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4화: 바람의 파이터(3)
번쩍 하는가 싶었는데 면전이다.
비렌드라는 위험을 직감하고 연속으로 주먹을 뻗었다.
‘나보다 힘이 센 자를 만났을 때는 어떻게 상대 하는 것이 좋은 지요?’
비렌드라는 스승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뼈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훅 불면 날아갈 것 같던 스승이 말했다.
‘피하면 안 된다. 나보다 높을수록 마주 부딪쳐 나가야 한다. 뒤로 밀려나고 소극적으로 나갈수록 상대를 즐겁게 해 주는 일이지’
아롱바는 분명 강하다.
그렇다면 스승이 가르쳐준 대로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최선을 다했지만 이길 수 없을 땐 죽으면 된다.
내 삶이 거기까지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움찔!
어느 한순간 자신의 주먹이 더 이상 앞으로 뻗지 못함을 느꼈다.
그건 상대의 주먹이 단순하지 않다는 뜻인데 강력한 강기(剛氣)를 동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공이 심후한 사람이 주먹을 뻗으면 단순히 주먹만 날아오지 않고 주먹 근처에 단단한 무형의 기운이 같이 온다.
주먹이므로 권기(拳氣)라고 불러야 맞다.
주먹을 피했는데도 찢어지고 부상을 입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권기 때문인 것이다.
비켜 맞아도 즉사 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비렌드라의 주먹은 아롱바의 권기에 막혀 제대로 뻗지 못하면서 힘을 잃었다.
빠아악!
비렌드라가 힘차게 내 뻗었던 모든 주먹을 너무 간단히 튕겨 버리고 들어와 때리는 한 개의 주먹.
퍼억!
주먹은 정확히 가슴을 찍었다.
비렌드라는 뒤로 비틀 거리다 물러나더니 쿵 엉덩방아를 찧었다.
으웩!
참아 보려고 했지만 기어이 입을 비집고 나오는 피를 보며 비렌드라는 쓴 웃음을 지었다.
몸속이 멀미한 듯 울렁거리는 것이 온 몸의 장기에까지 강력한 타격이 가해진 것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내일 아침밥을 먹기는 틀렸다고 생각했다.
비렌드라는 다가오는 아롱바를 보며 한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이는 어려도 존경할 만큼 무게와 가치가 있는 친구였다.
‘캡틴’
갑자기 보고 싶다.
사람이 이토록 보고 싶을 때가 있을까.
죽음이 지척에 있는 탓이어서인지 더욱 권총수가 그리워진다.
‘총수, 어딨나? 나지불라 손에 죽을 뻔 했다는 나카야마와 우리 동료 둘을 구해줬다고 하던데.’
비렌드라는 헛웃음을 삼키며 비척비척 일어났다.
아롱바가 의외라는 듯 눈을 빛낸다.
비렌드라는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울 때는 배운 걸 최대한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한 수 배우겠습니다.”
모자람을 인정하니 훨씬 수월하다.
비렌드라는 환하게 웃으며 달려갔다.
***
1층으로 뛰어 올라온 권총수는 핸드폰을 눌렀다.
“형 어디야? 업타운 휴스턴으로 막 들어갔다고? 알았어 들키지 않게 조심해. 놈은 킬러라고.”
권총수는 재빨리 호텔 앞에 몰려 있는 택시를 향해 달려갔다.
911과 경찰이 출동했으나 영화제를 방해하지 않기 위한 호텔의 적절한 정보 차단과 분위기 유지로 주변은 평온했다.
“일단 업타운 쪽으로 갑시다.”
그러면서 백 달러 지폐 한 장을 주었다.
“빨리 갈수록 더 늘어날 수도 있소.”
“안전벨트 매시고 편히 앉아 계시죠.”
부우웅!
발주장을 나가는 경주마처럼 택시는 몸을 세울 수 없을 만큼 튕겨 나갔다.
호텔 주변 사람들이 택시 바퀴가 내는 굉음에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검정색 벤츠는 빨랐다.
특히 차량 운전자의 핸들 조작능력은 탁월하여 오민철은 몇 번을 놓칠 뻔 하며 가까스로 따라 붙었다.
만약 외인부대와 KAS 런던 훈련소에서 운전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놓쳤을 것이다.
‘장난 아닌데.’
운전을 보면 그 사람의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전문 훈련을 받는 카레이서 수준이다.
멈칫!
미행하던 오민철의 눈이 빛났다.
멀리 거대한 운하가 흐르고 있었다.
만안(灣岸)까지 흐르는 휴스턴 운하다.
수양버들과 잡초들이 우거진 강가로 다가가던 승용차가 멈췄다.
