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7화: 히말라야 사나이(2)
병원 밖으로 걸어 나온 권총수는 벤치에 앉았다.
한밤중의 병원은 어두웠으나 오른쪽 건물 끝에 있는 응급실만 환히 불을 켜고 있었다.
딸칵!
말보로 레드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최선을 다했다.
이제 남은 건 살려는 운과 죽으려는 운 중에서 어느 것이 강하느냐에 달려 있다.
둘 중 이기는 쪽으로 비렌드라의 미래는 결정될 것이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가 걸려왔다. 오민철이다.
“쪽바리 왔다.”
“나카야마 형이? 아니 왜 온거야. 다른 보안업체에 취직한 거야?”
“복수하러 왔대. 외인부대 동기들.”
“어떻게 알고?”
“용병 짬밥이 몇 그릇인데 연락해줄 무전병(아는 사람) 한 명 없겠냐. 끝난 거야?”
“끝났는데.”
“어려울 것 같아?”
“이럴 때 형은 어떻게 해? 간절히 원하는 바가 있을 때 말이야.”
“난 무조건 관세음보살이지. 죽어라 비는 것 말고는 없어.”
권총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끊었다.
‘그래 비는 것 말고는 없겠군’
권총수는 흘긋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카이로의 밤 하늘은 별천지였다.
‘나도 저 분한테 기도 한 번 해볼까’
사실 비렌드라를 더 악착같이 살리고 싶은 이유가 있다.
KAS 시절 사격 훈련을 끝내고 생활관으로 들어왔는데 편지지 한 장이 자신의 침상에 떨어져 있었다.
자신은 1층이고 비렌드라 침상은 2층이었는데 아마 놓아둔 편지가 어떻게 바람에 흘려 떨어진 것 같았다.
그냥 올려놓을까 하다 생각 없이 내용을 보던 권총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편지는 네팔 교육부로부터 온 것이었다.
비렌드라가 기부한 돈으로 세 곳의 학교를 지었다며 자세한 진행 상황을 보고하는 내용들이었다.
너무 놀라 다시 보았지만 분명히 120만 달러를 기부했다는 액수까지 자세히 나와 있었다.
120만 달러면 KAS에서 받은 2년 연봉의 약 90프로를 조국 네팔의 교육사업에 기부 한 것이다.
물론 승전수당과 보너스등이 적지 않아 생활하는 데는 전혀 모자람은 없겠지만 워낙 충격적인 사실에 한동안 비렌드라를 마주 보지 못했다.
‘교육이 부국강병으로 가는 길이다’
반다리 네팔 대통령은 어딜 가든 큰 소리로 외쳐 말했다.
히말라야라는 거대한 산맥으로 인해 국토가 산으로 이뤄졌고 해발 3,000미터 고봉과 협곡에 마을을 이루고 살다보니 아이들 교육은 여러 가지로 많은 장애를 안고 있었다.
학교도 턱 없이 부족했지만 그중 가장 힘든 일이 학교까지의 거리였다.
워낙 멀다 보니 날마다 등하교를 시킬 수는 없었다.
제 시간에 보내려면 그 전날 출발하거나 아니면 새벽 일찍 집에서 떠나야 했다.
거기에 여름철 우기라도 되면 길은 무조건 막혔다.
아이들이 가장 수월하게 등하교를 할 수 있는 안전한 방법은 학교가 아이들 곁으로 찾아가는 것이었다.
즉 학생들을 기숙사에 모으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자면 막대한 예산이 필요했다.
그런데 비렌드라가 세 곳의 학교와 기숙사 건립비용을 지원한 것이다.
사람의 목숨은 똑같이 귀하다고 했다.
그러나 더 귀한 목숨은 있다.
바로 비렌드라처럼 자선을 자신의 일처럼 행하는 사람들의 목숨은 분명 더 가치와 무게가 있는 것이다.
물론 권총수 본인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어쨌든 비렌드라를 기어이 살리고 싶은 것이다.
아침 일찍 근무교대가 이뤄졌다.
야간 간호사들로부터 환자들 상태에 대한 보고를 받은 교대 간호사들은 수고했다며 퇴근하는 동료들을 미소로 배웅했다.
중환자실 두 명의 간호사들은 컴퓨터 앞에 앉아 간단한 서류 정리를 한 뒤 일일이 환자들 상태 점검에 나섰다.
