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5화: 밀려오는 붉은 구름(3)
팔랑!
팔랑!
종이 넘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
“놈이 벌인 일들이 놀랍군.”
좀체 남 칭찬을 하지 않는 살라자르다.
웃지도 않고 창밖을 보며 던지는 말 속에는 진지함이 가득 차 있었다.
“예!”
“일단 파다이 마하즈쪽과 접촉을 해서 상황을 알아봐. 물량 확보가 가능하면 돈을 더 얹어주더라도 확보해.”
“그렇잖아도 물라 나지불라와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손을 써놨습니다. 늦어도 일주일 이내에 답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올 겨울에 헤로인 가격이 치솟을 건 불을 보듯 뻔합니다.”
“돈은 이럴 때 벌어야 하는데, 수요는 넘쳐나고 공급이 부족하면 부르는게 값이거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살라자르 눈이 번들거렸다.
누군가 그의 눈을 보고 야수라고 불렀다.
‘이익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항상 야수가 있다’
살라자르는 조용히 입술을 물었다.
반드시 물어뜯어 죽여야 할 표적이 나타난 것이다.
* * *
권총수는 차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앞문을 열어 놓았는데 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이 깊은 산골짜기까지 미국의 소리방송 VOA(Voice of America)가 나오고 있었다.
흘러나오는 노래는 로렌 데이글(Lauren Daigle)이 부르는 ‘You say’라는 노래였다.
크게 틀지 않았으나 조용한 산골짜기인 탓에 울림이 컸다.
I keep fighting voices in my mind that say I'm not enough
난 내가 아직 불충분하다고 말하는 내 마음 속 목소리와 싸우고 있어
Every single lie that tells me I will never measure up
내게 해대는 그 모든 거짓말 하나 하나는 다 세지도 못할 지경이야
Am I more than just the sum of every high and every low?
난 단순히 그 모든 것들을 합한 것 그 이상의 존재인 걸까?
Remind me once again just who I am
난 또 한 번 내가 누군지를 생각해
Because I need to know
왜냐면 난 반드시 알아야겠거든
듣고만 있던 권총수는 급기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You say I am loved when I can't feel a thing
주님께선 내가 아무것도 못 느껴도 사랑받는 존재라 말씀하셔
You say I am strong when I think I am weak
주님께선 내가 약한 존재인 것 같아도 강하다고 말씀하시지
그때 저 멀리서 오민철이 M4를 쥔 채 다가왔다.
노랫소리를 줄이며 권총수가 물었다.
“만나봤어?”
형형색색의 양귀비 꽃이 핀 넓은 들판과 같은 분지였다.
오민철은 지금 양귀비 밭의 규모와 생육 상태를 살피기 위해 갔다 오는 길이다.
“농민을 만났어. 촌장 노인.”
“그런데?”
오민철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거야 원, 완전 대놓고 협박을 하는데.”
“뭐라고?”
오민철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는다.
“물라 나지불라.”
물라 나지불라라는 말에 권총수 눈이 가늘어졌다.
아프카니스탄에 오기 전 다인코프에서는 미국무부로부터 제공받은 탈레반에 대한 정보 몇 가지를 권총수에게 넘겨주었다.
그건 탈레반의 세력판도에 관한 것이었는데 10여 개의 분파중 가장 눈길을 끄는 조직이 하나 있었다.
‘피다이 마하즈’라는 세력이었다.
파다이 마하즈의 우두머리는 ‘물라 나지불라’라는 인물이었다.
물라 나지불라는 15살 어린 나이에 탈레반에 가입했는데 잔인한 심성과 조직에 대한 뛰어난 충성심으로 자살폭탄테러 행동대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그의 지휘 아래 벌어진 자살 폭탄테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미국무부는 대략 20여건, 희생된 숫자만 200여명에 이른다고 했다.
