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화: 부전이승(不戰而勝)3
운전대를 잡은 마툭은 조수석에 앉은 권총수를 흘긋 거렸다.
슥!
그런 마툭의 면전으로 담배 한 개비가 내밀어졌다.
말보로 레드였는데 마툭의 눈이 빛난다.
지금은 구할 곳이 없어 다른 담배를 피우지만 한 때는 말보로 레드가 주머니에 항시 들어 있었다.
딸칵!
마툭이 입에 물자 권총수는 불을 붙여주고 자신도 피워 물었다.
“이름이 뭐요?”
마툭은 움찔했다.
분명 마툭이라고 밝혔는데 다시 묻는다.
가짜 이름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일까?
권총수는 히죽 웃을 뿐 더 이상 묻지 않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차는 아브하 시내로 들어가고 있었는데 멀리 반군의 검문소가 보였다.
권총수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자신은 지금 무장해제를 당한 것과 다름없다.
이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제한적이다.
운명은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것이다.
검문소에서 죽을 수도 있고, 어디에선가 날아온 RPG에 맞을 수도 있다.
아니면 M4의 거친 화력에 온몸이 벌집이 될지도 모른다.
검문소가 가까워 오자 차는 속도를 줄이며 천천히 다가갔다.
모래포대를 쌓아 만든 초소에는 GAU-19 기관총을 거치했고 왼쪽 초소에는 미군 주력기관총 M240이 총알을 잔뜩 물고서 승용차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차 하는 순간 차는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다가온 검문소 군인에게 마툭은 간단히 몇 마디 뱉었는데 군인이 뒤로 물러서며 들어가라는 신호를 했다.
부우웅!
검문소를 통과하고 마툭이 대답했다.
“마자헤리, 모하메드 마자헤리요.”
마툭은 자신의 본명을 말했다.
권총수는 웃기만 할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내 이름이 가짜라는 것을 알았소?”
“그냥.”
“그냥?”
한참을 달리다 차가 다시 속도를 늦췄는데 또 검문소였다.
이번 검문소는 M240 한 자루만 거치되었으며 앞선 검문소보다는 무기와 군인들 숫자가 적었다.
그렇게 통과한 검문소만 다섯 개였다.
승용차는 주택가 골목으로 들어섰다.
권총수는 주택가를 살폈는데 한낮의 고요가 내려 앉아 있었고 어디선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나왔다.
권총수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검문소는 시내를 들어오는 길목을 차단하고 지키는 목적을 갖고 세워졌다.
즉 정부군의 공격을 대비한 성격의 검문소인 것이다.
하지만 세 번째부터 다섯 번째는 작전을 위해 세워졌다기 보다는 다른 목적이 엿보인다.
어쩌면 지금 승용차가 가고 있는 곳을 지키기 위한 검문소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곳이 건물인지 사람인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정부군의 공격을 막기 위한 검문소 성격은 아니었다.
특정 지역을 장악한 군대라면 일반적으로 1선과 2선, 단 두 개의 검문소만 세운다.
두 개가 뚫릴 경우 그때부터는 서로가 정면승부를 펼친다.
1선과 2선이 뚫리면 맞부딪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제3 저지선은 쌓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한 검문소이고 지금 가는 곳은 세 개의 검문소를 통과하지 않으면 도착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차가 멈추고 마자헤리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도착했습니다.”
말이 끝나고 곧바로 오른쪽 단독주택의 육중한 철 대문이 열렸다.
그그긍!
철문이 활짝 열리고 승용차는 단독주택 마당으로 들어섰다.
차에서 내린 권총수는 움찔했다.
M4로 무장한 군인 세 명이 언제든지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수 있도록 긴장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승용차 두 대가 더 있었는데 한 대는 벤츠이고 다른 하나는 혼다 어코드였다.
찰컥!
현관문이 열리고 안에서 일반인 복장을 한 사내가 나왔다.
권총수는 빙긋 웃었는데 그건 현관문을 열고 나온 사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6사단 작전참모로 있었던 사이드였다.
비록 사복을 걸쳤으나 이미 여러 장의 사진을 통해 얼굴을 익힌 터라 단번에 알아 본 것이다.
