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무자헤딘(2)
무자헤딘이 가장 강력한 용의선상에 오른 지금 과연 그들이 왔을까, 아니면 아롱바가 찾아갔을까.
노인의 말을 빌리면 그들이 CIA추격을 피해 다할풀 수도원으로 잠시 피해 온 것만은 분명했다.
아롱바는 그들과 어떤 관계일까.
스포츠 세계도 아닌 이상 스카웃을 당했을 리는 없다.
강호의 상식선에서 본다면 딱 한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다할풀 수도원에서 만나 그 자리에서 상하관계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이다.
하지만 여기는 강호가 아니다.
포탈라궁에서 밀교를 포함해 홍교와 전진교등 이곳저곳이 독자세력으로 빠져나가면서 이슬람과도 자연스럽게 얽혔다는 것이 무슬림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설명이다.
비렌드라 역시도 그렇게 말했다.
특히 파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 그리고 사하라 사막 베르베르족중 일부도 자신들만의 권법을 지니고 있다.
물론 권법의 뿌리는 밀교다.
‘흐흠!’
권총수는 연신 한숨을 쉬며 이마를 찡그렸다.
사건만 복잡해졌을 뿐 머릿속으로 정리가 되지 않는다.
카이로 공항을 나서자 에반이 마중을 나왔다.
에반은 이집트의 대부호 ‘낫세르’와 경호계약을 맺기 위해 어제 이곳으로 날아왔는데 오는 도중 미리 보고를 했다.
“조금전 파흐드 왕세자 쪽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네. 납치범들에게서 연락이 왔다는군.”
에반이 운전하는 랜드로버가 공항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요구조건이 뭡니까?”
에반은 마른침을 삼켰다.
“교도소에 있는 왕족들을 석방하라는 것이었네.”
“젠장!”
권총수가 거칠게 반응했다.
사실 권총수와 파흐드 왕세자 사이에 약간의 의견충돌이 있었다.
권총수는 지금 교도소에 수감된 왕족들 중 일부를 혁명 중 사망한 것으로 위장해 처형할 것을 주장했다.
몇 명은 살려둬서는 안될 만큼 파흐드 왕세자에 대한 반대가 심했다.
그에 반해 파흐드는 알 살만과 국왕을 죽인 것으로 충분하다면서 더 이상 왕족들을 향해 총구를 겨눠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오랫동안 군주제로 다져온 나라기 때문에 두 사람의 목숨으로 뿌리까지 제거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지금의 왕족들은 알 살만과 일심동체라 할 수 있죠. 그에게 충성하고 그 댓가로 막대한 부를 움켜쥐고 호화롭게 살아왔습니다. 혁명은 전 정부 몇 명을 제거하는 것에 목적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부정과 부패의 근원이 되는 집단과 개인을 본보기 차원에서라도 일정부분 잘라내야 국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습니다.’
이런 걸 두고 쇠귀에 경 읽기라고 하나 싶었다.
‘피는 또 다른 피를 부를 뿐일세’
‘왕족들이야 말로 썩은 고름입니다. 잘라내지 않으면 혁명은 빛이 바랩니다.’
하지만 파흐드는 완강했다.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바쁘다면서 그만 가보라며 내쫓기까지 했다.
“어쩌면 좋겠나?”
에반이 물었다.
“석방을 요구했다면 해줘야겠죠.”
권총수 목소리가 차갑다.
그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투덜거림이었다.
“기한은 언제까지입니까?”
뒷좌석에 앉은 오민철이 물었다.
“조속히 석방을 요구한다고 했지 날짜를 특정하지는 않았네.”
“하나뿐인 아들인데 방법 없잖아.”
오민철은 앞에 앉은 권총수의 눈치를 살폈다.
“왕족들을 풀어주면 꼴 좋겠군.”
“꼴좋다니?”
“내가 말했잖아. 석유 팔아 벌어들인 돈 중에 약 40프로가 왕족들 수중으로 들어가는 나라가 사우디야. 풀어주면 그들이 고마워 할 것 같아? 차라리 국민 화합차원에서 파흐드 왕세자가 사면을 했다면 일말의 고마움이라도 갖겠지만 지금처럼 인질로 인해 풀려나면 이쪽을 향한 감정은 전혀 변하는 것이 없지."