라일라는 환자들의 혈압과 맥박을 재며 링겔 상태도 확인했다.
멈칫!
마지막으로 비렌드라 침대로 다가간 간호사 라일라가 놀란 눈을 했다.
“나디아 이리로 좀 와봐.”
“네 선생님!”
나디아가 쪼르르 다가왔다.
“이 환자 좀 봐. 어제 밤 상황은 무척 위험했거든, 여기 봐봐 맥박 심장박동 혈압 모두 수시로 흔들린다고 쓰여 있잖아? 그런데 지금은 지극히 정상이야.”
나디아가 맥박 심장 박동수를 나타내는 기기를 바라보며 놀라는 얼굴을 했다.
혈압 또한 정상이다.
“이럴 리가 없는데, 쑤아드에게 물어볼게요.”
고개를 갸웃하던 나디아는 재빨리 자신의 핸드폰으로 조금 전 퇴근한 야간근무 간호사 쑤아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쑤아드, H-13 환자 왜 이래?”
“어때서? 설마 죽은 거야? 죽는다고 이상할 것 없는 환자잖아.”
“그게 아니라 깨어나지만 않았을 뿐 모든 것이 정상이야.”
“무슨 말이야? 어떻게 정상이 될 수가 있어.”
“아무튼 알았어. 어른 가서 쉬어.”
전화를 끊은 나디아는 다시 다가왔다.
“교대 전까지는 어제 그대로였나 봐요. 그럴 리 없다고 무척 놀라는데요.”
라일라는 몇 번을 살피고 또 체크를 해봐도 정상이었다.
기계가 잘못 됐을 리는 없다.
라일라는 손목시계를 보았는데 아침 8시30분이다.
“박사님 출근 하셨겠지?”
라일라는 재빨리 문을 열고 사라졌다.
혼자 남은 나디아는 산소 호흡기를 벗겨 봤다.
모든 것이 정상이라면 자가 호흡도 가능해야 했기 때문인데, 나디아는 소스라쳤다.
산소 호흡기를 벗기자마자 비렌드라가 갑자기 눈을 떠버린 것이다.
“악!”
나디아는 혼비백산하며 주저앉았다.
와르르!
손에 들고 있던 서류와 핸드폰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중환자실에 들어와서부터 지금까지 쭈욱 지켜본 환자였다.
의사들 모두 생존 가능성 제로를 장담할 만큼 시체나 마찬가지였는데 갑자기 눈을 뜬 것이다.
"제가 놀라게 했나요? 미안합니다."
“으아악!”
나디아가 바닥을 뒹굴며 도망쳤다.
고개를 드는데 비렌드라가 홀라당 벗은 상체를 드러낸 채 내려다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디아는 재빨리 비상벨을 울렸다.
퍼퍽!
미친 듯 벨을 주먹으로 치기까지 하며 보안요원을 불렀다.
그것도 모자라 나디아는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여기요. 여기요.”
복도를 향해 소리쳤다.
때마침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두 명의 보안요원이 고개를 돌렸다.
“환...환자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나디아를 보며 두 요원을 득달같이 달려왔다.
꽈당!
보안요원 두 명이 뛰어들었고 뒤따라 들어온 나디아는 비렌드라를 가리켰다.
“저저...저기!”
보안요원들 역시 깜짝 놀라며 다가갔다.
시트로 하체만 가린 채 비렌드라가 결가부좌하고 있었다.
“옷 좀 주시겠소. 내가 여기 올 때 알몸으로 오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자 보안요원중 한 명이 중환자실에 실려 들어온 환자들 의복과 소지품이 보관된 탈의실을 가기 위해 문을 나섰다.
“못 입어요. 보관 해 놓긴 했는데 엉망으로 찢어지고 피가 범벅이 되었어요.”
비렌드라는 나디아를 향해 말했다.
“환자복이라도 한 벌 주시죠.”
나디아가 재빨리 한쪽에 깨끗하게 보관된 환자복 상하의를 가져다주었다.
비렌드라는 침대에 앉아 환자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거칠게 문이 열리며 뛰어나갔던 라일라가 돌아왔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뒤를 따라 담당의로 보이는 뚱뚱한 의사가 나타났는데 어느새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결가부좌하고 있는 비렌드라를 발견하더니 눈이 커졌다.
