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하얀 창문(2)
이어 권총수의 얼굴 근육이 요동을 치며 뒤틀렸다 틀어졌다를 반복했고 본래의 얼굴로 변했다.
“허억!”
셋 모두 소스라쳤다.
너무 놀란 듯 입만 벌리고 있었다.
“사막의 흑...새!”
하심이 헛소리 하듯 중얼 거렸다.
“영감!”
문득 권총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산속에 있던 집 주인 베차라가 AN-94를 한 자루 조심스럽게 거머쥐었다.
옆에 있는 박스에서 30발짜리 바나나형 탄창을 주워 총에 끼우려다 들킨 것이다.
권총수는 천천히 걸어갔다.
베차라 노인은 주춤 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는데 권총수는 손에 들린 소총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어련히 알아서 죽여줄 텐데.”
탕!
뒷주머니에 있던 권총을 꺼내 베차라 노인의 이마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베차라 노인은 잠시 우두커니 서 있는 듯 하더니 뒤로 벌렁 드러눕고 말았다.
“혹시 아롱바라는 사람 알고 있소? 다할풀 수도원에서 온 친구라는데?”
권총수의 시선이 하심에 고정됐다.
“알고 있네.”
“하심!”
옆에 있던 사만다 루스웨이트가 하심을 바라보았다.
“몇 번 만난 적도 있지만 그가 어디에서 사는지 알지 못하네. 지시할 일이 있으면 사람을 보내지.”
권총수는 하심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했다.
반박귀진의 경지에 오르면 굳이 고문을 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상대가 뱉는 말의 진위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무자헤딘이란 이름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조직이라고 보면 안 된다.
아주 드물게 필요에 의해서 잠시 손을 잡기도 하지만 여러 파벌로 나누어져 있다.
“하심, 내게 폭탄 조끼를 입히는 전략은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거요?”
“지시를 받았소. 아롱바에게.”
하심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권총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는 표정이다.
“강호의 법칙, 그건 피는 피로 갚는 것이오.”
탕!
총알이 하심의 미간을 관통했다.
주르르!
얼굴로 핏물이 주르르 쏟아졌는데 하심이 희미하게 중얼 거렸다.
“알라후 아크...바르!”
쿵!
소리를 내며 앞으로 엎어졌다.
권총수는 죽은 하심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주머니에서 말보로 레드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더니 AN-94를 담은 상자 위에 쭈그리고 앉았다.
드르릉!
그때 자동차 엔진소리가 들리며 흰색의 작은 트럭 한 대가 올라오고 있었다.
권총수는 갖고 있던 총을 뽑았다.
차량을 운전하는 운전자의 모습이 정확하게 눈에 들어오자 권총수는 앉은 상태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퍼억!
앞 유리가 뚫리고 핸들을 잡고 있던 사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트럭은 올라온 속도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더니 건물에 부딪혔다.
사만다 루스웨이트는 혼란스러웠다.
사막의 흑새에 대한 얘기는 익히 들었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 외인부대 저격수인지, 또한 용병 업계에 들어와 시장의 지도를 바꿔버린 인물인지.
대저 소문이란 부풀려지기 마련이다.
뛰어난 사내라는 것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과학적이지 못한 이상한 풍문에는 희망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어낸 코미디라고 믿었다.
‘으음!’
그러나 사만다 루스웨이트는 침을 삼켰다.
두 눈으로 분명하게 보고 있지만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베차라 노인과 하심, 그리고 지금 총기를 싣기 위해 트럭을 끌고 온 사람이다.
가장 먼저 사망한 네 명을 바라보았다.
이마에 큼지막한 구멍이 뚫렸다.
총은 아니다.
소음기를 달아도 이정도 지척이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사만다 루스웨이트는 오늘 몹시 불편한 하루가 될 것을 예감했다.
* * *
사내는 결가부좌 한 채 한 자루 칼을 닦고 있었다.
어떤 성스러운 의식을 행하듯 입에 부드러운 종이를 물고서 흰 헝겊으로 칼날을 닦고 있었다.
입에 종이를 무는 건 필시 입김이 도신에 내려앉는 걸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당신은 틈만 나면 칼을 닦는군요?”
사만다 루스웨이트가 물었다.
