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무덤에서 소환(1)
흐뭇한 모양이다.
하긴 자신을 죽이려 했던 바큘라가 죽었고 아카데미 용병들의 희생이 적지 않았다.
왕세자의 위치를 떠나 개인적으로도 통쾌한 복수인 것이다.
“내가 도와줄건 뭐 없소?”
에반은 환한 얼굴로 말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총수.”
권총수를 찾는 듯 두리번거린다.
권총수가 슬쩍 손을 들었다.
“반갑습니다. 많이 알고 있습니다.”
권총수에 대해 나름대로 많은 정보를 얻어 들었다는 뜻이다.
“총수만 믿습니다. 사물란!”
그러자 한쪽에 서 있던 사물란이 다가섰는데 작은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총수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뭐해. 왕세자께서 선물 주신다잖아.”
에반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권총수는 멈칫 하며 앞으로 걸어갔는데 파흐드 왕세자 역시 일어나 걸어왔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발걸음을 멈춘 파흐드 왕세자의 눈이 빛났다.
“KAS는 이제 나와 운명의 공동체입니다.”
순간 권총수의 눈이 빛났다.
그건 엄청난 선포였다.
나와 같이 가자.
나의 안전을 분명하게 지켜준다면 결코 그에 대한 분명한 보답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권총수 뿐만 아니라 에반을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 모두 놀라고 있었다.
일심동체.
같이 죽고 같이 살자
이에 화답하듯 권총수가 파흐드 왕세자를 향해 말했다.
“사우디의 미래는 왕세자님께서 이끌어 나갈 것입니다.”
“엇!”
누군가 기겁한 듯 비명을 터뜨렸다.
그건 사물란이었다.
아무나 함부로 입에 담았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는 충격적인 말이었다.
차기 국왕자리는 알살만 왕세자라는 것이 사우디 국내 뿐 만 아니라 국제 사회의 시선이다.
지금의 정치 지형을 보더라도 파흐드 왕세자가 차기 국왕자리를 잇는다는 건 불가능할 만큼 알살만 왕세자가 압도적이었다.
그런 상태에서의 지금 권총수의 말은 전혀 말도 안 되는 소리일 뿐이었기에 사물란이 놀란 것이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부드럽게 웃는 권총수를 보며 에반이 어금니를 물었다.
결코 허튼 소리를 하는 권총수가 아니다.
어쩌면 머릿속에 어떤 계획을 치밀하게 짜 놓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
“알라후 아크바르.”
권총수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
파흐드는 기분이 좋은 듯 다시 한 번 악수를 하고 돌아섰다.
권총수는 자리로 돌아왔고 파흐드 왕세자는 몇 마디 더 주고받은 뒤 다음 일정을 위해 자리를 떴다.
파흐드가 사라지고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야 열어봐. 돈 같은데 얼마냐?”
오민철이 다가섰다.
“민철!”
나카야마가 입을 열었다.
“감사는 문밖에서 하라는 일본 속담이 있어.”
“그게 무슨 개소리인데?”
“개소리가 아니라 금일봉을 받으면 거기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곳을 떠나 살피는 것이 예의라는 뜻이야.”
“어휴 저 쪽바리 개자식.”
오민철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그때 파흐드 왕세자를 따라 나갔던 사물란이 돌아왔다.
“왕세자께서는 아주 즐거워하십니다.”
그리고 권총수를 향해 말했다.
“왕세자께서는 총수를 믿는다고 몇 번을 말씀했습니다.”
일행은 30여 분간 사물란과 더 담소를 나눈 뒤 왕궁을 나왔다.
모두의 눈이 찢어졌다.
봉투 속에는 놀랍게도 뱅크오브아메리카 로고가 찍힌 백만 달러짜리 수표가 있었다.
모두가 자기나라 화폐 대비 계산하느라 바빴다.
역시 가장 빠른 사람은 오민철이었다.
“한화 12억 가량!”
“190만 루피.”
두 번째로 히말라야의 눈 사나이 비렌드라가 입을 쩌억 벌렸다.
“1억2천만엔.”
나카야마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고 브라질에서 온 오스카르는 계산이 안 된다는 듯 눈만 깜빡 거렸다.
피아퐁 역시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한 푼도 모자람 없이 정확히 6등분, 오케이?”
“으헉! 지금 우리와 이 돈을 공평하게 나누겠다는 뜻이냐?”
