가’
아주 오랜만에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운기에서 깨어난 권총수는 다시 출구를 찾아 나섰다.
처음과 달리 한 번 씩 지나갔거나 살핀 동굴에는 나름대로 표식을 해 놓아 두 번 겹치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출구는 좀체 찾을 수가 없었고 심법으로 안정되었던 마음이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흐음!”
운기에서 깨어났다.
잠시 복잡하게 흐트러지던 마음이 한결 안정된다.
자리에서 일어난 권총수는 또다시 동굴 조사에 나섰다.
‘피곤한 동굴이군’
한줄기 나무에서 여러 개의 가지가 뻗어 나가 듯 동굴은 계속 가지를 만들며 불어난다.
어쩔 수 없다.
길을 모르는 이상 일일이 다녀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표식을 하기 시작했다.
헷갈리지 않게 중간 중간에 손바닥 자국을 만들어 놓았다.
잠에서 깨면 길 찾는 것이 하루의 전부였다.
밤인지 낮인지 알 수 없는 동굴에서 살려는 권총수와 거미줄처럼 퍼져나간 동굴 사이에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갈수록 통로가 좁아졌다.
울퉁불퉁한 바닥은 어디선가 흘러 들어온 물기로 미끄럽고 전후좌우에서 뻗어 나온 종유석은 송곳이다.
갈수록 좁아지는 동굴을 보며 그만 갈까 하다 일반인들은 도저히 좁아 들어갈 수 없는 공간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축골신공이다.
골격을 축소하여 좁은 공간으로 빠져나가는 무공이지만 특별한 초식이 있는 건 아니다.
내공이 반박귀진 이상으로 올라야 펼칠 수 있는 무공이다.
마치 뱀이 수풀 사이를 미끄러지듯 빠지듯이 권총수는 종유석과 용암이 흘러내리다 굳은 거대한 기둥 사이를 지나갔다.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느낌을 받으며 좁은 틈새를 물처럼 타고 넘어갔다.
양들이 지나가면 그나마 남은 몇 포기 마른풀까지 깡그리 사라진다.
목동으로 보이는 소년은 커다란 대추야자나무 아래 앉아 풀피리를 불고 있었다.
대추야자나무 잎을 뜯어 10센티 길이로 자른 뒤 양 손가락 사이에 끼고 힘껏 입 바람을 넣으면 소리가 나는데 어떤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삐이이 하는 소리만 연거푸 내고 있었다.
조금 불다보면 이파리에 균열이 생겨 헛바람이 나오므로 버리고 다시 잎사귀를 잘라 불었다.
소년의 발 앞에는 그가 만들어 불렀던 풀피리 잎사귀 20여개가 떨어져 있었다.
멈칫!
피리를 불던 소년의 눈이 빛났다.
쿠쿵!
쿵!
높은 곳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분명했다.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멀지 않은 곳에 아주 먼 옛날 강의 침식으로 형성된 거대한 협곡이 있는데 소리는 그곳에서 들렸다.
갈수록 소리가 커졌고 소년은 더욱 흥미를 느꼈다.
‘노홀라이가 울면 붉은 해가 떠오를 것이다’
계곡 이름이 노홀라이다.
오래전부터 노홀라이 계곡에 흘러오는 전설이다.
계곡이 울면 붉은 해가 떠오른다고 했다.
쿵쿵 소리를 계곡이 운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소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려갔다.
“으헉!”
계곡 끄트머리에 선 소년은 소스라쳤다.
거대한 돌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맞은편 절벽 한 부분이 무너지고 있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계곡이 뚫리고 있었는데 사실 노홀라이 계곡 곳곳에는 사람의 손길이 더해진 동굴과 자연이 만들어낸 천연동굴이 수두룩했다.
오래전부터 시아파에 쫓긴 수니파인들과 발루치족들이 파 놓은 동굴들이다.
“어엇!”
소년은 소스라쳤는데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동굴 속에서 사람이 나왔다’
무덤 속에서 살아 나온 것 같은 모습에 소년의 얼굴에 흥미롭기도 하면서 두려움이 스쳤다.
계속 틈을 비집듯 빠져나오다 보니 빛이 보였다.
그건 밖으로 통할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너무 비좁아 축골신공으로도 빠져나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해 동굴 벽을 부순 것이다.
계곡의 폭은 그다지 넓지 않아 단숨에 땅을 박찬 권총수는 한 번에 소년이 서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털썩!
소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맞은편 절벽에 있던 권총수가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오자 두려움에 떨었다.
“살려주세요.”
권총수는 환하게 웃었다.
“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내가 왜 널 죽인단 말이냐?”
“정말이죠?”
권총수는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었다.
“여긴 어디냐?”
온통 바위와 거친 들판으로 이뤄진 사막이다.
“칼루이에요.”
권총수의 눈이 빛났다.
칼루이는 이란에서 루트 사막 다음으로 큰 카비르 사막에 위치한 곳인데 문제는 이곳이 파키스탄 국경과 가깝다는 것이다.
파키스탄과 가깝다는 생각에 잠깐 표정이 밝아졌으나 이내 표정이 어두워지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한 소년이 떠올랐다.
이제 열다섯, 세상을 알기에는 아직 이르고 근심과 걱정을 모르고 살아갈 나이였다.
자신의 부족이 숱한 압박과 고난을 겪는데도 소년의 얼굴은 환했고 어떤 면에서는 짓궂기까지 했다.
열다섯이면 담배를 피워도 되는 나이라고 우겼고 할아버지가 죽었는데도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짧게 만났지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사람이다.
자신을 위해 죽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권총수는 우울한 낯빛을 했다.
워낙 표정이 어둡고 슬퍼 보였는지 잔뜩 경계를 하고 있던 소년이 물었다.
“아저씨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아니죠?”
권총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급적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이름 좀 물어봐도 될까?”
“아메드.”
“아메드 좋은 이름이구나. 몇 살이니?”
“열다섯요!”
“아아!”
“왜 그러세요?”
권총수가 신음을 흘리자 아메드의 눈이 커졌다.
“할아버지와 단둘이 사니?”
아메드의 눈이 커졌다.
“어 그걸 어떻게 아세요?”
아딜이 생각나서 그냥 물어 본 것 뿐이었다.
“아메드!”
“네 아저씨.”
“아...아니다. 건강 하거라. 아프지 말고.”
아딜과 아자드 생각에 아메드 집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혹시라도 피해를 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한 도시 테헤란이나 오아시스와 푸른 강물이 흐르는 옥토에서 살줄 몰라 할아버지와 이런 황량하고 척박한 사막에서 양을 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들 또한 이란정부의 눈에는 가시 같은 부족일지 모르고 만약 자신으로 인해 어떤 피해가 간다면 안 될 일이었다.
권총수는 아메드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몸을 날렸다.
“아저씨 이름은 뭐에요?”
“흑새, 사막의 흑새란다.”
그러고는 권총수의 모습은 아메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막의 흑새.”
아메드의 눈이 커졌다.
한 달 전 텔아브에 사는 발루치족 마을이 불에 타고 몰살당한 일이 있었다.
하메네이를 암살하고 도주하던 사막의 흑새를 도와줬다는 것이 이유였다.
사람은 물론 키우는 양들까지 단 한 마리도 살려 두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사막의 흑새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원수 하메네이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다다다다!
아메드는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아메드가 뛰자 이곳저곳에서 흩어져 마른 풀을 뜯던 양들이 울음소리를 내면서 따라가기 시작했다.
아메드가 앞장서고 그 뒤를 50여 마리의 양들이 쫓아가는 기이한 풍경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