권총수는 거실로 들어섰다.
또 한명의 사내가 있었다.
권총수는 이번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는데 102연대장 알말루드이다.
권총수를 안내 했던 작전참모 사이드 중령이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한 남자를 데리고 나타났다.
전 22보병여단장 자페르 준장이다.
권총수는 환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어서 오십시오 장군님.”
자페르 준장은 무거운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권총수도 따라 앉았는데 사이드 중령이 붉은 홍차 석 잔을 가져다 놓았다.
“드시오!”
“감사합니다.”
권총수는 붉은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비록 전량을 영국에서 수입해 오지만 확실히 사우디 홍차 향은 좋다.
“오시는데 불편하지 않았소?”
자페르 준장이 찻잔을 내리며 물었다.
자페르가 말하는 불편은 두려움을 의미하고 있었다.
적진으로 들어오는데 겁은 나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이다.
“어떻게 편할 길일 수 있겠습니까? 오늘따라 유서 한 장 남길 가족이 없는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죽을 각오를 하고 왔다는 뜻이다.
“흐음!”
자페르가 어금니를 지그시 물며 묵직한 신음을 뱉었다.
그건 포기의 한숨이었다.
자신은 권총수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이미 마자헤리로부터 보고를 받았는데 오는 내내 여유를 보였다고 했다.
‘검문소의 살벌한 풍경에도 주눅 들지 않았고 오면서 주고받은 대화는 평범했고 목소리는 담담 했습니다’
다짜고짜 찾아온 적(敵)의 사자(使者)를 비무장으로 거리낌 없이 따라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날 기다린 것이오?”
“솔직히!”
그렇다는 뜻이었다.
“만약 끝까지 내가 오늘 같은 자리를 만들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소?”
“난 계속 기다릴 것입니다.”
꿈틀!
자페르 준장의 검은 눈썹이 거친 파장을 보였다.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말을 알고 있다 .
그러나 이건 삼고초려와는 또 다른 기다림이자 자신을 향한 애정이라고 봐야 했다.
“난 반군 우두머리요.”
그런 날 왜 기다리느냐는 질문이다.
권총수는 상체를 바로 세웠다.
“파흐드 왕세자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자페르야 말로 멋진 군인이라면서 오합지졸인 사우디군을 강한 군대로 재탄생 시킬 수 있는 흔치 않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파흐드 왕세자는 그런 말을 한 적 없다.
파흐드 왕세자의 생각이 아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은 것이다.
사우디는 미국 무기를 사들이는데 첫 손가락 꼽히는 국가다.
특히 GDP(국내 총생산)대비로 따지면 단연 1위다.
약 10프로 가까운 돈을 무기 구입에 쏟아 붓는다.
최고, 최신 무기로 무장했지만 인근 예멘의 시아파 후티 반군에게도 쩔쩔 맨다.
얼마 전 후티 반군에게 포로로 잡힌 1,000명의 사우디군의 모습이 뉴스 화면을 장식했는데 월등한 장비를 갖고서도 일방적으로 무너졌다.
대포를 자기 진영으로 쏘지 않나, 자신만만하게 급파한 특수부대가 소수의 반군에게 쫓기기까지 했다.
급기야 사우디 정부에서는 요소요소에 아카데미 용병을 섞어 그들을 앞세운 전투를 벌이고 있다.
소신과 신념이 없으면 대세를 거역하는 배짱을 갖추지 못한다.
알 살만 왕세자와 국왕 부자는 죽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저항하는 것은 신념과 충성이라는 것 말고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지금 파흐드 왕세자에게는 자페르 준장 같은 충성을 아는 인물들이 필요하다.
후룩!
자페르 준장은 목이 타는 듯 자꾸 홍차를 홀짝 거렸다.
리야드 주재 각국 대사들과 만찬이다.
아랍 일부국가를 제외한 세계 여러 나라들은 사우디의 새 통치자로 파흐드 왕세자를 인정하고 있었다.
오늘 만찬은 자신을 인정한 국가의 대사들을 불러 감사를 전달하는 자리였다.
