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화: 관련자(1)
야구 모자를 눌러쓴 가죽점퍼 사내가 칼을 꺼내 들었다.
커피숍에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도 그는 전혀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건 자신이 어떤 사건을 일으켜도 무마하거나 사회적 파장을 최소화 해줄 배경이 확실하다는 걸 입증했다.
휘익!
곧장 칼을 내려찍었다.
우당탕!
채명천은 바닥을 뒹굴며 사내의 칼을 피했다.
휘익!
채명천은 옆에 놓인 의자를 집어 던졌다.
의자에 맞은 사내의 손에서 칼이 떨어졌고 채명천은 그대로 몸을 날려 사내를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커피숍은 난장판이 되었다.
워낙 격렬한 싸움에 누구도 말릴 생각을 못했고 지켜보기만 했다.
두 사람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자세를 낮추었다.
채명천은 학교다닐 때 유도를 했다.
경찰관 시험에서도 뛰어난 유도능력이 플러스로 작용했고 그래서 강력계만 전전했다.
사내는 채명천의 자세에서 유도인의 냄새를 간파한 듯 발차기 공격 대신 복서처럼 계속 날카로운 쨉을 뻗었다.
‘복서다’
사내의 주먹이 흔들리지 않는다.
복싱을 제대로 배운 사람의 모습이었다.
잔 주먹에 맞아 순식간에 채명천의 얼굴은 거덜 났고 피가 흘렀다.
“젠장!”
채명천은 커피숍을 떠나기로 했다.
싸움도 중요하지만 경찰에 잡히기라도 하면 상대는 무사하고 자신만 엮일 것이다.
아내에게 연락한다는 말을 남기고 도망쳤다.
그때부터 둘의 쫓고 쫓기는 일이 시작되었다.
먹는 시간도 부족했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을 의심하다 보니 피로가 굉장했다.
후루룩!
마지막 면발까지 입속에 넣은 뒤 컵 가득 물을 따라 마셨다.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온 채명천은 학생들이 둘러 앉아 있는 길가 공원에 앉았다.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고 핸드폰을 들었다.
한국 시간 오후 세 시면 그쪽은 아홉 시 정도 될 것이다.
신호가 몇 번 가는데도 받지 않았다.
십여 차례 신호가 가는데도 받지 않아 일단 끊고 다시 재다이얼을 눌렀다.
투르륵!
바람에 신문지 조각이 날아와 구둣발에 걸린다.
전화기를 귀에 대고서 허리를 숙인 채명천은 발목에 걸린 신문을 주어 들었다.
멈칫!
신문 조각을 주워든 채명천의 눈이 빛났다.
이번에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핸드폰을 내리고 채명천은 신문에 시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사우디 군부 쿠데타’
얼마 전 그와 통화를 했을때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다고 했다.
채명천은 눈을 빛내며 기사를 쭉 읽기 시작했다.
기사 내용은 파흐드 왕세자를 추종하는 일단의 군인들이 기습적으로 알살만 왕세자와 부친이자 현 국왕을 전격 체포 했으며 현재 ‘사우디민주국민행동’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정당을 해산하고 곧 총선을 실시한다고 했다.
그런데 마지막 부문에서 눈을 끄는 기사가 있었다.
‘한편 사우디 사정에 정통한 익명의 외교관은 이번 사우디 쿠데타의 배후에 용병들이 있다면서’
언젠가 직업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자신의 고객은 빙긋 웃으며 오른손 검지를 당기는 시늉을 했다.
얼른 알아보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고객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용병이오.”
“용병? 그 용병 말입니까? 특수부대 출신들이 전역하고 보안기업에 간다는?”
권총수는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이잉!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무수하다 싶을 만큼 많이 찍힌 숫자는 단번에 국제전화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여보세요.”
“사장님?”
“전화 하셨군요. 바쁘다 보니 받지 못했습니다. 일은 잘 처리되고 있습니까?”
“제가 지금 편한 상태가 아닙니다.”
“쫓기고 있군요?”
“맞습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나섰습니다.”
“그건 그들의 범죄를 인정한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사장님께서 시키는대로 좋게 제의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옵니다. 아 참, 어제 메일을 보냈는데 보셨습니까?”
“아직 보지 못했소.”
“모든 사건 기록과 자료를 보냈습니...웁!”
“왜 그러십니까?”
채명천은 고개를 돌렸다.
은광(銀光)이 눈을 부시게 한다.
추적자다.
마낙춘이 목에 사시미 칼을 대고 있었다.
잠시 통화를 하느라 방심한 것이 화근이다.
