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141화 (141/651)

제141화: 비밀경찰(2)

전혀 예상치 못한 방문에 파흐드 왕세자는 좀체 안정을 찾지 못했다.

“담배 있나?”

권총수의 눈이 커졌다.

오래전 건강 때문에 담배를 끊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다시 찾는다는 건 그만큼 샤일란의 방문이 당황스럽다는 뜻이다.

권총수는 피우던 말보로 레드를 한 개비 건네주고 라이터로 불까지 붙여 주었다.

“캡틴!”

왕세자의 부름에 권총수는 깜짝 놀랐다.

캡틴이란 호칭은 팀원들이 부르는 것일 뿐이다.

“샤일란이 왜 왔을까?”

파흐드 왕세자는 조용히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레드라인(넘지 말아야 할 한계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 차원일 것입니다.”

“레드라인 이라.”

파흐드 왕세자가 고개를 돌렸다.

“레드라인을 넘어선 건 그쪽일세. 아카데미로도 성에 차지 않아 사우디 현역군인을 보내 날 죽이려 했다는 걸 자네도 알거야.”

“레드라인은 약자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힘 있는 쪽이 긋는 것이죠. 더 이상 혈육이라는 것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것일 겁니다.”

“결국 날 찾아온건 선전포고였군.”

“일단 가족들 신변보호부터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인원으로는 부족합니다.”

KAS에서 현재 다섯 명이 가족들을 보호하고 있다.

“제가 본사에 20명 더 증원해 줄 것을 요청하겠습니다.”

“전쟁은 숫자 싸움 아니던가.”

“스물다섯 명이면 가족 한 명당 다섯명이 에워쌉니다. 바람은 들어가겠지만 총알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자네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어.”

왕세자가 빙긋 웃으며 경호실장 카밀리가 들고 있는 재떨이에 담배를 껐다.

“가자고!”

파흐드 왕세자가 일어나 앞장을 섰다.

문을 나서자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행경호원들이 에워싼다.

권총수는 무전기를 켰다.

“내말 들리나?”

“오케이!”

나카야마 목소리다.

조금 전까지는 무전이 되지 않았는데 샤일란 국장이 떠나면서 전파방해가 풀어진 모양이다.

파흐드 왕세자 일행이 궁으로 돌아갔다.

무려 3개월 만에 돌아 온 것이다.

그런데 그 날 밤 승용차 한 대가 왕궁으로 들어갔다.

승용차는 이미 약속이 되어 있는 듯 정문 경비병들에게도 전혀 제재 받지 않았다.

승용차는 별관으로 향했다.

왕궁 별관은 주로 외부 손님 접대를 위한 만찬장소로 쓰인다.

끼이익!

승용차가 멈추고 조수석에서 비서 사물란이 내렸고 뒷문이 거의 동시에 열렸는데 권총수였다.

“가시죠”

권총수는 사물란을 따라 갔다.

작은 회랑으로 들어서 한참을 걸었다.

회랑이 끝나고 오른쪽으로 꺾어진 권총수는 눈을 빛냈다.

물이 귀한 사막의 나라에서 아름다운 연못이 있었다.

연못가 주위로 대추야자나무와 사우디에서는 보기 힘든 유칼립투스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어서 오시오.”

연못가 딱딱한 벤치에 앉아 있던 파흐드 왕세자가 일어났다.

권총수는 가벼운 목례로 예를 취한 뒤 나란히 섰다.

“쉬어야 할텐게 갑자기 불러들여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우린 왕세자님의 경호원들입니다.”

“캡틴의 마음은 항상 넉넉합니다. 정말 멋진 모습입니다.”

파흐드 왕자의 칭찬에 권총수는 빙긋 웃었다.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이제 내게는 두 개의 길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알 살만 왕세자에게 무릎을 꿇고 그의 처분을 받는 것이고.”

파흐드 왕세자가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

“두 번째는 내가 먼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가지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내게 두 번째 패는 선택하기가 쉽지 않아요.”

권총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파흐드 왕세자는 지금 자신이 이길 확률이 없다고 보는 모양이었다.

“무릎을 꿇으면 온전하리라 보십니까?”

“아니오. 아마 죽을 것이오. 그냥 죽느냐, 아니면 온갖 고초를 당한 뒤에 목이 잘려 사막에 버려지느냐 두 가지의 길 뿐인 것 같습니다.”

갑자기 기세가 꺾였다.

샤일란 국장의 방문이 결정타로 작용한 듯 했다.

