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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188화 (188/651)

제188화: 겨우 살아나다(2)

축골신공으로 작어졌던 몸이 들어올 때와 달리 정상이 된 지금 몸으로는 빠져나갈 수는 없다.

다음 날 집안이 다시 조용해졌을 때 현관문을 통해 빠져나온 권총수는 창백한 안색으로 뜨거운 카이로의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보행득기(步行得氣)’

걸어서 얻는다.

대력금강심법에서 상처를 치료하는 요(療)자 결의 내용이다.

걸어라.

끊임없이 걷되 결코 생각하지마라.

아무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건 욕심을 비우라는 뜻이다.

마음(心)은 곧 몸(身)이다.

마음이 복잡하면 몸 역시 흔들리고 어지럽다.

마음을 가볍게 할 때 곧 몸은 고요해 진다는 불가의 상처 치료법이다.

해가 넘어가고 있다.

나일강을 따라 계속 걸었다.

사막과 달리 강은 밤에도 춥지 않기 때문에 선택한 길이다.

검은 땅.

해마다 일어나는 나일강 상류의 홍수는 하류에 있는 이집트의 땅을 기름지게 만들었다.

사막이 붉다면 나일강 하구가 만들어낸 삼각주의 비옥한 곳을 검은 땅이라고 했다.

이집트 문명의 발생도 나일강이 만든 검은 땅이 있어 가능했다.

터벅터벅!

어둠이 사방을 덮었다.

권총수의 발자국 소리는 소리 없이 흐르는 나일강 유역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둔탁했다.

누가 들어도 발자국 소리에서 그가 몹시 힘들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술에 취해 걷는 사람처럼 소리가 일정하지 않은 것이다.

처음에는 불규칙하고 어떤 리듬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소리였다.

그런데 지금은 일정했다.

척!

처처척!

강은 끝없이 이어졌고 줄기를 따라 걸어가는 권총수의 발걸음은 갈수록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몸이 가벼우니 걸음이 안정되고,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

“허허허! 근골의 뛰어남은 알고 있었지만 그 어려운 대력금강심법까지 이토록 빠르게 깨우칠 줄은 몰랐구나.”

뚝!

권총수는 걸음을 세웠다.

공공선사의 목소리다.

“사부님!”

어둠을 살핀다.

그러나 밤하늘의 별 말고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뛰어나구나. 좋다. 이 늙은이는 네 나이 때 고작 심법의 구결을 외웠을 뿐이거늘.”

공공선사는 감탄과 탄식을 연이어 쏟아냈다.

“보행득기(步行得氣), 그 어려운 뜻을 어찌 이제 이립(而立:30세)을 갓 넘은 네가 깨우칠 수가 있단 말이냐.”

자신은 고희에 접어들면서부터 보행득기가 의미하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권총수는 공공선사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육신의 옷을 벗고 등선하여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선계에 살고 있다.

“앉거라!”

권총수는 그 자리에서 결가부좌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대력금강심법을 운용하여 이 늙은이가 넣어준 기운을 받아 들이거라.”

권총수는 움찔했다.

대저 전이대법은 시전자의 내공을 소모시키는 일이다.

초식의 위력은 철저히 내공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에 가까운 사이라고 할지라도 전이대법은 좀체 사용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사제지간에도 전이대법에서 만큼은 등을 돌릴 정도이다.

“걱정말거라. 이미 탈인(脫人)한 몸이니라. 전혀 영향이 없으니 망설일 것 없구나.”

그제서야 권총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심법 운용에 들어갔다.

“으음!”

명문혈을 통해 기운이 들어온다.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부드럽고 온화한 기운이 찻잔에 피어오르는 수증기처럼 몸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권총수는 공공선사가 주입해준 기운을 받아 운기조식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보행득기로 몸속의 웬만한 상처는 거의 아물었다.

깊은 상처 몇 곳이 진기의 흐름을 막고 있었는데 공공선사의 전이대법은 그 모든 것을 일거에 씻어내 버렸다.

끄억!

짧은 신음을 토하더니 입가로 먹물이 흘러내렸다.

그건 몸속 곳곳에서 운기와 호흡을 제약하던 폐기 덩어리였다.

운기조식이 빨라지면서 권총수의 얼굴에 혈색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스으으!

어느 한순간 권총수의 몸에 변화가 생겼다.

몸 전체가 열기에 이글거리듯 아지랑이가 피어났다.