“그렇군.”
“그들은 해외에 숨겨둔 돈도 많아. 군대가 잘 훈련된 나라도 아니고 막대한 자금을 이용해 용병이라도 끌어 모아 반격을 하면?”
“용병?”
“지금 국제시장에서 용병 십 만명 정도는 우습게 동원할 수 있어. 흘러가는 분위기에 따라 내부에서 군 일부가 이탈하지 말란 법도 없잖아.”
“절대 풀어주면 안 된다는 것이군?”
“파흐드 왕세자도 석방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겠지. 하지만 아들이 잡혀 있으니.”
에반이 한숨을 쉬었다.
지이잉!
진동소리에 에반은 아랫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예 실장님.”
권총수의 눈이 커졌다.
에반의 입에서 실장님이라는 목소리가 깍듯하게 흘러나오는 걸 보아 비서실장이 된 사울란이 틀림없었다.
흘긋!
통화하던 에반이 조수석의 권총수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직 도착 전입니다. 예! 그렇게 하죠.”
에반은 핸드폰을 내리고 말했다.
“도착 즉시 전화를 해달라는군.”
딸칵!
권총수는 담뱃불을 붙이고 차문을 조금 열었다.
이미 통화내용을 들었다.
사울란은 권총수가 도착하면 전화 한 통 해달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왜 전화를 해달라고 하는지 뻔했다.
왕족들 석방 여부를 놓고 참모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을 것이다.
물론 석방론자들이 압도적일 것이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으니 권총수의 의견을 최종적으로 들어보려는 것이 분명했다.
권총수는 전화할 맘이 없었다.
어차피 석방할 것이 백프로인데 전화를 해서 무슨 얘기를 할 것인가.
지금으로서는 완전히 무의미한 일일 뿐이었다.
오히려 자신이 그 자리에 끼어듦으로 인해 나중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울지도 모른다.
나흘 째 권총수는 1층 사무실에서 두문불출했다.
카이로 외곽에 있는 이층 단독주택을 매입해 작전본부겸 숙소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팀원들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납치범들을 쫓고 있었다.
이집트 지도는 아프리카에 있지만 정치는 중동에 영향을 끼친다.
이슬람 원리주의와 세속주의가 적당히 엉켜 돌아가는 완충지대와 같아서 이슬람 무장테러단체들의 움직임이 가장 활발한 곳 중 하나다.
특히 이집트 은행을 통해 많은 테러자금이 세탁되고 움직이는데 CIA는 약 20억 달러 정도의 규모로 추산했다.
증거와 목격자가 없는 사건은 탐문수사 말고는 방법이 없다.
여기저기 의심가는 곳을 찾아다니며 쫓다보면 뭔가 걸리게 되어 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시는 겁니까?”
경호팀장 오도이가 옆으로 다가왔다.
불과 보름사이에 오도이 얼굴은 반쪽이 되어 버렸다.
모든 것이 자신이 무능한 탓이라며 옆에서 말릴 정도로 자책하고 있다.
조금만 더 정신 차릴 걸, 한 번 만 더 주위를 의심할 걸 하면서 후회를 쏟아 놓았다.
처음에는 SAS출신 열 명이 사람 한 명 경호를 못 한다는게 말이 되느냐는 노골적인 멸시와 조롱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가 대학을 중간에 그만 두고 SAS에 자원하고 제대한 뒤 곧바로 용병시장에 뛰어든 이유가, 아버지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파킨슨 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 병원비가 상상을 초월했다.
오로지 아버지 병원비를 위해 천문학(天文學)전문가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총을 쥔 것이다.
나카야마가 특수부대 출신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을 만큼 꼼꼼하면서 섬세한 오도이 성격을 보다 못해 이것저것 캐묻다가 그런 사실이 밝혀 진 것이다.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SAS출신이 되어야지만 나중 용병으로 진출할 때 좋은 대우를 받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원했다는 내성적인 사내의 말에서 가족이 무엇인지,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되었다.
“팀장님 맥주 한 잔 하시겠습니까?”
