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화: 끄나풀(informer)2
햄버거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삼킨 뒤, 콜라까지 말끔하게 비운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내는 들어 올 때처럼 덤덤한 얼굴로 가게를 걸어 나갔다.
골목 맞은편에 낡은 쉐보레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사내는 차로 들어가 시동을 걸더니 골목을 떠났다.
사내의 쉐보레가 움직이고 곧바로 권총수의 회색 벤츠가 뒤를 따라갔다.
골목을 벗어나 대로에 들어선 사내는 속도를 올렸다.
권총수는 느긋하게 거리를 두고 사내를 쫓기 시작했다.
사내 뒤를 따라가던 권총수는 피식 웃었다.
거리가 낯이 익다.
사내는 지금 같은 길을 한 번 더 돌고 있는데 미행자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권총수는 느긋하게 담배를 피워 물었다.
칼릴리 재래시장 입구에 쉐보레가 멈췄다.
차선도 그려지지 않은 도로는 사람과 차량들로 뒤엉켜 복잡했고, 비키라는 경음기 소리에 귀가 얼얼할 정도였다.
차에서 내린 사내는 주위를 한 번 돌아보더니 작은 골목으로 쏙 들어갔다.
미리 내려 길가에서 양꼬치를 먹고 있던 권총수는 한입에 털어 넣고 사람들을 비집고 따라갔다.
골목은 짐을 실은 수레꾼들로 붐볐다.
권총수는 20여 미터 앞을 가는 사내를 바짝 쫓았다.
앞서가던 사내는 페인트 칠이 벗겨진 커다란 창고로 들어갔다.
넓은 창고에는 박스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는데 흰색의 트럭 한 대가 짐을 내리고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석류를 담은 박스들이었다.
두 명의 사내가 부지런히 하역을 하고 있었는데 사내는 그들을 흘긋 한 번 바라본 뒤 안쪽 사무실로 걸어 들어갔다.
사무실에는 컴퓨터 앞에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전표를 정리하는 듯 컴퓨터 화면에 계산서가 빼곡했다.
사장은 들어서는 사내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게.”
사내는 안쪽의 빈 의자에 주저앉았다.
“일은 잘 진행되나?”
“물건이 오긴 했는데 조금 부족합니다. 다음에 한 번 더 들어와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다음 번 까지 기다리다 보면 시간이 너무 길어지는 것 아닌가. 여기 시장에서는 구할 수 없나?”
“신형이기 때문에 어렵기도 하고 일단 위험합니다.”
“하긴 시장은 CIA의 정보망이 거미줄처럼 쳐져 있지.”
주인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열린 문 사이로 권총수가 들어섰다.
낯선 사내의 등장에 주인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권총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주인남자의 뒷덜미를 향해 검지를 뻗었다.
팟!
기억을 관장하는 풍지혈이 제압되어 사내는 두 눈을 뜨고는 있지만 앞으로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권총수는 사내 주나이드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군요.”
주나이드가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그 손 잘못하면 평생 못쓰게 됩니다.”
바지 아래 주머니에 권총이 있는데 주나이드 손이 지렁이 기듯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확!
하지만 주나이드는 승부수를 던졌다.
번개처럼 아랫주머니에 손을 넣었으나 쉬이익 하며 권총수의 오른손이 허공을 내려 그었다.
“꺼어어!”
무쇠 솥을 긁는 듯 한 비명소리가 주나이드 입에서 흘러나왔다.
주나이드의 얼굴이 굳었고 두 눈은 찢어질 듯 커졌다.
“내...내 손...내!”
주나이드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는데 손목에서부터 손이 두부처럼 잘려나가고 없었다.
꿈틀꿈틀!
아직도 신경이 살아 있는 듯 주머니 속에 들어간 주나이드 손이 움직였다.
“내가 뭐라고 했소. 손 움직이지 말라고 했는데.”
“사장님 모두 하역 했습니다.”
이미 혈도가 제압된 사장은 수고 했다면서 프린터 해 놓은 계산서를 사내에게 건넸다.