비밀경찰 마비히스는 사우디 정치인들에게는 저승사자와 다를 바 없다.

특히 사우디의 민주화를 외치는 인물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다.

“왕세자님. 왜 저를 부르셨습니까? 저희 회장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나를 불렀다고 들었습니다?”

파흐드 왕세자는 묵묵히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오라고 하신 것입니까?”

파흐드 왕세자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주위는 캄캄한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권총수는 가끔씩 주위를 훑어보았는데 이십장(60미터)이내에는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 고요한 밤에 나직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면 50미터까지는 들린다. 물론 대화 내용까지 알아들으려면 30미터 이내로 들어와야 한다.

즉 지금 주위에 두 사람이 나누는 얘기를 엿들을 만한 위험은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왕세자는 여전히 고민에 빠진 듯 침묵했고 권총수가 결심 한 듯 말을 이었다.

“외인부대 시절 절 유난히 챙겨주시던 중대장이 있었죠. 그분께서 이런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위대한 사람에게는 목표가 있고 평범한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다.”

순간 침묵하던 파흐드 왕세자의 눈이 빛났다.

“나를 가르쳤던 카톨릭의 어느 수녀님께서 또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가장 건강한 사람도, 영양상태가 아주 좋은 사람도, 지능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었다는 겁니다. 살아야 한다는 절실한 이유와 살아남아서 해야 할 구체적인 삶의 목표를 갖고 있는 사람만이 종전 후 세상을 보았다더군요.”

“놀라운 말이네.”

“왕세자님, 한 발 앞서 나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슨 뜻인가?”

“왕세자님께서 퇴원 하루 전에 찾아와 협박을 하고 갔습니다. 선전포고죠. 적이 공격을 하겠다고 말했는데 쳐들어 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건 바보 짓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선수를 치는 것도 방법입니다.”

출렁!

파흐드 눈썹이 파동을 일으켰다.

상당히 놀란 모양이었다.

“사우디는 중동의 맹주이고 이슬람의 본향입니다. 사우디를 쥐면 이슬람을 거느리는 것이죠.”

“목을 걸어라?”

“죄송합니다만 혁명을 꿈꾸면서 목숨을 부지할 생각을 하셨습니까?”

파흐드 왕세자의 눈이 타올랐다.

매섭게 노려보듯 하더니 돌연 큰 소리를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핫핫핫! 핫핫핫!”

마치 목에 걸렸던 가시가 내려갔을 때의 통쾌함이 묻어나는 앙천대소였다.

한참 큰 소리로 웃던 파흐드 왕세자가 단호히 말했다.

“두렵지 않은가?”

“내가 죽어 울어 줄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살아야 겠죠. 하지만 전 미련 없습니다.”

“내가 사람 하나는 제대로 봤어.”

파흐드 왕세자가 다가오더니 권총수의 양손을 힘 있게 움켜쥐었다.

“캡틴은 내 친구요.”

힘차게 손을 흔들더니 어둠속을 향해 말했다.

“가져와!”

사물란이 다가와 작은 상자 한 개를 건네주었다.

“받게.”

권총수는 파흐드 왕세자가 건넨 작은 상자를 받았다.

숙소인 오층 건물로 곧장 돌아왔다.

1층은 사무실이고 지하실은 무기고, 2층은 작전 분석실, 3, 4, 5층은 숙소로 사용한다.

현재 파흐드 왕세자 경호에 동원되는 KAS 용병은 모두 30명이다.

20명은 파흐드 왕세자 스케줄에 맞춰 움직이고 10명은 대기인원이다.

오민철을 포함한 대부분의 용병들은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

권총수는 그들의 리더였고 누구도 권위에 도전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별일 아냐. 그만들 쉬라고.”

권총수는 빙긋 웃었고 모두가 각자의 침대로 돌아갔다.

권총수는 1층 사무실로 내려와 파흐드 왕세자로부터 받은 상자속 USB를 꺼냈다.

컴퓨터 화면에 많은 사진들이 떴는데 하나 같이 사우디 정부 고위각료들이다.

권총수는 천천히 한 명 한명 훑어보았다.

별을 달고 있는 군복 차림의 군인들이 적지 않았다.

현재 사우디군을 움직이는 지휘부였다.

한 시간쯤 지났다.

탁!

엔터를 치며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권총수는 팔짱을 꼈다. 한동안 생각에 잠긴 후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하늘은 별들로 물들었다.

딸칵!

담배를 피워 문 권총수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야 말로 살생부(殺生簿)로군.’