오민철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같은 표정을 지었다.
“총수!”
“하누님 마프 소사(ハヌニムマプ掃射).”
나카야마의 눈이 튀어나왔다.
딸칵!
권총수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말보로 레드를 물었다.
그런 권총수를 바라보는 에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리더로군’
저렇게 되면 직위나 계급이 존재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리더가 되는 것이다.
명령을 내리고 지시를 받는 상하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용병들의 가장 단점이 흔들리는 명령체계다.
회사에서 어느 정도 관계를 정리해 주지만 결정적일 때 질서가 흐트러지고 상명하복이 무너진다.
군대가 강한 건 상하관계가 지켜지기 때문이다.
계급이나 직위가 아닌 스스로 부하되기를 자청하게 되면 그 집단은 강철 보다 단단해진다.
‘권총수’
에반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 * *
다른 직원들은 몰라도 민정수석의 퇴근은 몹시 애매하다.
청와대라는 곳이 권력의 정점이다 보니 한 밤중에도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일이고, 비서실장을 비롯한 대통령 측근들이 주위에 적지 않지만 상황이 터지면 오랫동안 같이 정치를 해온 자신을 찾는다.
그러다 보니 함부로 칼 퇴근을 할 수도 없었다.
더욱이 대통령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여당 고위 인사가 개입한 대규모 특혜비리 대출사건이 터지면서 요즘 청와대 공기는 매우 냉랭하다.
“먼저 가겠습니다.”
하나둘 민정수석실 직원들이 방을 나갔고, 윤태섭은 전기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오랜만에 커피 한잔 마셔 보려는 것이다.
눈이라도 내릴 듯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다.
일기예보에는 밤 늦게부터 눈이 내릴 것이라고 했지만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멈칫!
물이 끓는 동안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다 눈을 빛냈는데 메일 한통이 와 있었다.
‘오동칠’
보낸 사람의 이름인 듯 한데 얼른 떠오르는 이는 없다.
자신의 메일 주소를 아는 사람은 결코 스무 명이 넘지 않는다.
청와대 들어오면서 민정수석 재임기간에만 사용 할 목적으로 새로운 메일을 만들었는데 아는 사람은 20여명 정도로 모두가 행정부와 여권 관계자들이다.
‘오동칠’
윤태섭은 다시 한 번 중얼 거리며 메일을 열었다.
‘존경하는 윤태섭 민정수석님, 공직기강을 바로세우기 위해 불철주야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윤태섭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칭찬인가 조롱인가.
흐음!
분명한 건 생전 알지도 못한 사람으로부터 존경 운운하는 말을 듣자 기분이 나쁘다.
‘인사가 길어봤자 바쁘신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닐 터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동칠을 아시죠. 저 모르십니까? 오동칠?’
윤태섭이 멈칫 했다.
오동칠이란 이름이 연거푸 등장해서일까 갑자기 입에 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동칠을 입안에 넣고 몇 번 불러본다.
오동칠.
오동칠.
멈칫!
한순간 저 아래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아주 오래된 기억하나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동칠!”
급기야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런 빌어먹을.”
윤태섭은 정수기의 냉수를 한 컵 받아 단숨에 마셨다.
쿵!
컵이 깨질듯 세차게 놓았다.
“어떻게.”
당황해 하며 다시 허리를 숙여 메일을 보았지만 분명 오동칠이다.
“놈은 죽었다.”
윤태섭은 벗어놓은 윗도리를 걸치고 곧장 사무실을 나갔다.
급히 들어서는 윤태섭을 보며 부인이 놀란 표정을 했다.
“여보!”
“나 신경쓰지 말고 하던 일 해요.”
윤태섭은 곧장 자신의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로 들어선 윤태섭은 옷도 벗지 않고 책상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왼쪽으로 있는 서랍은 세 개다.
찾던 물건은 맨 마지막 서랍에서 나왔다.
사진이다.
25년이란 시간이 흘러 상당히 빛이 바랬지만 사진에 담긴 내용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사진은 낭떠러지로 추락한 25톤 덤프트럭을 찍었다.
사진 속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오동칠이란 사내는 덤프트럭의 운전사이다.
즉 오동칠은 죽은 것이다.
그런데 오동칠을 자처한 놈이 나타났다.
꿀꺽!
윤태섭은 마른 침을 삼켰다.
죽은 자가 살아 날리는 없다.