사내는 계산서를 한번 보더니 꾸벅했다.
“입금은 내일 될 거야.”
“수고 하십시오.”
계산서를 받은 사내가 주나이드의 잘린 팔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지만 금세 상황을 간파한 듯 돌아서 가버렸다.
탁!
권총수는 열린 사무실 문을 닫더니 의자 한 개를 끌어 당겼다.
우드득!
갑자기 근육 뒤틀리는 소리에 권총수를 바라보던 주나이드가 소스라쳤다.
자신의 팔을 자른 사내가 사라지고 한번 쯤 본 듯한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
“끄헉!”
주나이드는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사막의...흑새!”
권총수는 말보로 레드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딸칼!
은색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길게 연기를 내뿜는다.
“주...죽었는데.”
권총수가 걸치고 있던 조끼의 폭탄은 사람의 몸으로는 결코 온전할 수 없을 만큼 폭발력이 강력했다.
웬만한 장갑차 정도는 충분히 쭈그러뜨릴 수 있는데 눈앞에서 웃고 있다.
뉴스에서도 갈기갈기 찢어진 듯 시신조각 하나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과거가 중요한 건 아니고, 우리에게는 지금이 중요하죠. 서로 힘들지 않도록 좋은 시간 됐으면 합니다.”
점잖하다.
목소리에서 어떤 분노나 살기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떤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된다.
정말로 사막의 흑새가 죽지 않고 살아났다면 그는 매우 차갑고 분명한 인물이다.
지금 가장 좋은 건 자살이다.
권총은 적과 싸우기 위한 용도이기도 하지만 위기에 빠지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조직을 보호하는 데에도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손목이 잘린 지금 권총은 잡을 수 없다.
더욱 불길한 건 이곳 주인 압바스다.
어떻게 자신이 팔이 잘리는 무자비한 공격을 당했는데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볼일만 보고 있는걸까.
압바스, 뭐하는 거야. 빨리 숨겨 놓은 총으로 이자를 쏴버려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최악의 경우 혼자 죽어야지 압바스까지 끌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 그때 권총수가 물었다.
“그 여자 말이오. 그 날 당신 고물상에 나타난 여자.”
권총수 눈이 싸늘하게 빛난다.
“이번에야 말로 대답 잘해야 합니다. 난 절대 당신을 죽이지 않습니다.”
부르르르!
죽이지 않는다는 말이 이렇게 무섭게 들려보긴 처음이었다.
지금 상황으로 보아 죽이지는 않겠지만 죽여 달라고 빌게 만들겠다는 뜻으로 들린다.
당장 오른손이 잘렸으므로 이미 밥숟가락 들긴 틀렸다.
죽이지 않는 대신 다리가 잘려 나가고, 두 손을 없애고, 앞을 보지 못하게 한다면 어찌될까.
“으윽!”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다.
“말도 할 수 없도록 혀도 잘라 버리겠소.”
“화악!”
주나이드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혀까지 자른다는 말은 할 수가 없다.
주나이드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때가 왔다.
알라의 이름으로 총과 폭탄조끼를 입고 이교도를 향해 달려갈 때가 아니라 있는 모든 것을 털어 놓을 시기라고 판단했다.
눈앞에 있는 사내는 자신이 상대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맞소, 그 여자는 CIA가 그토록 잡고 싶어 하는 화이트 위도우요.”
권총수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주나이드는 계속 입을 열어 말했다.
오민철은 광주에 사놓은 상가를 팔아 KAS에서 미리 받은 연봉 일부를 갚았다.
은행에서 입금을 확인하고 나온 오민철은 가래침을 뱉었다.
생돈이 빠져 나간 것이 조금 아깝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아직 강남에 아파트 한 채도 살아있고 벌교의 과수원 땅도 남았다.
“개자식들!”
오민철은 이를 부드득 갈며 걸었다.
“민철!”
택시를 타려는데 누군가 이름을 부른다.
오민철은 고개를 돌렸는데 백인 한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턱!