그의 이름이 탈레반을 넘어 IS와 무자헤딘 등 이슬람근본주의 무장테러조직에 알려질 즈음 1대 우두머리 ‘물라 오마르’가 사망하고 2대 우두머리로 ‘물라 아크타르 만수르’가 올랐다.
그런데 여기서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물라 아크다르 만수르가 1대 우두머리인 오마르를 죽였다’
물라 나지불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선언을 하며 휘하 부하들을 데리고 빠져나와 독자세력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피다이 마하즈’였다.
그가 조직을 뛰쳐나온 명분은 전 우두머리를 배신한 물라 아크다르 만수르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탈레반 조직이 통째 흔들렸다.
사실이라면 만수르를 우두머리로 받아 들이기는 고사하고,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사결과 전혀 그런 일이 없다는 발표가 이어졌고 오히려 나지불라를 배신자로 찍어 제거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나지불라는 위축되기는커녕 많은 탈레반들이 그의 방식과 신념에 동조하며 세력이 급속히 불어났다.
“그럼?”
“나지불라가 우두머리인 ‘피다이 마하즈’ 조직이 이곳 양귀비 밭을 관리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더라고.”
권총수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꽃이 만든 화평선(花平線)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넓었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죽음의 꽃들이 오늘 따라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지금까지 단일 재배지역으로는 가장 큰 규모였다.
“족히 30제곱킬로미터는 될 것 같아. 쌍안경을 동원해야 할 정도더라고.”
권총수는 아무 말도 않고 한참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운전석으로 가서 라디오를 껐다.
다시 밖으로 나온 권총수는 차에 달린 무전 송수신기를 잡았다.
오민철은 담배를 피우며 바라보았다.
“여긴 레드 원, 레드 투, 레드 쓰리, 레트 포 응답하라.”
“레드 원, 레드 투, 레드 쓰리, 레드, 포.”
“모든 대원들은 지금 즉시 페르샤워 분지로 모일 것, 반복한다 모든 대원들은 페르샤워 분지로 집결하도록 이상.”
“알겠습니다!”
모두가 대답을 하며 무전은 종료됐다.
“어떻게 하려고?”
권총수가 이번에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샤루프, 나 캡틴입니다. 페르샤워 분지로 트렉터 3대만 보내시오. 이틀, 알겠소. 최선을 다해 빨리 보내주시오.”
“트랙터 부른거야?”
“여기까지 들어오려면 아무리 빨라도 이틀은 걸린다는데.”
“거리도 거리지만 길이 워낙 엉터리잖아.”
아프카니스탄의 도로사정은 양귀비 단속에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였다.
도로라고 해봤자 정부가 아닌 그 길을 이용하는 농민들이 임시 방편처럼 만들어놨기 때문에 협소하고 아슬아슬하다.
산악지역이니 절벽과 낭떠러지로 이어지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양귀비 농민들 또한 그런 도로사정을 읽고서 의도적으로 차량이나 트랙터가 들어올 수 없는 외진 곳, 위험한 곳을 찾아 들어간다.
미국무부 통계에 의하면 단속을 나갔다가 차량전복으로 숨진 미군만 13명이었다.
“지사장님!”
권총수는 다시 핸드폰을 들어 이집트 지사장 버홀터와 통화를 시도했다.
“물라 나지불라에 대해 새로 들어온 정보 있으면 보내주시죠.”
“나지불라 구역인가?”
“굉장합니다. 미국의 대평원을 보는 것 같은 대규모 재배지가 발견되었습니다. 페르샤워라는 곳입니다.”
“캡틴.”
갑자기 전화속의 버홀터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떤가? 거긴 트랙터가 들어가기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장애가 많은 지역인데 미 공군에 부탁을 한 번 해보는 것 말일세. 물론 회사차원에서 해야겠지. 잠시만 기다려 보게.”
“그러죠.”
권총수는 전화를 내렸다.
그다지 밝은 표정이 아닌 것에 오민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사장님께서 뭐하고 하냐?”
