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3화: 하얀 창문(1)
사내들은 20여개의 상자를 트럭에 싣더니 자신들도 화물칸에 올라탔다.
사내들까지 오르자 트럭의 화물칸이 묵직해진다.
거친 디젤엔진 소리가 울려 퍼지며 트럭은 부두를 떠나기 시작했다.
트럭에서 시선을 거둔 권총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고기잡이배들은 쉬지 않고 들어왔으나 의심스러운 부분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흐음!”
답답한 듯 이마를 찌푸리며 부둣가를 왔다갔다하며 서성거리더니 한순간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재빨리 사람들을 헤치고 한곳에 도착했다.
조금 전 나일 퍼치를 하역했던 장소였는데 상자를 놓았던 자리에 물기가 전혀 없었다.
나일퍼치는 잡는 즉시 얼음이 담긴 상자에 넣어진다.
당연히 나무 틈으로 얼음이 녹아 물이 흘러나와야 정상인 것이다.
‘트럭이다’
권총수는 곧장 불영보를 펼쳤다.
걸어가는 듯 보이지만 순식간에 밀집한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간다.
그러나 사람들은 권총수가 자신에게 부딪혀 오는 줄 알고 소스라치며 피하려고 하지만 그땐 이미 지나가고 없다.
보법이지만 굉장한 속도였다.
이윽고 부두를 벗어나고 사람들이 뜸해지자 몸을 날렸다.
금강부동신법이다.
촤아아!
한 번 도약하면 3,40미터를 날아갔다.
멀리서 먼지가 피어나고 있다.
비포장 길이기 때문에 차량이 달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슈우우우!
트럭은 가로수처럼 대추야자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달리고 있었다.
다행히 노면 상태가 고르지 못해 속도는 50킬로 정도였고 권총수는 급하지 않게 쫓아 갈 수 있었다.
한참을 달리던 트럭이 속도를 줄이더니 오른쪽 샛길로 빠졌다.
트럭은 경사진 언덕길을 올라갔는데 상당히 가팔랐다.
팟!
권총수의 눈이 빛난다.
‘도자기 학교’라는 길가에 서 있는 낡은 간판이 보인다.
이집트의 도자기는 오늘날 세계 최고가로 거래될 만큼 화려하고 깊이가 있다.
세계 각지에서 이집트의 뛰어난 도자기 기술을 배우기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다 보니 정식 허가도 받지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는 곳이 많았다.
언덕을 올라가던 트럭은 잡초가 무성한 도자기 학교 앞 마당에서 멈췄는데 폐쇄된 지 오래인 듯 2층의 건물은 귀신이라도 나올 듯 휑했다.
오른쪽으로 길게 늘어선 헛간에는 크고 작은 도자기 물레가 방치 되어 있고 곳곳에 크고 작은 진흙더미가 있었다.
30여 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살피던 권총수의 눈이 커졌다.
곧 무너질 것 같은 학교건물 2층에 한 여자가 나타난 것이다.
흰색의 이슬람 복장에 머리에 히잡을 두른 백인여성이었다.
‘화이트 위도우’
CIA와 MI6, 그리고 모사드까지 나서서 추적하고 있지만 행방을 알지 못하는 사만다 루스웨이트가 나타났다.
‘저 여자의 목에 5백만 달러가 붙었다고 했던가.’
권총수는 고개를 돌렸다.
차량 한 대가 올라오고 있었는데 랜드로버다.
랜드로버는 트럭 옆으로 나란히 섰고 앞 뒤 문이 모두 열리고 네 명의 사내가 내렸다.
그중 세 명의 사내 손에는 A2 기관단총이 들려 있다.
정확한 명칭은 MP7A2 기관단총이다.
독일 헤클러 운트 코흐(H&K)사 제품이며 기관단총의 끝판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쏟아내는 화력이 압권이다.
기관단총치고는 유효사거리도 200미터나 되어 근접전과 원거리 총격전도 가능하다.
세 사내는 랜드로버에서 내린 약간 뚱뚱한 사내를 병풍처럼 에워쌌다.
그때 사만다 루스웨이트가 다섯 명의 사내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났다.
“핫핫!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마담!”
뚱뚱한 사내는 큰 소리로 웃더니 사만다 루스웨이트를 끌어안고 가볍게 볼을 비볐다.
“오시는데 힘든 일은 없으셨나요?”
사만다 루스웨이트가 입에 담배를 피워 물며 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내가 재빨리 라이터를 켜준다.
