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171화 (171/651)

제171화: 피랍(被拉)1

쨍!

수십 개의 잔이 부딪혔다.

술은 아니다.

술이 금지되어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음료수를 담았다.

술이든 아니든 그것이 중요한 건 아니다.

마침내 크고 작은 분란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다.

그동안 알 살만 전 왕세자의 추종자들로 애를 끓였지만, 이제 사막은 더 이상 바람이 불지 않았다.

그러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사우디 왕실과 군대 훈련교관으로 파견된 아카데미 용병들이 모조리 철수했고 그 자리를 KAS가 차지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서 민간 보안업체로 들어가는 예산만 일 년에 백억 달러가 넘는다.

그중 아카데미가 약 70퍼센트를 거머쥐었는데 이제 그 돈이 KAS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에반은 음료수지만 용병들 잔에 가득 따라주면서 감사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술이라 생각하게.”

“자넨 항상 멋진 친구야.”

용병들 또한 처음에는 술을 마실 수 없다는 것에 불만을 터뜨렸지만 분위기가 무르익으며 금세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모든 용병들에게 1만 달러씩 입금이 되었다.

그야 말로 돈벼락을 맞은 것이다.

특히 권총수를 보는 용병들 시선이 분명히 바뀌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페르 준장을 스스로 이쪽으로 들어오도록 만든 부전이승의 전술은 압권이었고, 뉴욕 타임즈에서는 세계전쟁사에 극히 찾아 볼 수 없는 승부라고 했다.

“총수야!”

오민철이 다가왔다.

“건배하자!”

둘은 힘껏 잔을 부딪혔다.

흔히들 성공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출세라고도 불리는 그 높은 고지에 올랐다.

오민철은 흥분을 주체 못하며 거품을 물었다.

우스꽝스러운 건 모두가 시끄러운 오민철을 슬금슬금 피했지만 핸더슨과 그의 패거리만은 자리를 지켰다.

사령관의 훈시를 듣는 훈련병처럼 서 있는 그들을 보며 권총수가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캡틴!”

나카야마가 다가왔다.

“지사장님께서 굳은 표정으로 급히 걸어 나가던데.”

권총수는 입구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유쾌한 얼굴로 용병들에게 음료수를 따라주었던 에반이다. 얼굴에 좋고 나쁨의 표정을 좀체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뭔 일 생긴 건 아니겠지?”

“별일 있겠어?”

“캡틴!”

이번에는 모리스가 다가왔다.

한때 권총수와 차가운 대립각을 세웠던 그였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철저히 순응하며 의견을 따른다.

“총수, 넌 최고야.”

“모리스 형.”

“널 만난 것이 어쩌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 아닌가 싶다.”

“재수 없다며.”

어느 새 오민철이 다가와 이죽거리자 모리스가 빙긋 웃었다.

“민철 또 왜 그래?”

“남자가 지조가 있어야지. 한 번 미워하면 끝까지 미워하라고.”

오민철은 권총수와 모리스 사이에서 적지 않은 마음고생을 했다.

모리스의 풍부한 SAS경험과 권총수의 뛰어난 전술적 판단이 결합된다면 상당한 팀이 될 것이라는 게 오민철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둘은 이상하게 엇갈리고 뒤틀렸다.

물론 모리스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SAS 출신의 베테랑이 외인부대 출신 병사에게 굽힌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이도 권총수 보다 많고 용병시장에서의 위치도 나름대로 있다.

해법은 권총수가 찾아냈다.

스스로를 낮춘 것이다.

오늘날 이렇게 다정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가 굳건한 걸 보면 인간관계 한 치 앞을 모른다는 말이 어느 정도는 맞다는 생각을 하며 오민철은 웃는다.

권총수는 팀원들에게 음료수를 따라주고 격려했다.

설명 없는 긴 휴전에 온갖 말을 만들어 내고 불만을 토로했지만 지금은 오로지 캡틴을 외치며 엄지 손가락을 곧추 세웠다.

밤은 깊어 갔고, 술 한 잔 없는 파티는 계속 이어졌다.

하나둘 각자의 숙소로 들어가고 지사 건물 앞 공터는 먹다만 양고기와 닭을 삶아 양념소스에 묻힌 쿨트라 요리, 그리고 열대 과일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써걱!

권총수가 망고 한 개를 쥐고 덥석 깨물었다.

소리내어 망고를 씹고 있을 때 비렌드라가 다가왔다.

“캡틴.”