사내는 내리더니 차안을 향해 허리를 구부리고 한참동안 뭔가를 하는 것 같았다.
탁!
일이 끝난 듯 문을 닫았는데 승용차가 운하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기어를 조작해 놓느라 잠시 머뭇거린 모양이었다.
CCTV에 찍혔을 자신의 차량을 운하 속으로 수장 시키려는 것이다.
‘뒷 처리까지 깔끔하군’
벤츠는 깊은 운하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사내는 담배까지 한 개비 피워 물며 하연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운하를 바라보았다.
담배를 절반 정도 피웠을까 몸을 돌려 운하를 따라 걸어갔다.
오민철도 재빨리 차에서 내려 사내를 따라갔다.
백 여 미터 가까이 올라가던 사내가 걸음을 멈췄는데 숲속에 커버에 씌워진 자동차 한 대가 있었다.
사내는 커버를 벗겼는데 흰색의 랭글러 지프가 나타났다.
‘범행현장에 사용된 차량은 버리고 전혀 새로운 차로 이동한다는 건가’
부우웅!
사내는 차를 덮었던 커버를 구겨 뒷 트렁크에 싣더니 시동을 걸었다.
그때 오민철의 전화기가 진동했다.
권총수였다.
“어딘데?”
“내가 거리 찍어준 대로 왔어.”
“응! 운하 보여.”
오민철은 재빨리 자신의 차량이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권총수가 차량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빨리 차 시동 걸어. 놈이 도망가고 있어.”
그리고 오민철은 자신의 차로 달려갔다.
권총수가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고 차를 돌렸다.
그 사이 뛰어온 오민철은 재빨리 조수석에 올라 오른쪽을 가리켰다.
“저기 가는 흰색 랭글러야.”
“오케이!”
기어를 바꾸며 권총수가 차의 속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얼굴봤어?”
“제대로는 못 봤어.”
“마흔 중반 정도 됐을 거라고 하던데.”
“늙어 보이던데?”
슥!
권총수가 윗주머니에서 스카페이스에 대한 기록과 사진 한 장을 꺼냈다.
“5년 전 사진이긴 해도 젊잖아”
“이건 아니야. 머리도 희끗했고.”
“보나마나 화장했구만.”
권총수는 변장을 자신했다.
“가만, 공항으로 가는 것 같은데.”
공항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휙 하니 지나갔다.
쫓고 쫓는 두 대의 차는 주위 다른 차량들을 빠르게 추월했다.
속도계가 90마일을 넘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차 한 대가 다른 차를 따돌리며 오는 것을 본다면 미행자라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래서 눈에 띌 만큼 스피드가 빠른 차량을 미행하는 것이 제일 어렵다.
“진짜 장난 아닌데.”
속도가 100마일을 넘었다.
오민철은 흘끗 권총수를 보았는데 위험한 미행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부아아앙!
그렇게 10여분을 달렸고 창 밖으로 비행기 소리가 요란해지기 시작했다.
“맞네. 공항이야.”
권총수가 싱긋 웃었다.
랭글러는 휴스턴 공항(조지부시인터컨티넨탈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랭글러는 속도를 떨어뜨리며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권총수가 몰고 있는 포드 익스플로러 앞으로 두 대의 다른 차량이 적절한 시야 방해를 해주고 있었다.
차단기가 올라가고 권총수는 랭글러가 멈춘 곳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끼이익!
포드 익스플로러가 멈추자 차에서 막 내리던 사내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오민철의 말처럼 희끗한 머리와 얼굴의 주름은 그를 최소한 60초반으로 보이게 했다.
권총수는 차에서 내리며 웃었다.
“대단합니다. 비싼 벤츠를 물속에 쳐 박아버리다니.”
사내는 손을 움직이려 했다.
허리 뒤에 권총이 있다.
하지만 손을 움직이지 못했고 온 몸이 굳어 버렸다.
“어허! 가만 있는게 좋아요. 마혈이 제압되면 로봇도 못 움직이지.”
오민철이 싱긋 웃으며 다가와 허리 뒤에 있는 권총을 뽑아 압수했다.
“차 키도 좀 주시고.”
주머니를 뒤져 키를 찾아낸 오민철이 차 문을 열었다,
한참 차를 뒤지던 오민철이 포드 익스플로러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는 권총수를 향해 말했다.
“깨끗해.”
“그럴거야.”
오민철이 빈손으로 걸어왔다.
권총수는 담담하게 물었다.
“입은 놔뒀으니 말은 가능합니다. 코브라를 공격하는 것 까지는 매우 좋았습니다. 명불허전이라더니.”
그때 권총수를 보던 사내의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뭔가 느낀 모양이었다.