사내는 닦던 칼을 들어 올렸는데 촛불을 받은 도신에서 차가운 광채가 쏟아졌다.
사만다 루스웨이트는 금방이라도 살갗을 벨 것 같은 예리한 광채에 몸을 한 차례 떨며 물었다.
“강호는 어떤 곳이죠?”
사내는 잘 닦인 칼을 천천히 들어 살폈다.
“짐승들만이 사는 곳이지. 약한 놈은 죽고, 강한 놈만 큰소리치는 멋진 세상.”
사만다 루스웨이트는 눈썹을 찡그렸다.
알고 보면 인간 세상도 동물들과 다름없는 약육강식 아닌가.
“거기에는 룰이 있소.”
“룰?”
“강자는 약자를 죽여도 된다는 것.”
사만다 루스웨이트의 눈이 커졌다.
“이 세상은 살인이란 죄로 엮어 교도소에 보내거나 사형을 집행 하지만 그곳은 아니오. 관부가 있긴 하지만 강호일에 개입하는 걸 부담스러워 합니다. 한 마디로 너희들 일은 너희들이 알아서.”
쉭!
한 가닥 은색의 광채가 번득였다.
화악!
사만다 루스웨이트의 눈이 커졌다.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 피워놓은 향이 칼 위에 올려져 있었다.
모래에 꽂아 놨고 지름이 2밀리가 채 안 되는 가느다란 향이기에 결코 칼을 휘둘러 자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면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그 보다 한 술 더 뜬 해괴망측한 일을 목격했다.
뭐가 날아와 미간을 뚫어 버렸다는 건 알겠지만 총도 칼도 아닌 무엇이 딱딱한 사람의 뼈를 뚫고 목숨을 빼앗을 수 있을까.
이마 앞에서 힘껏 돌을 던져도 관통은 커녕 머릿속으로 깊이 박히는 것도 힘들다.
“당신도 같은 대답일 테고?”
권총수가 먼 산을 보며 물었다.
사만다 루스웨이트 당신도 조금 전 죽은 하심처럼 아롱바의 얼굴은 알지만 거처나 동선은 모르느냐는 뜻이었다.
“정말 몰라요.”
권총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피우던 담배를 땅바닥에 비벼 끄고 일어났다.
히죽!
갑자기 자신을 향해 웃는 권총수를 보며 사만다 루스웨이트는 움찔했다.
권총수의 웃음이 섬칫했다.
열한 살 때 자신을 강제로 성폭행한 백인 남자도 지금 권총수처럼 웃었다.
슉!
손가락을 튕겼다.
“악!”
사만다 루스웨이트는 비명을 질렀다.
몸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다...당신.”
권총수는 아무런 말도 않고 다가왔다.
“거기 서.”
뒤로 물러나려고 했으나 꼼짝 할 수가 없었다.
“다가오지 마. 알라후 아크바르, 알라시여 저를 도우소서.”
사만다 루스웨이트는 절망스럽게 외쳤다.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틈만 나면 자신을 괴롭히는 11살 때의 사건이 또 벌어지기 직전이다.
권총수의 미소는 11살 때 자신을 끌고 가 성폭행한 남자의 것과 너무 똑같았다.
“아롱바는 몰라도 몰나르가 있는 곳은 알고 있어요.”
사만다 루스웨이트는 발작적으로 소릴 질렀다.
더 이상 원하지 않은 남자가 자신의 몸을 건드리는 건 견딜 수 없다.
권총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농장, 사탕수수 농장에 있어요, 카알핀.”
뚝!
일 미터도 채 안 되는 지척에서 권총수의 걸음이 멈췄다.
“제발! 오오!”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어 감아 버렸다.
조용했다.
숨소리만 느껴지는 것이 거리는 그대로인 듯 했다.
사만다 루스웨이트는 슬며시 눈을 떴다.
다시 한 번 사정해 볼 생각이다.
멈칫!
금방이라도 자신의 옷을 찢고 폭행할 것 같은 미소 가득했던 권총수 얼굴에 냉기가 깔렸다.
사만다 루스웨이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당했다. 내가 속았어’
그녀는 자신이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으면서 권총수의 심리전에 말려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권총수는 자신이 11살 때 성폭행 당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는 걸 알고서 의도적으로 웃으며 다가온 것이다.