권총수의 위아래를 살핀다.

“뭘 보는데?”

“너무 좋다.”

밑도 끝도 없이 좋다는 말에 권총수는 이마를 찌푸렸다.

“몸 말이야.”

비렌드라는 포탈라궁 출신답게 단번에 권총수의 내공이 높아졌다는 걸 간파했다.

얼마 전 병원에서 실종될 때 그때를 전후해 어떤 운명이 또 한 번 권총수를 바꿔 놓았다는 걸 느낀 모양이었다.

“천룡권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권총수는 한 번도 비렌드라의 무공실력을 직접 본적이 없었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겠지만 비렌드라는 동료의 시선이 있는 곳에서는 초식 연습을 하지 않았다.

“해봐!"

오민철이 다가왔고 세르게이 나카야마 피아퐁 모두가 몰려왔다.

“보여줘, 보여줘.”

모두가 합창하듯 외치자 비렌드라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자세를 잡았는데 우두커니 섰다.

그냥 섰다.

누구나 서 있는 자세,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가다 잠깐 멈춘 그런 모습에 권총수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허허실실’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다는 유중무재(有中無在), 그건 차원이 다른 세상이다.

불가에서는 득도와 해탈을 의미하는 무상의 절대 경지.

비렌드라가 그런 입신의 경지에까지 올랐다고 믿지는 않지만 그만큼 깨우침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붕!

슈슉!

비렌드라의 천룡권은 차분했다.

소림의 백보신권을 닮았지만 섬세하다.

부드럽게 때리는 듯 하며 스치고, 스쳐가는 듯한데 강력한 파괴가 일어났다.

사실적이고 파괴적인 백보신권에 비하면 무공이라기보다는 심신수련을 하는 호신술이라고 해도 좋을 듯싶었다.

짝짝짝!

비렌드라가 천천히 자세를 풀면서 길게 숨을 내쉬자 구경하던 동료들이 박수로 화답했다.

“멋있는데.”

나카야마가 눈을 빛낸다.

보기 좋았다.

춤을 추듯 유연하고 실바람 부는 동작인데 끝에서 일격필살을 하듯 주먹이 끊어진다.

그건 타격 순간 모든 것을 쑤셔 넣는 힘이다.

부드럽게 뻗어 온다고 맞았다가는 커다란 상처를 입을 것이다.

권총수는 비렌드라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비렌드라가 비록 서장(티벳)무림의 패문(覇門) 포탈라궁 출신이라고 하여 소림제자인 자신을 라이벌로 보는 저열한 인품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무공을 알고 배우는 무사의 마음까지 숨기지는 않는다.

‘넌 천재야’

옛 기억이 떠오른다.

무사가 되기에 최적의 신체라고 했다.

방대하고 끝이 없는 소림 무공을 소화할 수 있는 근골이라고 추켜세웠다.

대력금강심법.

소림 무공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어찌보면 소림의 전부랄 수 있다.

권총수는 갈수록 그 깊이를 더해 가고 있었다.

부우웅!

그때 한참 파티 중에 자리를 비웠던 에반의 랜드로버가 들어서고 있었다.

모두가 랜드로버 곁으로 다가섰고 에반이 내렸다.

에반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못했다.

“왜들 이러고 있나? 들어가 쉬지 그래.”

아무 일 없는 듯 말하는 에반을 살피듯 보며 하나둘 숙소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권총수도 등을 돌렸다.

“총수!”

에반의 부름에 권총수는 고개만 돌렸다.

“잠깐 차 한 잔 하지.”

에반은 이쪽 대답도 듣지 않고 걸어가 버렸고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던 권총수가 뒤를 따라갔다.

에반은 자신이 직접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커피 솜씨는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커피에 관해서 만큼은 대충이라는 것이 없다.

20여분 가까이 공들여 가져온 커피는 놀라울 만큼 향기가 좋았다.

“문제가 발생했네.”

에반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권총수를 바라보았다.

“한심한 친구들 같으니.”

에반은 짜증스런 얼굴을 하더니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인 에반은 길게 연기를 내 뿜었는데 좀체 말을 잇지 않았다.

후룩!

권총수는 관심 없다는 듯 커피만 마셨고 에반도 한동안 담배만 피웠다.

“우려 했던 일이 터지고야 말았네.”

권총수는 흘긋 본 뒤 다시 커피를 마셨다.

“영국에서 돌아오던 몰나르 왕자가 실종되었네.”