“훗훗! 이제 날 알아본 모양이군?”
“사막의 흑새?”
“날 죽이기 위해 그 먼 곳까지 걸음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덕분에 많은 내 동료들이 세상을 떠났죠.”
웃으면서 말은 했으나 덕분에 많은 동료들이 죽었다는 대목에서 목소리가 떨렸다.
그건 분노였다.
“살인청부업자가 용병시장까지 얼씬 거리면 어떡하자는 겁니까. 최소한 남의 시장을 들어오려면 양해정도는 구해야 하는 것 아니오?”
권총수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형 트렁크에 담아!”
“오케이!”
오민철이 빳빳하게 서 있는 사내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 당겼다.
“우욱! 졸라 무겁군.”
질질 끌어다 열린 트렁크 속에 쳐 박았다.
쾅!
트렁크가 닫히고 두 사람은 다시 차에 올라 주차장을 빠져 나갔다.
지이잉!
공항 주차장을 막 빠져나가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을 보던 권총수가 깜짝 놀란다.
버홀터라는 이름이 찍혔는데 다인코프 카이로 지사장이며 중동지역 총 책임자였다.
“버홀터!”
“어딘가? 뉴스를 통해 대략 무엇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네.”
멕시코 보다는 미국 쪽 언론이 쉬지 않고 장기밀매 조직 차차리토와 시날로아 카르텔 우두머리 살라자르의 죽음을 연일 특집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역시 자네는 달라. 오늘 아침 CNN 뉴스 봤나? 가장 인간이기를 거부했던 두 명의 악마가 이 땅에서 사라졌다고 하더군.”
권총수는 아무대꾸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전화하여 자신의 활약상을 늘어놓고 있는 버홀터에게서 좋지 않는 기운을 감지한 것이다.
한가히 칭찬을 위해 전화할 버홀터도 아니었다.
“운전 중입니다.”
말 끌지 말고 할 말 있으면 빨리 하라는 뜻이었다.
머뭇거리던 비홀더가 격하게 내뱉었다.
“이런 빌어먹을, 내가 왜 이런 얘길 자네에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말해보세요.”
“자네 친구들이 죽었네.”
친구라는 말에 권총수는 멈칫 했다.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자신이 친구라고 생각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
한국에는 없고 있다면 전장이다.
그중 외인부대에서 생사를 나눴던 전우들이다.
“누가 죽었습니까?”
“태국 친구.”
“피아퐁.”
“핸더슨도 있고 러시아의 붉은 군대 출신 세르게이라던가.”
권총수는 이를 깨물었다.
“그리고 누구더라. 히말라야 구르카족 출신.”
“비렌드라?”
“그는 아직 숨이 붙었긴 하지만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이라네. 자네의 KAS 동기들 상당수가 살해당했네.”
“살해당하다뇨?”
버홀터는 길게 한숨을 쉬며 앞뒤 내용을 설명했다.
아프카니스탄에 들어온 KAS 용병들과 탈레반의 교전이 일어났다.
꼬박 하룻밤을 지새우는 치열한 교전이었는데 밀고 밀리다 보니 양측 모두 본대와 연락이 두절되는 지경에 이르면서 보급지원이 끊어지고 말았다.
결국 양측은 백병전에 나섰는데 KAS 용병들이 아롱바라는 사내에게 모두 죽었다는 것이다.
“아롱바!”
드디어 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권총수 표정이 싸늘하다.
그러더니 깜빡이를 켜고 바깥차선으로 차를 빼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보시죠.”
차 빼느라 제대로 얘길 듣지 못했다.
“예!”
권총수는 가만 들었다.
AK소총으로 한 명 한 명 두들겨 패 죽였다는 말에 권총수는 심호흡을 했다.
전장에서 적은 죽여야 한다.
그러나 무장이 해제되면 그때부터는 포로가 된다.
또한 백병전이 일어나도 어느 한쪽이 일방적이 되면 당연히 포로로 사로잡는다.
설혹 항복을 표시하지 않아도 저항을 상실한 상대라면 무조건 포로다.
비렌드라는 항복을 입으로 분명하게 말했다고 했다.
탈레반이 정규군이 아니어서 국제법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하지만 항복 선언을 한 사람들을 일일이 때려죽였다는 말에 숨이 턱 하니 막힌다.
하아아아!
권총수는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길게 숨을 쉬었다.
조수석에 앉은 오민철은 상체를 콘솔박스 쪽으로 완전히 숙이고 숨죽여 흐느꼈다.
“뭘 울어. 엄마라도 죽었어?”
권총수는 퉁명스럽게 쏘아 붙이고 기어를 넣었다.
끼륵!
그리고 차는 빠르게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