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5화: 대 빙하(2)
말라버린 빙하를 오른쪽으로 끼고 산을 이동했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군락을 이루듯 깔려 있어 보통 사람들은 지나가는 것도 쉽지 않을 듯 싶었다.
자세히 살펴야 했으므로 신법을 펼칠 수는 없었다.
몸만 평소보다 가볍게 하여 움직였는데 맞은편 산을 살피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멈칫!
권총수의 눈이 빛났다.
표범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바위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맹수가 산다는 건 산이 깊다는 뜻이다.
스으으!
성큼성큼 전진하던 권총수가 또 다시 몸을 세웠다.
그의 시선은 맞은편 산을 향해 있었는데 우거진 삼목나무 사이로 시커먼 동굴이 보였다.
내공을 끌어 올렸다. 거리가 멀기도 했지만 사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주위를 좀 더 살피던 권총수가 지그시 어금니를 물었다.
맞은편 산에 많은 동굴이 눈에 띄었다.
한두 개가 아니었으므로 건너가기로 했다.
폭이 50여 미터 정도 되는 빙하를 건너야 하는데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면 아무리 빠른 신법을 펼친다고 해도 피할 수 없다.
‘가능할지 모르겠군’
잠영술이다.
빙하의 마른 바닥에 녹아드는 잠영술이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내공을 끌어올려 소림의 잠영술 금불잠(金佛潛)을 펼쳤다.
‘된다’
너른 빙하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마른 빙하 바닥으로 미세한 그림자 하나가 출렁거리며 이동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스르르르!
물결처럼, 파도처럼 울퉁불퉁한 바닥을 순식간에 건너 맞은편에 도착한 권총수는 금불잠에서 벗어났다.
100여 미터 정도 올라가자 작은 동굴을 만났다.
일체의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초상비를 펼쳤는데, 안으로부터 기척이 없음이 확인되면 곧바로 이동했다.
동굴을 살피면서 권총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천연동굴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곳곳에 사람의 흔적이 배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프카니스탄에 이슬람교가 들어오면서 먼저 들어온 불교는 무자비한 탄압을 받는다.
결국 승려들은 산속 깊이 동굴을 파고 숨었는데 그때의 흔적들이 분명했다.
당시 이슬람교인들에게 붙잡혀 죽은 승려들의 숫자는 기록할 수가 없을 만큼 많다고 전해진다.
멈칫!
일곱 번째 동굴을 살피기 위해 다가가던 권총수는 재빨리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동굴 위쪽으로 뾰쪽한 바위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데 사람들이 보였다.
사람들의 복장이 낯익다.
‘탈레반’
군복을 걸친 사람도 있고 머리에 터번이나 케피야, 동남아 이슬람국가에서 볼 수 있는 페즈를 쓴 사내들도 있었다.
스스슷!
권총수는 빠르게 올라갔다.
잠깐 사이에 백여 미터를 올라가 촛대처럼 하늘을 향해 서 있는 둥근 바위 뒤에 숨어 고개를 내밀었다.
자연의 오묘함에 그저 놀랄 뿐이다.
촘촘하게 말뚝을 박아 놓은 것 같은 10여 미터 높이의 바위기둥이 빼곡하여 미군의 드론이나 무인 항공정찰에도 절대 찍히거나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야말로 천연의 요새였다.
그때 윽 하악 하는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우두두두 하며 작은 바윗돌들이 굴러 내려왔다.
그리고 이어 들리는 웃음소리는 섬칫하기까지 했다.
비명소리와 웃음소리, 이른바 희비가 갈리는 소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좀 더 올라가보려던 권총수가 재빨리 다시 숨었다.
AK로 무장한 십여 명의 탈레반들이 세 명의 포로를 끌고 가고 있었는데 모두 검정색 복면을 했다.
포로들은 팬티만 입혀졌으며 양손이 허리 뒤로 단단히 묶여 있었는데 온몸이 빨갛다.
여기저기 살갗이 너덜거리는 걸 보면 고문을 당하며 흘린 피가 굳은 듯 보였다.
특히 얼굴은 완전히 짓이겨져 용모를 알 수 없었는데 차라리 괴물이었다.
조금 내려가자 산세가 평평해졌다.
바닥은 크고 작은 돌들이 깔렸고 주위로 관목들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었다.
“꿇어!”
퍽!
퍼어억!
탈레반들은 세 명의 포로들을 사정없이 무릎 꿇렸다.
“지금부터 찍도록.”