“여러 가지로 우리가 좀 처리하기는 그렇다면서 기다려 보라는데, 미군 힘을 빌려보자는 거야.”
“그럼 좋지. 폭격기 한 대만 떠서 쏟아 붓고 가면 게임 아웃인데.”
“그게 쉽지는 않을 거야. 탈레반 미국 모두 평화협상이 지지부진해지면서 예민해져 있어.”
“미군이 이런 일에 까지 끼어들 여력이 없다?”
“당분간은 탈레반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쪽으로 갈거야. 아무리 양귀비 밭이라고 하지만 아프카니스탄 농민들의 삶의 터전을 불바다로 만들어봐. 회담에 좋은 영향을 끼칠리는 없잖아.”
“그러고 보니.”
“일단 기다려 보자고.”
“팀원 호출은.”
“호출은 호출이고.”
딸칵!
권총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부처(Butcher)’
권총수가 누군가의 이름을 중얼 거렸다.
그는 탈레반 우두머리중 가장 잔인한 인물로 불린다.
미해병 제 22미 해병원정부대장 윌리엄스 장군은 기자회견에서 물라 나지불라를 ‘도살자(Butcher)’라고 불렀다.
‘탈레반은 알라의 전사들이지만 그는 결코 아니다. 그는 지옥에서 온 악마일 뿐이다.’
나지불라의 흉포한 심성을 알리려는 의도적 발언이었지만 은근슬쩍 다른 탈레반 조직은 알라의 전사들로 온화하게 품어주고 나자불라는 사탄으로 표현하여 그들과 관계를 더욱 벌려 놓으려는 의도였다.
물론 효과는 있었다.
군소분파들이지만 여러곳에서 ‘우린 사람을 죽이기 위해 총을 들지 않았다’라면서 나지불라와 차별을 시도했다.
씰팀이 동원되어 나지불라를 추적했지만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했다.
99프로 가까이 신뢰성 있는 정보를 받고 출동했지만 아슬아슬하게 빠져 나갔다거나, 뭔가 불길함을 느낀 듯 혼자 사라져 버렸다는 부하들의 증언을 보면 평범한 인물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어쩌면 아프카니스탄에 들어와 가장 위험하고 힘든 작전이 될지도 모르겠군.”
권총수는 담배를 끄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날 밤 10시가 넘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건 이는 이집트 지사장 버홀터였다.
때마침 권총수는 미해병대 전투식량으로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예! 지사장님.”
“텍사스에서 국무부 관계자와 통화를 했고, 그쪽에서 국방부를 통해 현지 사령관인 윌리엄스 장군에게 가능 여부를 확인했는데 노우 라는 대답이 나온 모양이야.”
권총수는 포크로 이것 저것 찍어 입속에 밀어 넣었다.
“당분간은 1급 경계태세를 유지해야 할 만큼 아프카니스탄의 상황이 좋지 않은 모양일세. 탈레반 강경파들 사이에서 현 지도자인 아쿤드자다에 대한 암살 명령이 떨어졌다는 정보가 있다네.”
협상파인 아쿤다자드가 암살되면 미국으로서는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
어쨌든 국제사회의 시선도 있고 전쟁에 대한 미국 내의 피로감을 고려하면 평화협정을 맺고 완전히 빠져 나가는 것이 미국다운 모습이고 현 백악관 주인의 통치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화를 끊은 권총수의 얼굴이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
“아직 안 잤어?”
오민철이 안방에서 추리닝 차림으로 나왔다.
“야 그만 자자, 이렇게 열심히 일한다고 연봉 올려주는 것도 아니잖아.”
“우린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지만 고용주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걸, 그래서 노사가 항상 대가리 터지게 싸우는 것이고.”
“우리 동생이 밥을 먹으면서까지 작전 성공을 위해 노심초사한다는 걸 메몰라 대표가 알까? 모르겠지? 모를거야. 텍사스에서 여긴 보이지도 않는데 뭘 알아?”
그러면서 히죽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