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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165화 (165/651)

제165화: 탈출(2)

윤태섭은 쏘아보는 박세경을 향해 능글맞게 웃었다.

“누구도 접근하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분초를 다투는 이런 중대한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지는 않아요.”

“글쎄 말입니다.”

윤태섭은 즐거운 일이라도 만난 듯 싱글벙글이었다.

비웃는다.

당신 같은 여자들이 무슨 정치를 알겠냐는 얼굴이다.

정치인에게는 권력보다 더 우선한 건 없고, 오로지 권력 유지를 위해 하루를 살아간다.

경제도 애국심도 권력 이후의 일일 뿐이다.

한화 28조가 작은 돈은 아니지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그 보다 열배 백배의 돈이 날아가는 한이 있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이 일로 벌어지는 어떤 후폭풍도 당신이 책임져야 할 거에요. 난 당신이 결코 대통령께 보고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요. 형편없는 싸구려야.”

박세경이 돌아서 갔다.

윤태섭은 굳은 얼굴로 박세경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싸구려’

윤태섭의 주먹이 떨렸다.

스스로 권철태의 그림자가 되고, 청소부가 되길 자처했다.

권철태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모와 모욕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듣는 싸구려라는 말이 왜 이렇게 비수처럼 가슴에 꽂히는가.

명품 브랜드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으나 아직까지 싸구려 취급은 받지 않았다.

‘네 년을 기어이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말겠다.’

윤태섭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차가 멈추고 두 사내가 내렸다.

넥타이 없는 정장에 구두를 신었는데 단단한 체구를 지녔다.

두 사람은 잠시 담배를 피워 물며 뭔가 얘기를 나누더니 오른쪽 사내가 불을 끄고 병원로비로 들어섰다.

로비로 들어선 사내는 주위를 살피더니 원무과 직원에게 물었다.

“조금 전 구급차에 실려 온 환자 어디에 있습니까?”

원무과 직원은 모르는 듯 옆에 있는 동료에게 물었다.

“알아?”

“잠깐만요?”

직원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원무과입니다. 30분전쯤 119 환자 들어왔죠? 아 알겠습니다.”

“응급실에 있다는데요.”

“감사합니다.”

사내는 가볍게 미소를 짓고 응급실 쪽으로 걸어갔다.

오른쪽 복도로 방향을 틀었다.

응급실이란 글씨가 보이면서 문이 닫혀있다.

슥!

자동문 버튼을 누르자 닫힌 문이 좌우로 열렸고 복도에는 응급환자들의 보호자들이 벽쪽으로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응급실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굳게 닫혀있다.

스윽!

사내는 망설이지 않고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

커텐이 짙게 드리워진 응급실 곳곳에서 비명과 신음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사내는 지나갈 때 마다 닫힌 커텐을 슬쩍 슬쩍 젖히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여기저기 살피며 다니던 사내가 한곳에서 멈췄다.

링겔 줄을 줄줄 달고 있는 산소호흡기의 사내가 있다.

그런데 의사도 간호사도 보이지 않고, 특히 수술실이나 중환자실로 옮겨지지 않는 걸 보면 목숨에는 지장이 없는 모양이었다.

스윽!

커텐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내는 오른쪽에 설치된 EKG 모니터를 바라보는데 혈압과 심장박동 모두 정상이다.

슥!

사내는 주머니에서 흰색의 라텍스 장갑을 꺼냈다.

양손에 장갑을 낀 사내는 산소마스크를 벗기더니 권총수의 입을 막으려 했다.

질식사 시키려는 것이었다.

탁!

어느 순간 권총수의 오른손이 사내의 손목을 쥐었다.

허억!

사내는 소스라치며 놀랐다.

“으으으!”

왼손을 뻗어 만약을 대비해 차고 온 권총을 뽑으려 했는데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사내는 갑작스런 신체 변화에 당황하며 있는 힘을 모두 쏟아 잡힌 손을 빼내려 했다.

사내는 입을 벌렸다.

안 된다.

도무지 손가락 하나를 움직일 힘이 없다.

힘을 쓰기 위해 노력했지만 바닷물에 흐느적거리는 미역처럼 몸이 늘어진다.

권총수는 상체를 일으켰다.

사내는 기겁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권총수는 폭발당시 입고 있었던 복장 그대로였는데 옷은 걸레조각이 되어 있었다.

생각할수록 아찔한 상황이었다.