우두머리로 보이는 흰색 터번을 한 사내가 캠코더를 갖고 있는 탈레반에게 지시했다.
“고개 드시오. 얼굴이 찍혀야 여러분의 조국과 부모님들께서 즐거워할 것 아닙니까?”
“고개 들라고 하잖아.”
빠악!
다른 탈레반이 숙이고 있는 포로들의 얼굴을 걷어찼다.
부어오른 얼굴들이 터지며 다시 피가 흐르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얼굴이 엉망진창이었다.
권총수 역시 안력을 돋우었으나 포로들의 얼굴판별은 불가능했다.
단지 두 명은 백인이고 한 명은 아시아계로 보였는데 권총수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아무리 살펴도 오민철의 얼굴은 아니었지만 워낙 흉측하게 터지고 찢겨져 있어 단정할 수는 없었다.
“당신들은 전쟁 포로가 아니오. 아프카니스탄이라는 나라에 들어와 우리의 삶을 방해한 침략군이오. 내 말 알겠소?”
우두머리는 무릎을 꿇고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연설하듯 말했다.
“결코 억울해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침략해오는 외세를 맞아 우린 국가를 지키기 위해 방아쇠를 당기는 것 뿐입니다. 내 말에 이의 있소?”
세 포로들은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스윽!
흰색의 터번을 한 우두머리가 손을 뻗자 탈레반 하나가 대검을 가져다주었다.
“가족이나 국가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시오.”
세 사람 모두 반응이 없다.
어쩌면 말 할 힘조차 없는지도 몰랐다.
“할 말이 없다면 형을 집행 하겠소.”
우두머리는 세 명의 포로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캠코더를 갖고 있는 부하를 향해 돌아섰다.
“누구도 우리 아프카니스탄에 들어올 수 없다. 당신들은 지금 우리를 침략하고 있는 것이다. 아프카니스탄은 위대하다. 내 조국은 당신들의 놀이터가 아니다. 기억하라. 들어올 수 있다해도 결코 살아 걸어 나가지는 못할 것이다.”
우두머리는 첫 번째 사내의 뒤로 다가갔다
캠코더의 사내는 동작과 표정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밀착 접근하여 촬영했다.
“이름이 뭔가?”
“빌!”
“고향이 어딘가?”
“웨스트 미들렌즈.”
“소속"
"민간 보안업체 KAS 소속이다.”
“할 말 없는가.”
“...살려주시오. 살려줘. 엄마. 난 살고 싶어. 죽고 싶지 않아.”
사내는 참고 참았던 의지가 일순간 무너진 듯 피를 토하듯 소리치며 말을 이었다.
“총리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오. 잉글랜드 국민이 죽어가는데 언제까지 구경만 할거냐구.”
사내는 눈물까지 쏟아냈다.
죽는 것 보다 더 무서운 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이다.
우두머리 사내는 빌이란 용병의 머리채를 휘어잡더니 대검을 목에 바짝 대었다.
캠코더 사내가 한 장면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가까이 대고 찍는다.
“으아아 살고 싶어, 아아아!”
드르르륵!
바로그때 총성이 울렸다.
현장을 경계하고 있던 탈레반들이 쓰러졌다.
드륵!
마지막으로 다섯 발의 총성이 울리는 것을 끝으로 산은 금세 조용해졌다.
빌의 목을 막 베려던 우두머리 사내가 허리를 폈다.
바위를 밟고 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우두머리 사내는 고개를 돌렸는데 권총수가 M4를 들고 걸어온다.
두두두!
내려져 있던 권총수의 총구가 다시 세워지며 불을 토했다.
캠코더 사내가 권총을 뽑으려다 발각된 것이다.
퍽!
캠코더와 함께 사내는 엎어졌고 권총수는 죽은 탈레반들을 살폈다.
정확한 사격이었으나 사람일은 모른다.
툭툭 발로 차서 건드려 보기도 하고 총구로 뺨을 좌우로 돌려 살피기도 했다.
눈을 부릅뜬 채 죽은 탈레반은 총구로 눈을 감겨 주었다.
모조리 사망했다는 것을 확인한 권총수가 여전히 대검을 들고 서 있는 우두머리를 흘긋 보더니 옆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딸칵!
말로로 레드 한 개비를 피워 물던 권총수가 휙 하며 재빨리 바위 아래로 엎드려 산위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드르르르!
총소리를 듣고 내려오던 탈레반들이 모조리 나뒹굴었다.
탕!
드륵!
총소리가 울릴 때마다 탈레반은 죽었다.
