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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172화 (172/651)

제172화: 피랍(2)

사울란과 차를 마시며 있는데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타난 이는 파흐드 왕세자, 곧 대통령이 될 사람이었다.

흠칫!

권총수는 깜짝 놀랐다.

파흐드 왕세자의 얼굴이 수척해졌다.

사흘 전 마지막으로 볼 때까지만 해도 건강해 보였는데 눈에 힘이 없고 얼굴 피부가 거칠다.

거기에 수염도 깎지 않아 덥수룩한 구레나룻은 파흐드 왕세자의 지금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캡틴!”

“예 대통령님!”

대통령이라는 말에 파흐드 왕세자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쿠데타가 성공하자 크게 안도했다.

통제와 간섭, 고문과 납치로 얼어붙은 사우디아라비아에 말이 자유롭고, 비판이 당연하며, 여자와 남자가 다르지 않는 나라를 만들 수 있게 되어 알라신께 감사했다.

그런데 자페르 준장이 반란을 일으켰고, 겨우 진정을 시켜놨는데 이번엔 하나뿐인 아들이 사라졌다.

아내가 서너 명씩 되는 왕족사이에서 아들 몰나르 나이 11살에 아내를 잃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결코 죽은 아내 말고는 어떤 여자에게도 관심이 없었고 탐내지 않았다.

그래서인가 몰나르의 실종이 더욱 두렵다.

“식사는 했소?”

권총수는 길게 숨을 내 쉬었다.

할 말이 많을 것이다.

하나 뿐인 아들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 달라.

돈은 얼마 들어도 좋으니 내 아들을 데려와 주게.

캡틴, 이번 사건만 해결해 준다면 자네가 원하는 무엇이든 들어주겠네 하며 매달릴 수도 있다.

정치인이라고 하여 아버지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더욱이 일찍 아내를 잃고 홀로된 11살 아이를 키웠다면 그 자식은 더욱 애틋할 것이다.

같이 아침을 하자면서 파흐드 왕세자가 천천히 걸어 나가고 있었다.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따라갔다.

일곱 명이었다.

모두가 외인부대 출신들이다.

10명의 특급 경호원들이 있는데도 사람을 납치해 갈 정도면 범인은 한두 사람은 절대 아니다.

그러므로 최소한 20여명 정도는 데려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에반의 생각이었으나 권총수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비정규전의 승패는 화력도 아니고 후방의 군수지원에 달린 것도 아니다.

이런 사건의 생명은 호흡이다.

말을 하지 않고 쳐다만 봐도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아차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전장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한 외인부대 멤버들 보다 더 분명한 이심전심의 파트너는 없다.

* * *

두 사내가 리야드 공항에 나타났다.

둘 모두 여행 가방을 하나씩 메고 있었는데 낡은 데님 야구 모자를 쓴 사내가 물었다.

“몇 시야?”

“한 시간도 넘게 남았어.”

오민철이 바로 옆 기둥에 걸린 시계를 보고 대답했다.

“어디 가는데?”

한쪽으로 걸어가는 권총수를 향해 물었다.

“한 시간 동안 서 있을 거야?”

권총수가 커피숍으로 쏙 들어가는 걸 보며 오민철이 움직였다.

커피숍은 한산했다.

오민철은 커피를 마시며 말이 없는 권총수 눈치를 흘긋 살피기를 반복했다.

“뭘 그렇게 눈치 봐. 할 말 있으면 해.”

“자식! 눈치 하나는 예술이란 말이야.”

후룩!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난 오민철이 정색했다.

“뭐 없냐?”

회사에서 은밀하게 권총수에게만 건넨 정보 없느냐는 질문이다.

권총수는 잔을 들어 올려 입으로 가져갔다.

“없어.”

권총수는 커피 잔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MI6은 말할 것도 없고 CIA까지 나서고 있지만 아직은 시원찮나 봐.”

“희한한 놈들이네. 아니 사람을 납치해 갔으면 전화를 걸어 요구조건을 말해야 할 것 아냐.”

몰나르 왕자를 데려간 쪽으로부터 아직까지 어떤 접촉 제의도 없었고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밝힌 테러단체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건 사냥꾼에게는 무척 피곤하고 암담한 일이다.

