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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221화 (221/651)

제221화: 마약의 술잔(1)

톱니바퀴처럼 오돌토돌한 가는 반지였는데 18K였다.

부패해가는 손가락이기 때문에 반지는 쉽게 빠졌다.

권총수는 손가락으로 울퉁불퉁 돌기된 면을 만지며 하나 둘 셋 숫자를 세고 있었다.

돌기는 모두 열 개였다.

‘라이스!’

어느 날 아침 운기조식을 끝내고 2층으로 올라간 권총수는 한사람을 보았다.

라이스가 일어나 무릎을 꿇고 조용히 중얼 거렸다.

스님이 팔에 끼고 있는 염주를 돌리 듯 왼손 엄지에 낀 반지를 돌리면서 기도하는 라이스였다.

권총수는 누구보다도 라이스 왼손 검지에 끼어진 반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어느 손에 끼우든지 상관은 없지만 오른손 검지에 끼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톨릭에서 영세를 받은 사람은 그 반지를 끼는 자격이 주어지는데 흔히 묵주반지로 불린다.

불쑥 튀어나온 매듭 같은 것이 열 개가 있는데 엄지로 그걸 돌리며 기도를 하는 것이다.

라이스는 죽지 않고 무사히 근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며 매일 아침 묵주기도를 바친 것이었다.

권총수는 반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시 움직였다.

‘맙소사’

4미터 전방에 반으로 갈라진 사람의 머리가 있었다.

마치 칼로 두부를 잘라 놓은 듯 한 머리는 한쪽 얼굴만 보여주고 있었는데 권총수는 머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 볼 수 있었다.

틈만 나면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의 이 멋진 세상에서( What A Wonderful World )를 멋들어지게 불러 젖히던 맥케인이다.

남부 뉴 올리언즈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재즈 가수가 되려고 했지만 끝내 뜻을 접어야 했던 친구였다.

권총수는 흙을 파고 맥케인의 반쪽 머리를 묻어주려다 멈칫했다.

맥케인은 불교신자다.

그중 티벳쪽 라마교 신자다.

우주에 충만한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가 충만하길 소원한다는 내용의 옴마니 밧메 홈을 중얼 거린다.

권총수는 그냥 지나쳤다.

그들은 죽으면 화장을 하지만 육신을 독수리에게 선물하여 보시하는 이른 바 천장(天葬)도 환생과 극락왕생의 큰 길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대로 두기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깨진 수통, 피 묻은 옷자락, 탈레반이 미처 회수하지 못한 듯 떨어진 탄창이 보였다.

또다시 올라가던 권총수의 눈이 빛났다.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구부렸는데 바위틈으로 핸드폰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덜덜덜!

허리를 구부려 핸드폰을 쥔 권총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폭발 와중에 주인의 몸에서 튕겨 나온 듯 보였는데 크게 파손된 흔적이 없었다.

한참동안 핸드폰을 이모저모 살피던 권총수는 눈을 감아 버렸다.

눈을 감고 핸드폰의 생김새와 바탕 화면이 무엇인지 그려보라고 하면 정확하게 그릴 수 있다.

비밀 번호도 알고 갤러리에 가장 많이 저장된 사진이 누군지도 알고 있었다.

풀썩!

권총수는 급기야 주저앉고 말았다.

‘속단 하기에는 이르다’

팀원들 전부가 애플 것을 사용하고 동일 모델도 많다.

아직 켜보지 않았으므로 오민철의 것이라고 단정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멈추고 싶다.

누군 것인지 모르게 넘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한편으로는 확인해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시작 버튼을 누를 자신이 없다.

만약 오민철의 것이라면, 생각만 해도 숨이 멈출 것 같았다.

‘성모님’

권총수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 거리고 말았다.

성당을 다녔으나 아직까지 한 번도 성모님을 불러보지 않았다.

외인부대에 들어와 전장을 누비면서 가끔은, 아주 가끔 죽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예수님에게 한 적은 없지만 그를 낳고 뭇 신도들로부터 성모로 추앙받은 마리아를 불러보긴 오늘이 처음이었다.