권총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사겠습니다.”
“아닙니다. 가시죠.”
두 사람은 사무실을 나갔다.
사우디와 달리 이집트는 술이 허용된다.
과하지만 않으면 크게 간섭하거나 끼어들지 않는데 두 사람은 길가 노천 카페에 마주 앉았다.
시원한 맥주에 둘 모두 흡족한 표정이다.
항상 그늘져 있던 오도이의 표정이 처음으로 환했다.
역시 술은 피로회복과 기분전환에 탁월한 효능을 갖고 있음이 다시 한 번 드러났다.
“팀장님!”
“말해요 캡틴!”
나이는 오도이가 두 살 많았다.
그러나 용병시장의 경험은 오도이가 앞선다.
권총수는 존중하기로 했다.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자신은 두 살 더 먹은 선배로 깍듯하기로 했다.
하지만 오도이도 캡틴에 대한 예의를 다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뭘 말입니까?”
“왕자의 동선 말입니다. 설마 테러범들이 우연히 공항에 나왔다가 몰나르 왕자를 발견하고 작전에 들어갔다고 보십니까?”
“사실 나도 그 점이 궁금합니다. 왕자님 동선은 2급 비밀인데 어떻게 그들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타났는지.”
오도이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경호실패에 대한 책임을 피할 마음은 없지만 생각해 볼수록 여러 가지 의심스런 대목들이 발견된다는 뜻이었다.
그중 동선 노출이 우연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범인은 피해자 가까이 있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파흐드 왕세자 주위 사람들 중 내 눈을 피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에게서는 어떤 혐의점도 찾아 볼 수 없다는 말이었다.
오도이 얼굴에 실망의 빛이 나타났다.
권총수의 입에서 내부자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길 듣고 싶었는데 아니라고 하자 맥이 풀린 것이다.
그때 발자국 소리가 조용한 골목을 울렸고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렸다.
일반인 복장에 머리에 흰색의 터번을 쓴 서른 중반 정도 되는 사내가 허락도 받지 않고 맞은편에 앉았다.
오도이 얼굴이 굳어지면서 오른쪽 허리에 손을 댔다.
차고 있는 권총을 잡은 것이다.
이슬람 테러단체는 권총수를 죽이기 위해 거액의 상금까지 걸어 놓고 있다.
테러범들 중 가끔은 친한 듯, 아는 사이인 듯 다가와 저격하거나 폭탄을 터뜨린다.
권총수를 노린 테러범 아닐까 싶어 권총을 본능적으로 쥔 것이다.
스윽!
사내는 접힌 쪽지 한 개를 슬쩍 내밀었다.
“앗싸 말라이쿰(평화가 그대에게)”
사내는 가볍게 합장을 하며 돌아서 사라졌다.
사내가 주고 간 접힌 종이가 바람에 펄럭인다.
권총수는 사내가 놓고 간 종이를 집어 펼쳐 들었다.
종이에는 한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마테르. 45세, 현재 에미레이트항공 조종사로 근무. 2017년 케냐 나이로비 쇼핑몰 테러사건을 진두지휘한 사만다 루스웨이트가 이복 동생이라는 설이 있지만 확인된 바는 없음. 이슬람 수니파 인물로 미국에 대해 적대적인 생각을 갖고 있음. 이라크 전쟁 때에는 이교도 반대 미국반대를 외치며 반미 시위에 적극 참여함’
권총수는 쪽지 내용을 몇 번에 걸쳐 읽었다.
“뭡니까?”
권총수는 아무 말 않고 종이를 건네주었다.
오도이는 쪽지를 읽었는데 표정이 굳었다.
“마테르? 누굽니까?”
“타고 왔던 에미레이트 347편 비행기 조종사입니다.”
“설마 조종사가?”
“마테르가 에미레이트 항공 조종사 노조 위원장이더군요.”
오도이 눈이 커졌다.
“어디 조직이든 찬성이 있으면 반대가 존재하죠. 조금 전 그 사람은 작년에 마테르와 노조위원장 경쟁을 벌였다가 떨어진 사람입니다. 경쟁자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경쟁자죠.”
권총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