뭔가 드러난 것이 있어야 그걸 토대로 생각하고 추론하면서 하나씩 껍질을 벗겨 나갈텐데 완전 백지상태인 것이다.

캡틴이기 때문에 자신보다 좀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지 않을까 싶어 물었는데 아는바 없다는 말에 오민철이 한숨을 쉬었다.

사실 오민철은 요즘 말 못할 고민 한 가지를 안고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은퇴였다.

외인부대 5년, KAS 생활만 1년 중반에 접어들고 있다.

두 달 전 재계약서에 사인을 했는데 이번에도 단기 1년짜리였고, 계약금으로 자신은 200만달러 권총수는 500만 달러를 받았다.

처음 계약시에는 동일하게 100만 달러였으나 1년이 지나고 나자 연봉차이는 두 배가 넘도록 벌어졌다.

그러나 전혀 섭섭하거나 불쾌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연봉 상승에는 권총수의 능력이 큰 영향을 미쳤고, 특히 형 동생하는 혈육 이상의 관계라는 것이 플러스 알파로 작용하여 200만 달러를 쥐었다.

4,500 달러로 폭등한 일급은 똑 같았다.

더블 스코어가 넘는 계약금 차이가 미안했던 듯 일급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자신의 체면을 세워준 것이다.

‘과욕은 참사를 부른다.’

돈을 버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절제다.

자신의 학력과 능력으로 지금 정도면 과하다 싶을 만큼 벌었다고 인정했다.

그래서 올 시즌 계약이 끝나면 용병업계에서 발을 빼고 싶은 마음이었다.

문제는 권총수가 아무런 눈치도 보이지 않고 은퇴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었다.

강남의 아파트는 벌써 집값이 오르기 시작하고 있고, 고향 벌교에 적지 않은 땅을 매입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광주에 변두리지만 5층짜리 건물도 매입할 예정이다.

외인부대 들어오면서 부터의 꿈은 용병으로 진출하여 돈을 벌고 그 돈으로 고향에서 커다란 과수원 농사를 짓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벼농사를 짓고 있는데 자신은 어려서부터 과수원을 가져보고 싶었다.

그쪽 기후가 프랑스 남부와 비슷해 토질만 잘 가꾸면 굉장한 포도를 생산해 낼 수 있다는 결론을 외인부대시절 내린 것이다.

총알은 눈이 없다.

자신이 날아가는데 누가 서 있는지 상관 않고 몸을 파고든다.

총알이 무서운 건 피아를 구별 못하기 때문이다.

언제 시간을 마련해 은퇴에 대한 진지한 얘기를 해보려고 했는데 그만 이번 사건이 터지고 만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 자식, 대답한번 싸가지 없네. 팀원들도 없는 이런 자리에서는 엉아가 물으면 동생으로서 공손히 대답 좀 해주면 안 되냐.”

벌컥!

짜증이 난 듯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나도 지금 답답해.”

권총수가 눈을 부릅뜨자 오민철이 오른 손을 들었다.

“어휴 요걸 그냥 콱! 707 같았으면 넌 죽었다.”

자신이 권총수를 누를 수 있는 건 707뿐이다.

권총수는 707 생활 경험이 없다.

“내가 봐서는 마지막 고비 같아.”

“고비?”

권총수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일부러 놈들이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는 걸로 생각이 들어.”

“왜? 테러범들 보면 잽싸게 자신들이 저지른 범행이라고 자랑스럽게 떠벌리잖아.”

“사람은 납치되었는데 범인들로부터 반응이 없으면 언론들은 더욱 보도에 열을 올리지. 신문을 통해 온갖 설들이 난무하고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 인터뷰가 실리면서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질 수밖에 없어.”

“사건을 끌어 국제적 이슈화로 만들겠다는 계산이란 말이지?”

오민철이 눈을 좁혀 떴다.

권총수는 남은 커피를 마저 비운다.

“파흐드 왕세자는 빨리 사건이 해결되어 조용해지는 걸 원하고, 놈들은 계속 질질 끌면서 사우디 사태를 다시 분쟁으로 몰아넣으려는 계산일거야.”

“그렇다면 납치범들이 죽은 알살만 왕세자 쪽이라고 봐야 하는 것 아냐?”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보는 것이 정석이지.”

오민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뭐가?”

오민철은 빈 커피잔을 숙숙 소리가 나게 빨았다.