그랬다.

파흐드 왕세자가 건네준 건 알살만의 손과 발이었다.

아무리 단단한 나무도 가지를 모두 잘리고 나면 결코 살아나지 못한다.

명단이 만들어졌다면 속전속결(速戰速決)로 해치우는 것이 낫다.

자칫 비밀이 흘러나갈 수가 있고 칼도 뽑아보지 못한 채 도륙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팟!

담배를 피우고 있던 권총수의 눈이 빛났다.

후끈한 열기를 품은 미풍이 불어왔다.

사막의 모래 냄새가 진득하게 배인 후끈한 바람이었는데 권총수는 이마를 찌푸렸다.

‘땀 냄새’

미약하게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사람의 땀 냄새가 스며 있었다.

근처주민들이 풍길 수도 있지만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자정이 가까워 오는 시간에 누군가 땀 흘리며 일하고 있을 리는 절대 없다.

한 사람의 땀 냄새가 이렇게 바람에 실려 올수도 없다.

인간의 땀 냄새가 바람결에 실려 올 정도면 도대체 몇 명이어야 가능할까.

팔십 년 내공은 분명 평범한 인간과 전혀 다른 능력을 갖추게 만들었다.

“형, 혀어엉!”

권총수는 전음을 날리며 몸을 날렸다.

“비상, 비상!”

갑작스런 비상소리에 자고 있던 용병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적이야. 당장 무장해. 빨리, 안 돼, 불 켜지마.”

불을 켜려던 모리스가 멈칫하며 재빨리 총을 챙겼다.

타탁!

문을 열 시간적 여유도 없다.

각 층마다 작은 금고가 있고 그곳에 30발들이 탄창이 가득 들어 있는데 그냥 손잡이를 뭉개 버렸다.

삼매진화.

물론 팔십년 내공으로 쇠를 녹이지는 못하지만 힘으로 틀어버릴 정도는 된다.

“받아!”

권총수는 팀원들에게 30발들이 탄창을 던져주었다.

“적이 누구야. 아무것도 안보여?”

쌍안식 야시경을 쓰고 먼저 나간 오민철이 다시 뛰어 들어왔다.

지금 끼고 있는 쌍안식 야시경의 최대 인지거리는 150미터 이다.

그렇다고 160미터 거리의 적을 보지 못하는 건 아니다.

단지 방아쇠를 당길 만큼 분명하지 않을 뿐인데 그 마저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적이 최소한 훨씬 밖에 있다는 뜻이었다.

‘야시경으로도 확인이 안 되는 적을 어떻게 봤다는 거야.’

오민철은 야시경을 머리 위로 올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내공의 증가에 따라 오감 또한 상승하는데 환경, 기온, 습도, 풍속, 햇볕에 따라 제일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후각이다.

필시 사막쪽에서 이따금 불어오는 국지풍(局地風)에 실려 온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국지풍은 특정 지역에 갑자기 일어나는 작은 바람인데 사막과 도시의 온도차로 인해 가끔 불며 매우 약하다.

“각 비호(非壕)로 들어가 대기.”

자신들 눈에는 야시경을 꼈어도 보이는 건 없다.

그러나 누구도 의아해 하지 않았다.

권총수에게 과학적으로 분석되지 않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이제 없다.

다다다다!

모두가 건물을 내려가 달려갔다.

사무실을 옮기는데 장소는 무척 중요했다.

더욱이 아카데미와 극도의 긴장상태에 있는 관계로 언제든지 충돌이 벌어질 수 있기에 더 그렇다.

2013년 바그다드에서 활동하던 아카데미와 다인코프가 충돌을 했다.

아카데미 용병 세 명이 타고 가던 포도 익스플로러 앞으로 다인코프 용병들이 탄 승용차가 끼어든 것이다.

시비가 붙었고 주먹다짐이 있었는데 아카데미쪽에서 일방적으로 얻어 터졌다.

그리고 일주일 뒤 다인코프 바그다드 서부지역 사무실에 괴한들이 난입했다.

자고 있던 다인코프 용병 여섯 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

이라크 경찰은 사건 접수만 했을 뿐 조사에 나서지도 않았다.

단지 이교도와 용병들에 불만을 갖고 있는 이라크 민병대의 공격이라는 발표만 했을 뿐이다.

용병들끼리 싸움이 붙으면 가급적 주둔국가의 공권력은 개입하려들지 않는다.

자국 국민도 아닌 그들만의 전쟁에 끼고 싶지 않은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