‘아!’
사만다 루이웨스트는 땅이 꺼질 것 같은 신음을 흘렸다.
차라리 푸른 바다였다.
쏴아아 소리를 내며 불어오는 나일강의 바람에 사탕수수들이 고개를 숙였다 들기를 반복했는데 마치 거센 파도가 밀려가고 또 밀려가는 듯 했다.
권총수는 사탕수수 밭 사이로 움직였다.
농장을 출입하는 길이 있지만 발각 될 가능성이 높아 밭과 밭 사이의 둑을 이용해 움직이고 있었다.
구불구불 나일강 삼각주가 만들어 놓은 밭둑을 따라 이동하던 권총수의 고개가 돌아갔다.
기계소리가 들려왔다.
스으으!
몸을 띄워 올려 4,5 미터까지 자란 사탕수수 밭을 살폈다.
멀리서 트랙터 한 대가 사탕수수를 수확하고 있었다.
스으으!
밭둑을 따라 이동하는 권총수의 몸이 더욱 빨라졌다.
100여 미터 전방에 회색지붕으로 된 커다란 창고 여러개가 보였다.
거대한 트럭들이 수확한 사탕수수를 싣고 창고를 들락거렸다.
꿈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 권총수의 눈이 빛났다.
창고에서 상당히 떨어진 숲속에 작은 집 한 채가 있었는데 위치가 농장 주인집으로 보인다.
시끄러운 공장을 피해 본채를 멀리 떨어져 짓는 미국 농장들의 형태다.
권총수는 좀 더 다가갔다.
집 주위로 세 명의 사내들이 AK를 어깨에 메고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셋 모두 터번을 두른 무슬림이었다.
스으으!
풀잎 위를 스치듯 지나간다는 초상비가 펼쳐졌다.
집 주위로는 커다란 올리브나무 십여 그루가 서 있었다.
권총수는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꺼내 소음기를 끼웠다.
많은 인원이라면 암기를 이용한 제거가 효과적이지만 셋 정도면 권총을 이용한 속사가 훨씬 분명하다.
권총수는 자세를 낮추고 나무를 은폐물 삼아 회색 지붕 집으로 가깝게 접근했다.
세 사내는 뭐가 좋은지 킬킬 거리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가끔씩 주위를 한 번 휘둘러보았다.
이십여 미터까지 접근한 권총수는 권총을 들어 올렸다.
슉!
슈슉!
고압호스에서 뿜어 나오는 바람소리가 한차례 들리며 세 사내는 힘없이 쓰러졌다.
권총수는 재빨리 세 사내에게 다가가 죽음을 확인하고 집으로 다가갔다.
집은 지면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막기 위함인 듯 50센티미터 정도 높이의 콘크리트 타설을 하고 그 위에 적벽 돌을 쌓아 지었다.
단단한 아카시아 나무를 잇대어 만든 출입문 앞에 잠시 호흡을 고른다.
집안에는 세 개의 인기척이 있었다.
숨소리가 고르고 불편함이 없다는 건 세 사람 모두 자유스런 상태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왼쪽 창가에 한 명, 딱딱 소리를 내는 것이 의자에 한명’
권총수는 내공을 끌어올려 안을 살핀다.
‘맨 안쪽에 한 명, 셋 중 가장 호흡이 고르다. 그건 잠을 자고 있다는 뜻’
권총수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덜컹!
거리며 소리가 났지만 강기를 이용해 소음을 차단했다.
주렴형태의 모기장이 짙게 드리워져 있고 그 너머로 두 사내가 보인다.
둘 모두 벽에 걸린 텔레비전에 시선을 주고 있었는데 화면 속에서는 축구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스륵!
모기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간 권총수는 곧장 창가에 앉아 있는 사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푸슉!
사내는 한 방에 머리가 관통되며 고꾸라졌다.
나무로 만든 낡은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사내가 얼어붙었다.
자신의 권총은 탁자 위에 있었는데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팔을 뻗어야 닿을 거리다.
사내가 텔레비젼을 끄려고 리모컨을 잡으려 하자 권총수가 왼손으로 말렸다.
“가만, 켜둬요. 나도 맨유 팬이니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의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