파흐드 왕세자는 환한 얼굴로 대사들과 악수를 나누며 얘기를 했다.
분위기가 한 참 무르익어가고 있을 때 만찬장 안으로 사울란이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핸드폰이 쥐어져 있었는데 파흐드 왕세자를 찾는다.
파흐드 왕세자는 미국 대사와 얘기 중이었는데 표정들이 진지한 걸 보면 깊이 있는 대화가 오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기다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지금 이 시간과 장소, 이 사람들이야 말로 파흐드 왕세자가 사우디의 권력을 안정적으로 쥐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귀한 시간이다.
“왕세자님!”
사울란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파흐드 왕세자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눈빛만 봐도 속마음을 알아차리는 사울란이 미국 대사와 얘기중인데도 찾아왔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다.
“대사님 잠깐!”
양해를 구한 파흐드 왕세자는 사울란이 건네주는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여보세요.”
“왕세자 전하.”
“누구?”
“제22보병여단장 자페르입니다”
화악!
파흐드는 예상치 못한 상대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잠깐 기다리세요.”
파흐드는 재빨리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복도를 나와 건물 밖으로 빠져나온 파흐드 왕세자가 입을 열었다.
“자페르 준장이라고 했습니까?”
“제 옆에 사막의 지배자께서 있습니다.”
권총수를 떠올렸다.
일부에서는 바람의 흑새, 또는 사막의 흑새라고도 부른다.
분명한 건 흑새는 사막의 제왕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막의 지배자는 또 누군가.
“KAS용병대장.”
“아!”
가벼운 신음을 흘리면서 파흐드 왕세자는 아브하의 상황이 정리됐음을 직감했다.
그러면서 총 한 방 쏘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건가 하는 의혹이 떠올랐다.
“통화하고 싶소.”
잠시 침묵이 이어지더니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권총수입니다.”
“알라후 아크바르, 얘기를 해보세요.”
권총수는 대략 설명을 해주었다.
무형의 강기를 펼쳐 통화 내용을 자페르 준장이 듣지 못하게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통화 내용이 들리지 않으면 의심하거나 오해 할 것이다.
일부러 더욱 자페르 준장의 명예와 권위를 세워주는 내용으로 통화는 이루어졌다.
적당해야 한다.
장군자리까지 오른 사람을 옆에 두고 칭찬한다는 건 자칫 모욕으로 비춰 질 수가 있다.
휴전이 길어지자 권총수에 대한 비판과 못 마땅해 하는 소리가 주위에서 흘러나왔다.
자신 또한 달갑지 않았다.
진압은 빠를수록 좋다.
오래 끌수록 동조세력이 등장하고 국제사회 여론이 나빠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으음!”
파흐드 왕세자는 자신도 모르게 미안한 생각과 더불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흔히 이런 걸 두고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술이라고 한다.
‘不戰而勝(부전이승)’
오래전 손자병법이라는 중국 고전을 읽다가 알게 된 내용이다.
손자가 말하길 ‘병법은 적국을 온전히 보전하면서 이기는 것을 으뜸으로 하고, 적국을 쳐서 이기는 것을 그 다음으로 한다. 백번 싸워 백번 이기는 것을 최고로 하지 않는데, 싸우지 않고 굴복 시키는 것을 최고라 한다.(부전이굴인지병 선지선자야(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그 대목을 읽으면서 말인 즉 좋다.
말 그대로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아직까지 싸우지 않고 이겼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권총수가 실천해 보였다.
“수고했네.”
“이제 마음 편히 가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천천히 오세요. 많이 수고 했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난 인사였다.
태어나 지금처럼 한 사람에게 뜨거운 감동을 느껴본 적이 없다.
전화를 끊고 사울란에게 건넨다.
“준비해야 할 것 없나?”
“뭘 준비할까요.”
“선물을 줘야 하겠지. 헛헛! 정말 멋있는 친구야. 알라께서 내게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 주셨어.”
가브리엘은 알라의 사자(使者)로 인식되는 대표적인 천사다.
그만큼 파흐드 왕세자의 가슴이 뜨거워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