권총수가 고개를 들었다.

몰나르는 파흐드 왕세자의 아들이다.

곧 대통령제로 사우디 헌법이 바뀔 것이기에 차기 대통령, 국왕이 될 일은 없다.

하지만 파흐드 왕세자가 곧 사우디아라비아를 대표하게 되면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실종되는 초대형사건이다.

더욱이 그 대통령이 쿠데타로 집권한 사람이라면 아들 실종은 죽은 알살만 추종자들의 행위로 추측 할 수 있다.

대통령 아들을 인질로 잡고 어떤 요구를 해온다면 사우디 정국은 또다시 격랑 속으로 빠진다.

몰나르는 영국 캐임브리지 대학 경영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유학을 갔지만 알 살만 왕세자의 칼이 언제 들이 닥칠지 몰라 만약을 대비해 도피 시킨 것이다

“이집트 공항에서 사고가 생겼어.”

“경호원은요?”

“당연히 우리 쪽에서 맡았지. 모두 열 명이었어.”

“열 명!”

SAS출신 열 명의 밀착 경호면 국가 원수급이다.

그들이 지키는 삼엄한 호위망을 뚫고 어떻게 몰나르를 납치해 갈 수 있을까.

“카이로에는 왜 내린 겁니까?”

“쿠데타로 런던 리야드 직항이 줄어들었지. 급한 사람들은 거의가 카이로를 경유하며 들어오고 있어. 몰나르 왕자도 그런 노선을 택했나봐.”

“경호원들 상태는요.”

“네 명이 죽었는데 하나 같이 칼이었다네.”

뚝!

권총수 눈이 커졌다.

탁!

손에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내렸다.

“칼이라고 했습니까?”

에반은 그렇다는 듯 눈을 깜빡했다.

권총수는 이마를 찡그렸다.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무리 칼을 잘 쓴다고 해도 총보다 빠를 수는 없다.

물론 근접전에서 때로는 칼이 총보다 유리하고 유용하게 사용될 때도 있지만 총에 이골이 난 SAS 출신 용병들을 죽일 정도라면 엄청나다.

즉, 뒷골목 칼솜씨로는 절대 안 된다.

권총을, 그것도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줄 아는 용병 넷을 죽일 정도의 칼이라면 강호 절정고수여야 한다.

검법에 뛰어난 무사라면 사람이 북적이고 운집한 장소에서 50센티 전후의 회칼로 몇 명 찌르거나 벨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치려면 한 번에 치명적인 급소를 공격해야 하고, 상대가 갖고 있는 총을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정확해야 한다.

꿀꺽!

권총수는 커피 잔을 들어 크게 한 모금 삼켰다.

마낙춘의 얼굴이 떠오른다.

오래전 미국으로 떠난 OB파 김동재는 마낙춘의 칼을 보고 일무(一舞), 즉 하나의 춤이라고 했다.

사람을 죽이는 칼이 그토록 부드럽고 섬세할 줄 몰랐다며 극찬한 것이다.

그런 마낙춘이라면 사람 많은 곳에서 총을 가진 사내 한둘 정도는 해치울 것이지만 넷은 어렵다.

“그렇다면 칼잡이가 최소 둘 이상은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본 사람이 없으니 모르지.”

“공항 CCTV에 찍혔을 것 아닙니까?”

“찍히지 않았네.”

“그럼?”

“묘하게 사건 현장 CCTV는 꺼져 있었다네.”

“공항 상황실에서 그걸 몰랐단 말입니까?”

“20여초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네. 그 정도 시간이면 잠깐 기기의 오작동 정도로 여기지 누가 의심하겠나.”

권총수는 에반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런 말없이 문을 열고 사라진다.

탁!

혼자 남은 에반은 또다시 담배를 물었다.

겨우 정리가 됐나 했는데 또다시 터졌다.

커도 너무 크다.

다시 사우디는 국제 뉴스의 중심에 서게 됐다.

또 다시 태풍이 불어온다.

사울란이 권총수를 찾아왔다.

현재 사울란의 직함은 파흐드 왕세자의 비서실장이다.

지금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 준비 때문에 무척 바쁠 텐데도 아침일찍 KAS 사무실에 나타났다는 건 어제 밤 에반이 꺼낸 몰나르 왕자 납치 사건 때문일 것이다.

“너무 일찍 오지 않았나 모르겠네.”

미안한 모양이었다.

권총수는 말없이 사울란이 타고 온 벤츠에 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