사내는 길가 계단에 털썩 주저앉더니 담배를 피워 물었다.
오민철은 눈이 가늘어졌는데 불편한 시선이다.
몇 번 만나긴 했지만 좋은 얘길 나눈 기억은 없다.
잠시 돌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맥보란을 내려다보던 오민철은 조금 떨어져 앉는다.
“CIA에서 나한테 용건이 있소?”
“그냥 돌아가실 성격은 아니고, 어디로 입사할 생각입니까?”
오민철은 큰 소리로 말했다.
“첫 째 KAS와 원한이 있는 회사요.”
“두 번째는?”
“두 번째도 KAS에 대해 이를 갈고 있는 회사로 갈거요.”
“설마 세 번째도?”
“당연하지. 이대로는 억울해서 못가겠소.”
세상인심이 조석으로 변한다고 하지만 권총수가 죽자마자 어떻게 백팔십도 돌변할 수가 있는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아무리 기업이라고 하지만 명실공히 KAS 발전에 절대적인 축이었던 권총수였다.
“돈에 대한 섭섭함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오. 하지만 진짜 돌아버리겠는 건 캡틴에 대한 KAS의 모함이오. 아무리 용병들이 소모품이라고 하지만 어찌 그토록 야만적이고 살벌하게 버릴 수가 있는지 젠장, EPL보면서 상당히 좋은 이미지였는데 이제보니 형편없는 개저질이었어. 잉글랜드 씹새이들.”
“미스터 오, 우리와 일해 볼 맘 없소?”
“우리라면?”
“미국 정부 말이오?”
“무슨 일을 하자는 거요? 내가 잘하는 건 총 쏘는 것 말고는 없는데.”
“바로 그거요. 미국 정부가 오민철 용병의 능력을 스카우트 하고 싶다는 얘깁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CIA죠.”
CIA란 말에 오민철의 눈이 커졌다.
‘CIA(Central Intelligence Agency)정보수집과 특수 공작을 담당하는 미국의 첩보기관이다.
1947년도에 설치되었으며 오늘 날 첩보원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기관이다.’
오민철은 침을 삼켰다.
CIA 요원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첩보영화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보았다.
주인공은 그야말로 무적 불사신체였다.
나이를 먹으면서 실제와 영화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여전히 무소불위의 기관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한 번쯤 영화 속 CIA첩보원이 되어 신출귀몰한 실력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적도 있다.
“자세히.”
구미가 당긴다.
구미라기보다는 호기심이었다.
“어떻게 하자는 거요?”
오민철이 관심을 보이자 맥보란은 입을 열었다.
“민철은 평소처럼 용병으로 활동하는 것이오. 그러나 또 하나의 신분이 추가되는 거죠. CIA 블루요원.”
첩보원은 블랙과 화이트 두 가지 요원이 있다는 것으로 들었다.
“블루요원은 뭐요?”
“정식 절차를 밟지 않고 필요에 의해 고용하는 사람들을 말하지요. 한마디로 계약직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기간은?”
“언젠가 계약을 끝내긴 해야겠지만 아직은 정확한 시간을 정할 수 없습니다.”
그건 자신을 스카웃 하긴 해도 당장 어떤 임무에 투입하지는 않겠다는 의미였다.
갓 면허증을 딴 초보자가 운전연수를 받고 도로에 나가듯 자신에게도 워밍업 기간을 주려는 모양이었다.
“50만 달러를 드리죠.”
총 쏘는 일이라면 자신이 있어서 인지 그다지 나쁘지 않은 액수라고 생각 했다.
그렇다고 50만 달러를 받고 평생을 봉사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정확한 날짜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대략적인 기한은 구두일지언정 말뚝을 박아야 뒤탈이 없다.
“1년 합시다.”
자신이 먼저 기간을 설정했다.
만약 곤란하다고 하면 6개월 정도까지는 양보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곤란하다고 할 생각이었다.
“듣던 대로 시원시원하군요.”
“싫소?”
싫으면 관두려고 하려는데 맥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인하러 갑시다.”
맥보란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