스윽!
마낙춘은 채명천에 손에 들린 핸드폰을 빼앗아 자신의 귀에 댔다.
“누구십니까?”
“당신이 의뢰인인가보군?”
“존함이?”
“존함일 것 까지는 없고 마낙춘이라고 하는데 번호를 보니까 국내는 아닌 것 같고?”
“채 사장님은 지금 어딨소?”
“아직은 살아 있소.”
“부탁하나 합시다. 채 사장님 손대지 말아 주시죠.”
마낙춘은 실실 웃었다.
“부탁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왜 이렇게 빳빳해.”
“살려주시죠.”
싸악!
칼로 목을 그으면서 핸드폰을 가져대 댄다.
칼이 살을 베는 소리가 똑똑하게 들렸다.
“마낙춘씨?”
“당신 정체가 뭐요?”
“권총수, 난 영국 킬로 알파 서비스 소속의 용병이오. 마지막으로 부탁합니다. 채 사장님을 그만 내버려두시죠.”
“흐흐흐!”
찌이익!
칼이 더욱 깊게 파고 들었고 채명천이 옆으로 쓰러졌다.
털썩!
“으음! 마낙춘이라고 했소? 나중에 시간을 내어 한번 찾아 가죠.”
그리고 전화는 끊겼다.
마낙춘은 핸드폰을 깨끗이 닦더니 쓰러진 채명천 옆에 던지듯 놓고 사라졌다.
“아악!”
한 여학생이 비명을 질렀고 사람들이 달려왔다.
잠시 후 119가 달려와 채명천을 싣고 사라졌다.
권총수는 소파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시 골똘히 뭔가를 생각 하는 듯 하던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대낮인데도 사무실 주위로 경비가 삼엄하다.
런던과 아프리카에서 근무하던 용병 일백 여명이 급히 보충되었다.
이번 쿠데타에 KAS가 깊숙하게 개입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우디 곳곳에 퍼진 사업장이 위험해 진 것이다.
전 국왕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보복 차원에서 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무중이던 용병들이 담배를 피워 물고 있는 권총수를 흘깃 거렸는데 존경과 흠모의 빛이 가득하다 못해 넘쳐 흐른다.
베네수엘라 권력을 바꿔 버렸고 이번에는 이란과 중동의 지배자로 쌍벽을 이루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정을 종식 시켜 버렸다.
파흐드 왕세자는 내각제로 헌법을 개정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그리고 정치범으로 수용되어 있던 일만 여명의 민주인사들을 석방시키면서 대대적인 화합과 통합에 나섰다.
정당활동을 허용하며 입법기관인 국회를 설치하고 사법부 역시 독립기관으로 분리한다는 발표에 그때까지 숨죽이고 있던 국제사회의 여론이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섣부른 사람들은 중동에 진짜 평화가 도래하고 있다는 표현을 했다.
베네수엘라 때에는 용병들의 정치개입이라는 비난이 적지 않았지만 사우디 권력찬탈에 국제사회는 침묵으로 동의하고 긍정적인 시선을 보냈다.
“뭐하는가?”
에반이 랜드로버에서 내렸다.
스톤스 회장을 배웅하고 돌아 오는 길이다.
파흐드 왕세자는 스톤스 회장을 불러 이번 정권교체에 도움 준 것에 감사를 전한 것이다.
“가셨습니까?”
“통장들 확인해보게. 보너스를 넣은 모양이야.”
피식!
권총수는 실소를 지었다.
누구도 보너스 요구를 하지 않았는데 알아서 입금했다는 건 파흐드 왕세자로부터 예상보다 훨씬 큰 금전적 득을 올린 모양이었다.
길지 않는 용병생활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었다.
오너는 짜다.
정말 짰다.
자신이 겪어본 스톤스는 쥐어짜도 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을 만큼 금전에 악착같았다.
아카데미 다인코프 마르케스 오너들 모두가 짜다는 소문이 용병들 사이에서는 파다하다.
아람코 주식 일부를 스톤스에게 지급한다는 약속도 있고, 구두이지만 사우디 건설현장의 70퍼센트를 KAS에 넘긴다는 계약도 했다는 말을 들었다.
권총수는 핸드폰을 이용해 자신의 거래 은행에 입금 상태를 알아보았다.
‘100만 달러.’
보너스 치고 엄청난 돈이다.
지이잉!
전화가 걸려왔는데 지금 파흐드 왕세자를 경호하고 있는 오민철이다.
“흐흐흐! 총수야. 50만달러 들어왔다.”
권총수는 입을 반쯤 벌렸다 닫았다.