밧데리가 방전되어 핸드폰이 켜지지 않았다.

먹통인 핸드폰이 이토록 감사하고 좋은 것인지 미처 몰랐다.

밧데리가 완전히 방전되어버린 핸드폰이 아름답기까지 했다.

부우욱!

처음과 달리 밧데리가 없다는 것을 아는 까닭인지 이번에는 자신있게 시작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어떤 반응도 나타나지 않는다.

권총수는 다시 한 번 가슴을 쓸어 내리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마을은 어둠에 잠겼다.

밤이 되면 절대 불을 켜지 않는다.

낮에는 어쩔 수 없지만 괜히 불을 켜서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알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산속이기 때문에 양귀비를 재배하는 농민들이 살고 있다고 판단 할 수도 있었다.

지금은 야간 단속이 없어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드론과 야시경을 이용하면서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갈아엎었었다.

“여기군!”

양귀비 밭 사이로 난 길을 거슬로 올라가던 권총수의 걸음이 멈춰졌다.

마을길도 엄청난 살육전이 벌어졌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아직까지도 잔해물들이 널려 있었다.

그중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어둠속에서도 분명하게 보이는 핏자국들이었다.

총상은 지혈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숨을 거두어 시체가 굳어지기 전까지는 피가 계속 흘러내리는 것이다.

당시의 참상은 길 여기저기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고 일부는 밭으로 뛰어든 듯 양귀비들이 쓰러져 있었다.

은폐물은 있으나 직사화기인 총을 피할 수 있는 엄폐물 하나 없는 마을 길 한가운데서 기습을 받으면 죽는 것 말고는 대책이란 없다.

완벽하게 걸렸다.

‘두 갈래 길로 나눠 수색 정찰을 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일반적인 수색정찰은 인원이 몇 명이든 단일대오를 형성한다. 하지만 어느 지점에 위험이 상존할 가능성이 높다고 확신 하게 되면 정찰 동선을 두 군데로 나눈다.

정찰대는 분산하여 적의 이목을 흔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군의 피해를 줄이려는 의도인 것이다.

경험과 지식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지식도 경험을 앞설 수 없지만 경험도 절대 지식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전쟁경험은 탈레반이 넘치도록 풍부하지만 이런 세밀한 작전에서의 전략 전술은 교범에 의해 학습이 되지 않으면 경험만 가지고는 얻어낼 수 없다.

파팟!

갑자기 눈을 빛냈다.

케인은 백인이 있었다고 했다.

권총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오민철은 외인부대에서 배운 대로 팀을 나눴다.

그의 전술은 틀리지 않았다.

실종된 두 명의 팀원을 찾는다는 건 전쟁중이라는 뜻이다.

단일팀으로 움직이면 떼죽음 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고 두 군데로 나눠 수색정찰을 시작한 것이다.

권총수는 불 꺼진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마을 입구에 납작한 바위가 있었는데 권총수는 피곤한 듯 털썩 주저 앉았다.

마을은 숨소리 하나 나오지 않을 만큼 정적에 묻혀 있었다.

다섯 시가 조금 넘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농민 자흐라는 작업 도구를 챙기기 시작했다.

일찍 개화한 양귀비들은 어느새 봉우리를 맺어 아편을 채취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본격적인 수확 철은 아니지만 그때그때 아편을 짜내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

올해는 어느 해보다 양귀비 작황이 좋다.

“라일라.”

안방을 향해 부르자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히잡을 쓴 여자가 나왔다.

자흐라의 아내 라일라이다.

두 사람은 허리에 군용 탄띠를 멨다.

그리고 아편을 채취하여 담을 수 있는 깡통을 수통처럼 옆구리에 매달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집을 나갔고 골목을 내려갔다.

멀리서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고 바람은 상쾌하다.

동네에서 자신들이 재배한 양귀비가 가장 빨리 봉우리를 맺었고 수확이 제일 빠르다.

곡식과 마찬가지로 하루라도 수확이 빠르면 좀 더 비싼 가격을 받는다.

개화시기가 빠르고 전체적으로 꽃 색깔이 선명한 것을 보아 조심스럽게 풍년을 예상했다.