“어떻게 고등학교 나온 머리가 그렇게 영리할 수가 있냐. 이 엉아는 너보다 가방끈이 월등한 전문대 출신인데도 아무 생각이 없는데.”

권총수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는다.

“총수야. 남들은 돈 버는 머리, 공부하는 머리 따로 있다지만 난 개소리라고 봐. 뛰어난 머리는 무조건 이쪽저쪽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거야. 너 고등학교 때까지 원장 수녀님 이름을 한문으로 쓰지 못했다면서?”

어떻게 그런 나쁜 머리로 정치적 판단이나 군사적 전략이 뛰어나느냐는 질문이었다.

“누가 고등학교 때까지 원장 수녀님 이름을 한문으로 못썼다고 그래?”

권총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냐. 그만 두자.”

워낙 살벌한 시선에 오민철이 손을 저었다.

“한국 이름 이 지혜, 슬기 지(智)자에 슬기로울 혜(慧), 이거.”

그러면서 권총수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한문을 썼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때 카이로행 비행기 탑승수속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왔으므로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랭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권총수를 따라가는 오민철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

이따금 팀 회의나 공격 전략을 짤 때 자신의 감정에 매몰되어 미친 듯 떠들 때가 있다.

지금도 자기감정에 빠져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천만 다행스럽게도 권총수가 침을 삼키며 참고 넘어갔기에 망정이지 덤벼들기라도 했다면 무조건 얻어 터졌을 것이다.

이제 권총수를 이길 수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권총수에게 만은 자신의 태권도와 유도가 통하지 않는다.

아무튼 군사적 전술과 전략은 물론 정치적 판단과 흐름을 단 번에 간파하고 핵심을 파고드는 감각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가 놀란다.

쿠데타가 꼭 총으로만 성공을 하는 건 아니다.

아무리 병력 확보가 확실하다고 해도 얼마만큼 작전을 제대로 수립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그런면에서 이번 쿠데타는 권총수의, 권총수에 의한, 권총수를 위한 쿠데타가 되었다.

‘공부머리와 잔머리는 다른 걸까’

만약 다르다면 자신은 어떤 머리를 갖고 있는가 자문해 본다.

아직까지 어떤 분야에 뛰어난지 스스로 감동한다거나 당황해 본 적이 없는 탓인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두 사람은 수속을 밟고 출국장을 빠져 나갔다.

비행기 안은 조용했다.

권총수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얼굴을 약간 찡그리고 있었다.

연락도 없고 증거도 남기지 않는 납치범들이다.

특히 사망한 네 명의 KAS 경호원 모두가 총이 아닌 칼에 죽었다는 것이 가장 거슬린다.

확실히 사람 많은 곳에서는 총보다 칼이 월등한 기능을 보인다.

총의 단점은 소리이고, 칼의 장점은 소리가 없다는 것인데 납치범들은 이걸 철저히 이용한 듯 보였다.

그리고 다시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범인의 칼 솜씨(劍法)였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목격자 한 명이 없다.

아무렇게나 휘두른 칼은 사람들의 눈에 띈다.

거친 칼을 맞은 사람은 비명을 크게 질러 주위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돌아보게 만든다.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는 건 칼을 놓은 사람의 솜씨가 원숙한 경지에 올랐다고 봐야 했다.

툭!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 번호 하나를 눌렀다.

옆에 앉아 신문을 들척이던 오민철이 돌아본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권총수는 빙긋 웃었는데 상대는 바로 자신의 손으로 12주 진단을 나오게 만든 마낙춘이었다.

현대 의술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마낙춘의 무릎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했다.

걷는 데는 불편함이 없지만 뛰는 데는 자유스럽지 못하다고 했다.

그래도 권총수에게 호의적인 이유는 한가지다.

자신의 과거 죄상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공소시효 소멸로 법적 처벌은 피하겠지만 도덕적 지탄은 벗어날 수 없다.

강남에는 수많은 참치횟집이 있다.

참치 회에 대한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까지 다녀온 요리사와 가게 사장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런 정글 속에서 뿌리를 내렸고 소문난 집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살인자가 된다면 모든 건 종료된다.

가장 두려웠던 일을 권총수는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해주었으니 다리 좀 불편한 것쯤이야 괜찮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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