같이 고생했는데 자신은 백만 달러를 주었고 오민철은 절반인 50만 달러라니 너무 차이가 크다.
오민철의 성격에 알면 눈 뒤집을 것이다.
권총수는 피식 웃고서 사무실로 들어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채명천이 보낸 메일을 보려는 것이었다.
메일이 왔다.
권총수는 지체 않고 메일을 열어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메일 내용을 읽어 나가던 권총수의 표정이 갈수록 굳어지기 시작했다.
약 10여분간에 걸쳐 두 번을 반복해서 읽고 난 권총수는 잠시 화면에서 시선을 뗐다.
‘대통령 권철태는 국회의원 시절 혜성처럼 등장하여 충무로를 휘어잡은 오설지와 연말연시 불우이웃돕기 행사장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첫눈에 반했고 유부남인데도 오설지의 권철태를 향한 사랑은 적극적이었다.
두 사람은 세상의 눈을 피해 만남을 지속했고 그러던 차에 아이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 승승장구 하던 권철태는 조금씩 오설지란 존재가 부담스러워진다.
특히 권철태의 주위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처리할 것을 요구한다.
당 대표를 넘어 청와대 입성을 꿈꾸는 권철태에게 자칫 오설지 문제는 치명타로 작용할 위험이 있었다.
권철태는 보좌관이던 윤태섭(현 민정수석)에게 모든걸 일임했다.
윤태섭은 고향후배 오동칠을 사주했고 눈 오는 날 촬영을 위해 이동하던 오설지는 그렇게 트럭에 날아간다.
그리고 비밀 유지를 위해 오동칠을 제거하는데 당시 국제PJ파 최고의 칼잡이 마낙춘이 움직였다.
브레이크 조작으로 오동칠을 보낸 마낙춘은 그것도 모자라 절벽 아래로 내려가 마지막으로 오동칠의 가슴에 칼을 박는다’
대충의 메일 내용이었다.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얼마 전에 새로 입사한 영국군 지원사령부 출신 여군 오브리가 생긋 웃으며 물었다.
백인여성으로 우리 나이로 스물 일곱이다.
군출신 답게 여자면서도 행동에 절도가 있고, 특히 군생활 경험이 있어서인지 용병들에 대한 이해가 넉넉했다.
“드세요!”
커피 한 잔을 내 놓았다.
“감사합니다!”
권총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총수, 그 말 사실이에요. 사우디 국방부 전술기획관으로 옮겨 간다던데?”
권총수는 빙긋 웃었다.
“어디서 들었죠?”
“가긴 가나보죠?”
사실 그런 제의가 있었다.
외인부대에서의 풍부한 실전경험과 민간 용병으로 활동하면서 체득한 게릴라전 및 소규모전투 전술은 누구도 갖고 있지 못한 놀라운 학문이다.
파흐드 왕세자는 자신의 그런 전술과 전투경험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사우디 군에 배포할 뜻을 내 비쳤고 아울러 전술기획관 자리까지 제안했다.
파흐드 왕세자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권총수가 세운 공훈을 평가하기 위한 배려였지만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전장을 누비는 사람이지 이론적인 학술서를 만들고 펴내는 사람이 아니다.
현재 사우디 국방전술기획관은 네이비 씰 출신의 중령이 맡고 있다.
“생각 없습니다.”
“왜요? 아주 힘 있는 자리이고 특별초빙 형식이기 때문에 연봉도 두둑하다던데요.”
“난 방아쇠 당기는 일이 좋지 이빨 터는 건 딱 질색입니다.”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 에반의 방을 노크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에반은 누군가와 통화중이었고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듯 앉을 것을 권했다.
권총수는 소파에 앉아 앞에 놓인 사우디 일간신물을 살폈다.
현재 사우디의 모든 언론은 군부로부터 통제를 받고 있다.
제한된 기사만 내보내고 있는 것이다.
사우디에서 발행한 일간지를 대충 살피고 이번에는 영문판 신문을 들척였다.
멈칫!
5면을 넘겨 살피던 권총수가 맨 윗부분을 바라보았다.
‘더 가디언(The Guardian)’ 영국의 진보적인 일간지다.
날짜는 5일 지난 것이었는데 길게 늘어진 토브(Thobe: 길게 내려온 이슬람 복식의 윗도리)와 헐렁한 바지 시르왈(Sirwal)을 걸친 한 남자 사진이었다.
머리에는 히잡을 둘렀으며 왼손에 HK-416을 들고 있었다.
권총수는 눈을 찌푸리며 사진을 좀 더 가까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