꾸울꺽!
의사는 말문이 막힌 듯 한동안 입을 열어 말하지 못했다.
의사는 주춤 거리며 다가와서 다시 한 번 살폈다.
“비렌드라씨.”
“예!”
“지금 여기가 어딘지 아시겠습니까?”
“아마 제가 의식을 잃고 이곳 병원으로 실려 온 모양이군요?”
“맞습니다. 당시 병원에 들어올 때에는 의식이 없었죠. 신체의 모든 기능이 거의 정지 직전이었습니다.”
비렌드라는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자신도 몸이 조금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여기 실려온 지 며칠 되신지 아십니까?”
“글쎄요.”
“맞습니다. 당연히 모르실 겁니다. 정확히 오늘로 27일 되었습니다. 어제 내가 퇴근할 때까지만 해도 비렌드라씨는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밤 사이에 알라 신께서 다녀갔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군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비렌드라 또한 알지 못했으므로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혈압 다시 체크해 봐요.”
라디아가 재빨리 팔에 혈압측정기를 끼우고 압력기를 눌렀다.
숫자가 빠르게 치솟더니 동작을 멈추자 급속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깜박거리는 숫자를 보던 라일라가 말했다.
“정상입니다.”
의사는 비렌드라의 심장박동을 다시 체크하기 위해 두 개의 호스를 붙였다.
“숨을 고르게 쉬고 반드시 누우세요.”
비렌드라는 똑바로 누웠고 한참을 보던 의사가 호스를 떼어냈다.
“됐습니다. 정상입니다. 퇴원하시겠습니까? 하지만 혹시 모르니 2, 3일 입원하면서 좀 더 경과를 보겠습니까?”
거의 발생하지 않는 일이지만 일시적인 현상일지 모르니 잠시 일반 병실에서 기다려 보라는 뜻이었다.
“퇴원하고 싶군요.”
“그럴테죠. 좋습니다. 퇴원을 허락합니다.”
그때 아침 중환자 면회시간이 되면서 보호복을 입은 가족들이 들어섰다.
환자 한 명당 한 명씩의 보호자만 면회가 가능했다.
그때 비렌드라쪽을 향해 다가오는 흰색의 보호복을 입은 사내가 있었다.
비렌드라는 소스라쳤다.
마스크를 했지만 걸어오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밝고 맑다.
세상에서 자신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다.
이미 마음속으로 자신의 몸이 갑자기 나아진 것이 그 사내가 왔다가지 않았을까 하며 생각해보고 있었다.
의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급작스런 차도는 오로지 내공을 이용한 치료 말고는 없다.
권총수는 멈춰 서서는 비렌드라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비렌드라 역시 입술을 바르르 떨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 간호사들 시선은 온통 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기적이라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를 만나러 온 보호자가 흔하고 흔한 광경인 손을 잡는다거나 깨어나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다.
“옷을 가지고 왔는데 중환자실이어서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권초수의 말에 비렌드라는 아무런 말도 않고 침대를 내려왔다.
중환자실을 나온 비렌드라는 오민철과 나카야마를 발견하더니 눈을 잠깐 감았다 떴다.
“민철, 나카야마.”
힘없는 목소리로 불렀다.
두 사람은 천천히 다가와 뜨겁게 끌어안았다.
“살았지. 분명히 히말라야 눈 사나이는 살아 난거지?”
나카야마가 끌어안고 소리쳤다.
“우와아! 살았어. 역시 히말라야 눈 사나이야. 만세에에!”
나카야마가 질러내는 소리에 복도를 오가던 사람들이 놀라 돌아보았다.
와락!
다시 한 번 힘껏 끌어안은 비렌드라는 눈을 감아 버렸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딱 한 번 운적이 있었다.
그날 처음으로 스승에게 매를 맞았다.
너희 엄마는 없다.
이 늙은이가 탁발을 나갔다가 버려진 널 주워 키웠다.
알겠느냐.
너의 부모는 없으니 더 이상 부르지도 말고 찾지도 말거라.
처음에는 거짓말인줄 알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성장하면서 사실임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었다.
‘앞으로는 절대 울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냥 나왔고 내버려 두기로 했다.
지독하게 자신을 옥죄는 삶이었지만, 눈물에게도 오늘 만큼은 마음껏 흐를 수 있는 자유를 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