‘하심!’
권총수는 사만다 루스웨이트에게 담뱃불을 붙여준 사내가 자신에게 폭탄 조끼를 입힌 하심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다 있군.’
처음 피아트를 몰고 자신을 태우고 갔던 안타르, 그리고 랜드로버를 운전했던 카사브와 칸, 라크비, 이스마일이 총을 들고 경호를 하고 있었다.
한편 트럭 화물칸에 타고 있던 사내들이 나일퍼치가 실린 상자를 내렸다.
스무개의 상자가 모두 내려졌는데 여전히 물기 한 방울 흘러나오지 않는다.
이번에는 라면상자 크기의 국방색 나무 박스를 내렸다.
처음부터 차에 실려 있었던 모양이었는데 권총수는 총알이 담긴 박스라고 추측했다.
사내 한 명이 운전석에서 커다란 쇠지렛대, 일명 빠루를 들고 왔다.
그는 나일퍼치를 담은 상자의 틈으로 빠루를 찔러 넣더니 거칠게 젖혔다.
따악!
“보십시오.”
사내는 뚜껑을 열어 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사만다 루스웨이트가 허리를 구부려 상자 속에서 총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AN-94.’
권총수의 눈이 커졌다.
AN-94는 러시아군 최신 버전의 위력적인 제식 소총이다.
아직도 전 군에 보급이 되지 않을 만큼 신형이라 러시아 밖으로는 단 한 정도 나오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타탁!
사만다 루스웨이트는 능숙하게 총을 조작했다.
오랫동안 총을 다뤄보지 않고서는 보여줄 수 없는 동작이었다.
AN-94는 30, 40발들이 바나나탄창과 60발들이 캐스킷 탄창을 사용하며 유효사거리가 무려 700미터에 이를 만큼 강력하다.
AK 구형은 시장에서 200달러면 구입이 가능하다.
가장 뛰어난 소총이라는 HK-416은 암시장에서 3,000달러 선이다.
러시아가 야심차게 만들어 낸 AN-94라면 거의 그 가격대 일 것이다.
러시아 정부에서 국외반출을 엄격하게 막고 있다는데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
얼마전 유엔에서는 러시아의 무기관리에 문제가 적지 않다는 미국측의 지적이 있었다.
러시아 국방연구소에서 새로운 무기 하나가 만들어지면 다음 날 아침에 러시아 마피아의 손으로 넘어 간다는 것이다.
8개월전 러시아가 5세대 주력전차로 만든 T-14 6대가 소말리아 이슬람 극단 무장세력 알샤바브에게 넘어가기 직전 CIA정보망에 걸려 실패했다.
‘이런 식이라면 핵무기가 넘어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느냐’
세계는 우려의 눈으로 러시아를 바라본다.
러시아 경제가 갈수록 악화되면서 병사들 월급이 제 날짜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슬그머니 부대 물건을 암시장에 내다 팔고, 고위 간부들은 굵직한 공용화기를 팔아 넘긴다.
AN-94역시 분명 그런 이유로 흘러나온 것이 분명했다.
나일퍼치가 담겼으리라고 생각했던 나무 상자에 다섯 자루의 AN-94가 들어 있다.
스무 상자이므로 대략 백 정이란 계산이 나온다.
HK-416보다 더 저렴한 가격에 유통이 된다고 해도 2,000달러는 넘을 것이다.
2,000달러라고 계산했을 때 백정이면 200,000달러다.
이런 거액이 어디서 났을까.
‘아아!’
불현 듯 떠오른 사람이 있다.
해외로 도망치듯 빠져나간 두 명의 돈 많은 사우디아라비아 왕자들이다.
CIA에서도 그들의 자금을 가장 우려 했는데 지금 눈앞으로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물론 지금 파라오에게 지급될 돈이 그들에게서 나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어쨌든 테러는 자금이다.
빈라덴이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돈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IS역시 돈이 있어 그만큼 위협적으로 성장했다.
사만다 루스웨이트는 검정색 나무 상자에서 30발들이 탄창 한 개를 꺼내더니 끼워 넣었다.
탁!
안전장치를 풀고 전면 숲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두두두두!
총성이 울렸다.
사만다 루스웨이트는 자동으로 놓고 갈겼다.
뚝!
30발은 순식간에 소비되었고 딱 하며 빈 공이가 약실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만다 루스웨이트 얼굴에 만족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딱!
그녀가 길다란 손가락이 허공을 향해 튕겼다.