호신강기가 생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강호무사의 약점 중 하나가 운기조식 할 때인데 이때 외부의 공격에 가장 취약점을 드러낸다.

운기조식 중에는 외부의 공격이나 위협에 대응할 수 없다.

갑자기 운기를 멈추고 대응한다는 건 곧 주화입마로 빠지는 길이다.

그래서 동굴이나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서 하는데, 무공이 반박귀진(反撲歸眞)에 들어서면 그때부터는 달라진다.

몸을 보호하는 호신강기가 자동적으로 형성이 되어 웬만한 적의 공격을 막아 낼 수가 있다.

아지랑이처럼 흐느적거리던 열기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호신강기가 제대로 만들어졌다는 뜻이었다.

‘내가 반박귀진?’

운기조식 중이지만 몸의 변화를 금세 알아차릴 수 있는데 반박귀진은 되돌아와 진짜를 갖는다는 뜻으로 사람의 능력을 넘어섰다는 뜻이다.

반박귀진이 되면 귀밑머리가 희어진다.

조금 전까지 새까맣던 권총수의 귀밑머리 일부가 희다.

완전히 하얗지는 않고 드문드문 흰머리가 보였다.

“후우!”

운기조식을 끝내고 눈을 떴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나일강은 흐르고 있다.

“좋다. 이 사부는 행복하구나. 너 같은 제자를 두어 기쁘고 자랑스럽다. 그럼 또 보자꾸나”

공공선사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갑자기 흡연욕구가 생겼다.

하지만 몸에 지닌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권총수는 몸을 날렸다.

슈우우우!

순식간에 수십 미터를 날아 사라져 버렸다.

도시다.

권총수는 신법을 거두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팔랑!

바람에 신문조각 하나가 날아와 발치에 걸렸다.

무심결에 내려다보던 권총수는 허리를 구부려 신문지를 주워들었다.

가로등이 있다고는 해도 어둡다.

보통 사람들 시력으로는 읽을 수 없겠지만 권총수는 밝은 전깃불 아래 있는 듯 기사를 훑어갔다.

신문에는 놀랍게도 KAS 회장 스톤스의 인터뷰 내용이 실려 있었다.

‘KAS 회장 이집트 정부에 진심으로 사과’

커다란 타이틀에 이어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인터뷰 내용은 간단했다.

그는 우리와 1년 계약으로 들어온 흔한 용병이다.

굳이 연봉이 아니어도 그는 항상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걸핏하면 주위 사람들과 다투었고, 무단으로 팀을 이탈해 동료들을 위험에 빠뜨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와 계약하는 것이 조금은 불안하긴 했으나 용병으로서의 능력만큼은 상당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받아 들였던 것인데 이런 사고가 발생했다.

우리 KAS는 도의적인 책임을 피할 마음은 없으며 이집트 정부 당국과 마주 앉아 원만한 해결을 할 것이다.

진심으로 희생자들에게 머리 숙여 조의를 표한다.

다락방에서 아래층 텔레비전을 통해 흘러나오는 뉴스를 들었기 때문에 사건이 흘러가는 방향을 대충은 짐작했다.

하지만 KAS 회장이 이렇게까지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불만으로 가득 찬 인물, 내가?’

권총수는 피식 웃으며 신문지를 버렸다.

주위를 살핀 권총수는 어두운 골목 구석에 결가부좌했다.

잠시 후 잠이 든 듯 숨소리가 고르다.

눈을 떴다.

주위가 밝아오고 있었는데 권총수는 골목을 나와 맞은편 가게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6시가 막 넘었다.

은행 문이 열기까지는 두 시간 정도 더 기다려야 했다.

뱅크오브 아메리카 카이로 지점에 한 사내가 들어섰다.

초라한 행색에 불안함을 느낀 듯 권총을 차고 있던 경비가 앞을 가로막았다.

“어떻게 오셨죠?”

아차하면 금방이라도 권총을 뽑을 기세다.

“예금 인출을 해야겠소. 코드번호 K78AD66.”

“무하마드!”

그때 창구 뒤로 앉아 있던 백인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경비를 불렀다.

무하마드라는 경비원이 다가갔고 잠시 뭐라고 얘기를 나누더니 돌아온 무하마드의 태도가 바뀐다.

“이쪽으로 오시죠.”

무하마드는 조금 전 자신이 만났던 여자에게 사내를 데리고 갔다.

백인여자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는 고객 의자를 끌어 당겨 주었다.

“조금 전 코드번호를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사내는 끝까지 불러 주었다.