결혼한지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아이는 없다.

그래도 둘은 행복했고 모든 걸 알라에게 맡긴다는 겸허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자흐라!”

갑자기 라일라가 옆구리를 쳤다.

왜 그러냐는 듯 라일라를 바라보던 자흐라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마을 입구 납작한 바위에 한 사내가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꿀꺽!

자흐라는 침을 삼켰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데 등골이 쭈뼛선다.

오른쪽 옆으로 총 한 자루를 눕혀 놓고 있었는데 워낙 총이 흔한 세상이므로 그다지 관심은 가지는 않는다.

문제는 사내의 발 아래였다.

지면에 굼벵이 같은 담배 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건 사내가 지금 나타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어제 밤부터 그 자리에 앉아 있었는지 모른다는 추측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사람을 찾아왔다면 누군가의 집 대문을 두드려야 하고, 아니면 잠시 쉬었다가 지나가기 위해 담배 한 대를 피웠다면 저럴순 없다.

꽁초가 수북하다는 건 기다렸다는 뜻이다.

무얼 기다렸을까.

자흐라는 사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인물이다.

언뜻 동남아계로 보이는 듯 했으나 정확하게 구별을 할 수는 없었고 두 사람을 보는 시선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자흐라는 사내의 눈에서 적의나 살의를 발견하지는 못한 것에 안도했다.

오랫동안 전쟁을 겪다보니 사람의 눈을 보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대략은 짐작 가능했다.

그런데 자흐라가 모르고 있는 면이 있었다.

분노가 극에 이르면 모든 감정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름하여 무정(無情)이다.

달마는 무정을 정의하길, 살아 있지만 아무런 감정도 지니지 않는(有生不感)것이라고도 했다.

감정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 희로애락이 없다는 뜻으로 오로지 본능의 지배만 받는다.

즉 이성은 철저히 사라지는 것이다.

“말 좀 물읍시다.”

자흐라는 가던 걸음을 멈췄다.

사내는 피우던 담배를 발로 비벼끄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촌장님 댁이 어디입니까?”

점잖은 말투에 자흐라는 크게 망설이지 않고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갈대로 엮은 커다란 흙집 보이죠. 거깁니다.”

“고맙소.”

권총수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골목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자흐라와 라일라는 한동안 서서 촌장집으로 올라가는 사내를 바라보더니 이내 양귀비 밭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흙 벽돌을 쌓아 담장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상당하여 안을 들여다 볼 수는 없었다.

오래된 양철대문이 반쯤 찌그러진 채 걸려 있었다.

권총수는 대문을 조심스럽게 밀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마당이 있고 마른 갈대가 덮고 있는 높다란 지붕 위로 사막에 사는 블랙버드라는 작은 새 두 마리가 굼벵이를 잡아 먹는지 지붕을 헤집고 있었다.

왼쪽 헛간에서는 양들이 시끄럽게 울고 있었는데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덜컹!

그때 방문이 열리고 비쩍 마른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아직 권총수를 발견하지 못한 듯 헛간쪽으로 가더니 문을 열었다.

그러자 20여 마리의 양들이 마당을 나와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양떼를 밖으로 내보내고 난 노인은 자흐라가 허리에 찼던 것과 같은 아편을 채취하여 담는 통이 담긴 벨트를 맸다.

철컥!

노인은 소리가 나게 고리를 끼웠다.

멈칫!

조그만 칼을 챙겨 나오다 권총수와 마주쳤다.

“뉘시오?”

“촌장님?”

“그렇습니다. 내가 이 마을 촌장인 나씨르라고 합니다만.”

그러면서 나씨르라는 노인은 권총수 오른손에 들린 M4를 흘긋 거렸는데 눈썹을 찌푸렸다.

탈레반의 공통총기는 AK였다.

가끔 미군이나 용병들로부터 노획한 M4를 보긴 하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실탄 확보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몇일 되지 않았으니 연로하셔도 기억을 해내는 데는 크게 어려움이 없으리라고 봅니다.”

모른다거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면 안 된다고 미리 쐐기를 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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