그러자 건물 안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어!’
권총수는 깜짝 놀랐다.
양을 키우던 산속의 집주인 베차라였다.
그는 작은 운동백을 들고 있었는데 사만다 루스웨이트가 지시했다.
“넘겨주세요.”
베차라가 가방을 건네주자 경호원중 한 명의 사내가 지퍼를 열었다.
백달러 뭉치 한 개를 꺼내 진위를 살폈다.
“당연한 행동이지만 무척 불편하군요”
우리가 위폐 따위로 거래하는 한심한 사람들인 줄 아느냐며 기분 나쁘다는 투였다.
“모든 거래는 항상 뒤탈이 없어야 합니다. 이해 해주십시오. 마담.”
“이상 없습니다.”
경호원이 입을 열어 대답을 하고 랜드로버 뒷좌석에 돈 가방을 싣고 문을 닫았다.
“유감입니다. 이렇게 만나 차 한 잔 나누지 못하고 헤어진다는 것이 말입니다.”
무기 밀매업자 안데르스 과르디 일명, 파라오로 불리는 사내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사만다 루스웨이트를 보았다.
비록 발등까지 덮는 흰색의 아바야를 걸쳤지만 한눈에 봐도 육감적인 몸매라는 걸 알아 볼 수 있었다.
과르디의 눈빛을 읽었는지 사만다 루스웨이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언젠가 따뜻한 차 한 잔 하길 기대합니다.”
파라오는 미소를 지으며 열린 랜드로버 뒷문으로 들어갔다.
경호원들이 앞 뒤로 올라타고 랜드로버는 도자기 학교 마당을 내려갔다.
폐교가 된 도자기 학교 앞 마당에는 AN-94가 담긴 상자 스무개와 실탄이 담긴 박스 다섯개가 놓여 있었다.
“왜 이렇게 늦어.”
사만다 루스웨이트가 이마를 찡그렸다.
하심이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어딘가? 알았네.”
핸드폰을 내린 하심이 입을 열었다.
“10분 정도면 도착 할 것이라고 합니다.”
스윽!
사만다 루스웨이트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자 이번에도 하심이 불을 붙여 주었다.
후우!
길게 연기를 내 뿜는 사만다 루스웨이트가 중얼 거렸다.
“조금만 기다려라. 곧 찾아가서 알라의 이름으로 네놈 목을 잘라주마.”
누군가를 향해서인지 사만다 루스웨이트는 차가운 증오를 뱉어냈다.
권총수는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대추 야자나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직 익지 않은 노란색의 대추야자 네 개가 손에 잡혔다.
허공섭물이다.
익지 않은 대추야자는 무척 단단하다.
거리는 30미터, 강호의 거리로 계산하면 십장으로 무척 짧은 거리다.
촤악!
권총수의 왼손이 앞으로 쭈욱 뻗어나갔다.
네 개의 대추야자가 허공을 날아갔다.
적엽비화의 수법이지만 예전과 많은 차이를 보였다.
첫째 소리가 없었다.
물체가 날아가는데 소리가 없을 수는 없다.
그만큼 빨라졌다는 의미였다.
빠름은 곧 위력이다.
네 개의 대추야자는 권총수가 노렸던 네 사내의 혈도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멈칫!
담배를 피우고 있던 사만다 루스웨이트의 눈이 커졌다.
AK로 무장하고 있던 랜드로버 운전자 카사브, 칸, 라크비, 이스마일 네 명의 미간에 구멍이 뚫렸다.
구멍이 뚫렸다기 보다는 덜 익은 단단한 대추야자가 미간에 틀어박힌 것이다.
미간은 치명적인 급소이다.
네 사람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고 잠시 눈을 깜빡거리는 가 싶더니 가장 먼저 들고 있던 AK소총을 땅에 떨어뜨리고 일제히 나동그라졌다.
꽈당!
퍼퍼퍽!
순간 하심이 재빨리 권총을 뽑으려 할 때 웃음소리가 들렸다.
“죽고 싶으면 뽑아도 좋습니다.”
눈앞에 희뿌연 그림자가 번쩍 하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권총수가 나타났다.
권총수는 변체환용으로 얼굴을 바꾸고 있었기 때문에 대추야자에 죽지 않은 세 사람은 알아보지 못했다.
권총수는 여전히 놀라는 셋을 깊은 눈으로 보았다.
“사람이 이렇게 반가워 보긴 처음입니다.”
씨익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