여자의 안색이 변한다.

사실 코드번호 첫 자리 K는 VIP들에게 부여되는 특별 번호다.

아무나 K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경비원이 가로막을 때 재빨리 자신이 나선 것이다.

컴퓨터로 재차 코드번호를 확인을 한 여자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이런 VIP고객이 이토록 초췌한 행색이냐는 질문이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는 그런 질문에 대답을 해야 인출이 가능합니까?”

여자는 깜짝 놀랐다.

“아닙니다. 기다리세요.”

권총수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직원들이 자꾸 흘깃 거린다.

뱅크오브 아메리카는 아무나 VIP로 대접해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스윽!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여자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커피 한 잔을 놓고 갔다.

권총수는 가볍게 눈인사로 고마움을 전하며 잔을 들었다.

멈칫!

차를 마시던 권총수의 시선이 전면 기둥에 걸린 텔레비젼 화면에 멈췄다.

음성은 제거되어 들리지 않았으나 화면과 아래로 흐르는 자막을 보며 뉴스 내용을 알 수 있었다.

KAS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사망자의 유족과 보상에 합의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KAS 관리이사 리네커가 나와 향후 보안요원을 선발할 때 인성을 위주로 뽑겠다는 인터뷰를 했다.

‘내가 망상 장애 정도 되는 환자로군’

권총수는 빙긋 웃었다.

“여깄습니다.”

백인 여자가 신용카드 한 장을 내 놓았다.

“임시 카드죠. 물론 사용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고맙소.”

권총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은행을 걸어나갔다.

“차장님, 누구죠?”

옆 자리에 앉아 있던 백인 남자가 물었다.

“케이(K)고객.”

케이 고객이란 말에 백인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 했어.”

여자는 자신이 발견하지 못했다면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됐다면 자신의 직장생활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

VIP고개를 몰라보는 직원을 필요로 하는 금융회사는 없을 테니까.

은행을 나온 권총수는 현금을 뽑았고 담배부터 구입했다.

딸칵!

말보로 레드 한 개비에 불을 붙인 뒤 길게 빨아 들였다.

삼킬 듯 빨아들인 연기를 내 뿜는 순간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듯 했다.

담배는 때로는 사람은 행복하게 만든다.

가끔은 부족한 비즈니스를 채워주고, 답답한 세상에서 한 가닥 빛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담배를 가진 자는 결코 그 무엇도 부럽지 않다.

외인부대 시절 전쟁에서 죽은 맥크레인 소대장을 대신 1소대를 지휘했던 다리다 상사의 담배 예찬론이다.

담배는 사람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친구라고 했다.

화가 났을 때도, 전투중 위긴에 빠졌어도, 때로는 몸이 아파 의무대에 누웠을 때도 담배는 결코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담배는 자신의 그림자였다.

며칠 만에 피운 담배 때문인가 머리가 핑하니 도는 것 같았다.

단독 주택 1층 사무실로 들어선 오민철의 얼굴이 잔뜩 굳었다.

기다리고 있던 팀원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철?”

나카야마가 묻는다.

“결과는?”

“표정이 왜 그래?”

나카야마가 재차 다그쳤다.

“계약 위반이기 때문에 이미 지불 받은 연봉은 내놓아야 한다는데.”

권총수가 없는 지금 더 이상 용병생활을 할 이유가 없었다.

큰돈은 아니지만 서울에 집도 있고 고향에 과수원을 할 땅을 매입해 놨다.

농사라는 것이 기술보다는 날씨에 메이긴 했지만 성공할 자신도 있다.

그래서 때마침 스톤스 회장을 데리고 카이로에 온 관리이사 리네커에게 그만 두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그만 두려면 올 연봉 200만 달러 중 이미 지급 받은 5개월치를 모두 내놓으라는 것이다.

업무 중 사망하거나 더 이상 용병으로 활동할 수 없는 신체적 부상이 있을 때만 예외일 뿐 스스로 사직서를 제출할 때는 지급 받은 돈을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계약서 없어? 계약서 보면 알 것 아냐?”

“리야드 지사에 놔뒀는데 없어.”

“누가 그래?”

“에반.”

“그럴 리가 있나? 그러지 말고 네가 직접 가서 찾아봐. 아니면 회사에서 또 한 부 갖고 있을테니까 그걸 한 번 보자고 해.”

“그래야지.”

오민철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당장 그만 둘까 싶었지만 6개월 정도 남은 계약기간만 끝나고 떠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회사의 태도에 만정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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