여러 명이 오는데도 마구 잡이로 갈기지 않고 정확한 조준과 집중사격으로 제압하는 권총수의 사격은 신기였다.
우두머리 역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팟!
우두머리 사내가 눈을 빛낸다.
버려진 총알 없이 정확히 사람의 몸에 쑤셔 넣을 수 있는 사내는 한 명 뿐이다.
‘사막의 흑새’
권총수는 담배를 문 채 일어났다.
바위와 나무 아래 총에 맞아 죽은 탈레반의 시신들이 너절하다.
잠시 산 위를 바라보던 권총수가 돌아섰는데 우두머리의 잇새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건 절망이었다.
근접교전에서 확인사살은 절대적이다.
그런데 권총수는 조금 전에는 꼼꼼하게 살폈으나 지금 교전에서는 내버려 두었다.
그건 자신의 사격이 전혀 빈틈이 없었다고 자신하는 행동이었다.
후우!
마지막 담배를 빨고 꽁초를 버린 권총수가 사내들 뒤로 돌아가 팔목을 묶은 노끈을 잘라 버렸다.
슥!
스윽!
나일론 끈이기 때문에 조금만 내공을 끌어 올렸는데도 쉽게 끊어졌다.
이제 남은 사람은 오른쪽 맨 끝의 동양계 사내다.
권총수는 길게 한숨을 쉬었는데 무척 떨리는 눈으로 사내의 뒷모습을 보았다.
다가가야 하는데 발이 떼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가야한다.
권총수는 동양계 사내 뒤로 다가갔다.
스르륵!
오성의 삼매진화에 노끈이 녹아내린다.
손이 풀리자 사내는 흐흑 하면서 털썩 주저앉았다.
사내는 양손으로 땅바닥을 짚더니 어깨를 들썩 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터져 나오는 통곡을 애써 눌러 참는 듯 끅끅 소리만 낸다.
누구라도 죽음 앞에서 살아나면 울 것이다.
죽었다고 여겼는데 살아난 것이다.
너무 우그러진 얼굴은 도무지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탁탁!
어깨를 다독였다.
“우시오. 때로는 우는 것도 괜찮습니다.”
“엉엉!”
사내는 급기야 대성통곡을 했다.
홱!
몸을 돌리려던 권총수가 깜짝 놀랐다.
권총수가 돌아선 건 목소리가 낯익었기 때문이었다.
“캡틴.”
권총수는 다시 쭈그리고 앉았다.
“설마 나카야마 형?”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우라질! 나카야마, 정말 나카야마 형 맞아?”
와락!
나카야마는 그대로 권총수의 품에 쓰러지며 안겼다.
“으항항항!”
나카야마는 대성통곡을 했다.
권총수는 나카야마를 끌어안았는데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뉴스를 통해 KAS 용병들도 아프카니스탄에 들어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장소에서, 죽기 직전의 나카야마를 만나게 될 줄은 정녕 몰랐다.
“나카야마.”
“캡틴!”
나카야마가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나카야마의 옛 흔적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불가능하다.
그만큼 얼굴이 엉망인데다 왼쪽 귀는 통째 날아가 버리고 보이지도 않았다.
“살고 싶었어. 정말 이제 죽는구나 했다고, 으아아아아앙!”
울음에 한이 맺힌 사람처럼 소리쳐 운다.
권총수는 침을 꿀꺽 삼키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절벽 위에 있던 산양들이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놀란 듯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된 듯 나카야마는 딸꾹질만 했다.
“회사에서는?”
“몰라.”
“모르다니?”
나카야마가 고개를 돌려 흰색 터번을 쓴 우두머리를 바라보았다.
“별말이 없는 것이 회사에서 우리에 대한 어떤 준비나 구출 계획 따위는 세우지 않은 것 같아.”
우두머리를 바라본 건 내 말이 맞느냐는 질문이었다.
붙잡혀 있는 동안 회사가 어떤 대화나 거래를 위해 사람을 보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권총수의 눈이 이글거렸다.
철판도 녹여 버릴 것 같은 분노의 눈빛에 나카야마는 딸꾹질을 참으며 말했다.
“아무리 용병회사라고.”
무척 서운한 모양이었다.
계약서에 포로가 되거나 적의 수중에 떨어질 때 회사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내용이 강하게 강조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용병이 위험에 빠졌는데 나몰라라하는 보안업체는 없었다.
최소한 구출을 위한 성의는 보인 것이다.
그런데 나카야마의 말을 빌리면 KAS는 접촉도 해보려고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