사막에서의 기연을 얻기 전이라면 꼼짝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내공은 이제 백년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백년의 내공에 올라서면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호신강기가 형성된다.

내공 수위에 따라 호신강기의 위력도 달라지지만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 큰 부상을 입은 건 아니었다.

충격에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곧바로 불길을 피해 욕실로 대피했다.

소방관들과 같이 걸어 나올 수 있었지만 분명히 자신을 노린 테러다.

그래서 함정을 팠다.

권총수는 잡은 손을 놓아 주었다.

완맥을 풀어 주었는데도 사내는 옴짝달싹 하지 못했는데 마혈이 제압당한 것이다.

권총수는 사내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찾아 꺼내더니 번호를 눌렀다.

“사장님.”

“어딥니까?”

다른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자 채명천은 놀란 모양이었다.

권총수는 별일 없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사건을 간략하게 말해 준 뒤 혹시 종로경찰서에 인맥이 있느냐고 물었다.

관할이 종로경찰서이기 때문에 차영수가 서장으로 근무하는 강남경찰서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

“한 명 있습니다. 과장인데 후배죠.”

사내는 종로경찰서 형사과장 이춘만이라고 했다.

채명천은 자신이 직접 전화하여 사건 전모를 설명할 테니까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내...내 몸에 왜 이럽니까. 뭘 어떻게 한 거요? 왜 꼼짝 할 수가 없느냐는 것입니다.”

“하나씩 물어야 대답을 할 것 아닙니까. 담배 있습니까?”

“오른쪽 상의 주머니에 있소.”

권총수는 사내의 상의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를 꺼냈는데 눈을 빛냈다.

말보로 레드였다.

권총수는 침대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더니 커텐을 젖히고 밖으로 걸어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만섭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죽어 있어야 할 권총수가 누더기가 된 차림새로 응급실쪽 현관문을 열고 나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정만섭은 급히 후배 장영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엉뚱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여보세요.”

“으헉!”

권총수가 자신의 전화를 받으면서 씨익 웃는다.

정만섭은 권총수가 후배 장영도의 핸드폰을 갖고 있는 것에 너무 놀라 아무소리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권총수는 빙그시 웃으며 핸드폰을 귀에 붙인 채 다가왔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바로 면전에 있는데도 핸드폰에 대고 말을 한다.

정만섭은 핸드폰을 천천히 내렸다.

휙!

권총수는 받으라는 듯 핸드폰을 던졌다.

정만섭은 얼떨결에 두 손으로 던져준 핸드폰을 받았는데 권총수가 자신이 앉아 있던 벤치에 엉덩이를 붙였다.

“국정원 사람들이오? 총을 갖고 있던데?”

이쯤 되면 할 말이 없어진다.

정만섭은 이마를 찡그렸다 펴기를 수차례 했지만 눈앞의 상황이 해석 되지 않았다.

“오는군!”

혼잣말처럼 뱉은 말에 정만섭은 시선을 돌렸다.

한 대의 승용차가 들어와 주차장에 세우더니 세 명의 사내가 내렸다.

그중 한 명은 호텔 지배인 민기철에게 질문을 했던 형사 소문석이었다.

가장 앞서 걸어온 대머리가 벗겨진 인물이 채명천의 후배라는 형사과장 이춘만으로 보였다.

권총수는 담배를 비며 끄더니 천천히 응급실로 걸어 들어갔다.

정만섭은 권총을 갖고 있었지만 꺼내 발포 하지 못했다.

무장 공작원도 아닌 국민을 상대로 벌건 대낮에 권총을 사용했다가는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힐 일이다.

정만섭은 멀리 서쪽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는 석양을 바라보았는데 얼굴이 암울해졌다.

뭔가 대단히 잘못 되고 있다.

어제 밤 위로부터 호텔에 묵고 있는 권총수를 죽이라는 지시가 내려왔을 뿐이다.

그래서 오늘 낮에 손님으로 가장하여 들어가 전화기에서 폭탄을 설치 한 것이다.

중동도 아니고 국내라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사건이다.

전장에서도 사용하기가 쉽지 않은 부비트랩을 객실 전화기에 설치하여 투숙객을 죽이려 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생각만 해도 오싹했다.

이를 문채 전화를 걸어 현재 상황을 보고했다.

뚝!

보고를 받은 명령자도 너무 충격을 받은 듯 얼어붙었다.

“과장님!”

말이 없다.

지시한 사람은 지금 자신의 삶은 몰라도 최소한 꿈은 사라졌다는 걸 느낀 것이다.

권총수를 죽이려 했던 사내는 종로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 되었다.

그런데 경찰로부터 아무런 발표가 없었다.

경호실 사건과 달리 국정원 사건은 잠잠했다.

호텔 폭발 사건도 단순 화재라는 짧은 뉴스로 보도되는데 그쳤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은 아니지만 비슷한 결말이 되고 만 것은 분명했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아직은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건데’

레임덕이라고 해도 권철태의 힘이 살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사우디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퇴출직전에 있다는 뉴스와 언론 보도가 나가면서 온 나라가 시끄러워졌다.

28조가 작은 돈이냐.

청년 일자리 10만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돈이라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들이대면서 야당은 파상공세를 퍼부었다.

더욱 사태에 불을 지른 것은 외교부장관 박세경의 입이었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청와대를 찾아갔지만 민정수석이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대통령 면담을 사정했지만 급한 일로 지금은 곤란하다는 대답만 반복했다는 기사에 시민단체들까지 들고 일어났다.

28조원 보다 더 급한 일이 뭔지 당장 밝히라면서 야당은 국정조사와 특검을 요구했다.

몇몇 단체에서는 대통령과 민정수석을 직무유기, 업무방해로 검찰에 고소하기까지 했다.

피식!

기사를 보며 권총수는 실소를 짓고 말았다.

정작 중요한 건 사우디 사건이 아니라 개인이 국가 권력을 동원해 자신을 죽이려고 한 경호실과 국정원 사건이다.

이건 인권과 직결되고, 민주주의 근간인 자유와 평등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있었다.

흔히 하는 말로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으나 인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지고 보호 되어야 하는 기본권인 것이다.

인권이 침해되는 나라치고 부국강병을 이룬 나라는 없다.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였다면 경호실 사건과 국정원 사건을 더 비중있게 다루면서 총리와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을 것이다.

여당은 여론에 밀려 국정조사를 합의했다.

특검은 일단 국정조사 결과를 보고 추후 논의키로 했다.

그런 가운데 윤태섭은 한 사내와 마주 앉아 있었다.

주 사우디주재 서기관 이철병이었다.

“지금 누구라고 했습니까? 권총수라는 사람만이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습니까?”

이철병은 윤태섭을 빤히 보았는데 그렇다는 뜻이었다.

“수석님!”

노크소리가 들리며 직원 한 명이 들어왔다.

“지금 막 재계 관계자들이 도착했습니다.”

이런 회의는 비서실에서 관여한다.

그러나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는 것 때문에 보고는 받는다.

윤태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알겠소.”

이철병이 허리를 구부려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윤태섭은 창가로 다가가 문을 열어젖혔다.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온다.

국정원 사건은 그야말로 목숨 걸고 막았다.

만약 공론화 되어 버리기라도 했다면 가뜩이나 레임덕에 들어선 대통령은 자칫 허수아비로 전락할 수가 있었다.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읍소하다시피 하며 가까스로 안정시켰는데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누고 들어오는 권총수가 28조 사우디 아라비아 건설시장의 키를 쥐고 있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다.

윤태섭은 책상으로 다가가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는 이철병이 주고 간 권총수의 핸드폰 번호가 쓰여 있었다.

잠시 번호가 적힌 종이를 바라보던 윤태섭이 핸드폰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상대가 누구냐고 묻는다.

“윤태섭이오.”

“그렇군요.”

윤태섭은 멈칫했다.

뭐가 그렇단 말인가.

자신이 전화를 걸어올지 알았단 뜻일까.

“아무래도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한 번 뵙죠.”

“이번에는 탱크라도 끌고 나올 셈입니까?”

질근!

비아냥에 윤태섭은 이를 악물었는데 사내가 다시 조롱한다.

“어디서 만날까요? 탱크 쏘기 좋은 곳이라면 군부대가 좋지 않겠습니까? 아 맞아 청와대에 장갑차 있죠. 내가 그곳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윤태섭은 가만 눈을 감았는데 눈썹이 심하게 떨린다.

이런 수모는 처음이다.

권철태를 대통령 만들기 위해 수많은 작당을 하고 경쟁자를 뇌물과 섹스 스캔들로 중도 하차시켰지만 이런 노골적인 모욕은 없었다.

“진흥로에 조용한 커피숍이 있지요. 그곳에서 기다리겠소.”

윤태섭은 전화를 끊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파악!

돌연 있는 힘껏 핸드폰을 바닥에 내 던져 버렸다.

‘개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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