딸칵!
담배를 피워 물었다.
살아 있다면 25년이 지난 지금에 메일 따위를 보낼 관계가 절대 아니었다.
‘누군가 그때 일을 알고 있다’
저승에 간 사람이 메일을 보낼 리는 없고 분명 주위 누군가다.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은 셋이다.
자신과 그리고 이 나라 이끌어가는 지고무상한 분, 마지막 한 명은 이 사진을 찍어온 사람이다.
윤태섭은 곧바로 핸드폰에서 연락처를 검색했다.
원하는 이름이 나오자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두 번도 신호가 가기 전에 상대가 받는다.
“안녕하십니까?”
상대가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자네 지금어딘가?”
“가게 입니다만?”
25년전 일 처리에 대한 보상으로 그는 강남에 참치 횟집 하나를 개업했다.
“지금 당장 싸리 집으로 좀 오게.”
“무슨...?”
채 묻기도 전에 전화는 끊겼다.
참치 횟집 ‘어군’의 사장 마낙춘은 이마를 찌푸린 채 손에 들린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아주 오래 전 사업이 얼마나 잘되는지 궁금해 왔다면서 참치 회를 공짜로 먹고 간 이후 처음이다.
불쑥 전화를 해서 다짜고짜 싸리집으로 오라는 건 무슨 뜻일까.
“최 지배인.”
정장 차림으로 홀을 돌아다니고 있는 지배인을 불렀다.
“예 사장님!”
“잠깐 나갔다 와야겠어. 늦을지 모르니까 시간 되면 퇴근들 시켜.”
“예!”
마낙춘은 마시던 산수유차를 마저 비우고 가게를 나섰다.
택시 한 대가 멈추고 마낙춘이 내렸다.
북한산 자락에 파묻혀 있는 싸리집은 정 관계 인사들이 슬그머니 들어와 비밀스런 대화를 나누기에 아주 적절한 장소이다.
자신도 이곳에서 지금 전화로 부른 윤태섭과 대여섯 차례 만났다.
물론 마낙춘 자신은 윤태섭과의 만남이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를 만나 지금의 사업을 하고 있고, 국내 참치회집에서도 일 년 매출 톱 5에 들 정도면 웬만한 기업이다.
이제 완전한 사업가다.
과거는 오래전 기억에서 씻어냈고 몸에서 벗겨 버렸다.
윤태섭은 어떻게 생각 할지 모르지만 더 이상 이쪽 바닥과는 연을 맺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
카악!
침을 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윤태섭은 사복차림이었는데 벙거지 모자까지 눌러쓴 걸 보면 주위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하려는 것 같았다.
“어서오게.”
윤태섭은 흑염소 수육을 씹으며 아는 체를 했다.
맞은편에 앉은 마낙춘은 윤태섭의 얼굴이 그다지 밝지 못하다는 걸 느꼈다.
집권여당의 대표가 금융대출 비리에 연루되어 한참 시끄럽다.
대통령의 집권 후반기이기 때문에 힘이 예전만 못하겠지만 여당이 국회 의석을 많이 장악해 크게 코너에 몰릴 일은 없다.
“뭔 일 있습니까?”
마낙춘은 젓가락으로 수육 한 점을 입에 넣고 씹었다.
“불편한가?”
“그래도 그렇지 아무 설명도 없이 전화하여 불러내면 어쩝니까? 저도 장사 하는 사람인데.”
멈칫!
윤태섭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잖아요.”
윤태섭이 젓가락을 놓고 물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낙춘이 많이 컸다.”
순간 마낙춘이 피식 웃는다.
“낙춘이라뇨. 내 나이 쉰 다섯입니다.”
“핫핫핫!”
갑자기 윤태섭은 큰 소리로 웃었다.
한참을 웃던 윤태섭이 목소리를 낮췄다.
“화무십일홍이라는 건가?”
마낙춘은 부인하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꽃도 열흘을 못가고, 달도 차면 진다.
이제 윤태섭은 물론 대통령 권철태 역시 서산으로 지는 석양일 뿐이다.
눈치 빠르기로 소문난 검찰에서 집권 여당의 대표를 소환하여 조사한다는 건 이른바 권력의 레임덕이 시작됐다는 의미였다.
“왜 웃으십니까?”
“그래, 자네는 평범한 건달이 아니었지. 비록 고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머리 하나는 비상했어.”
“오랜만에 한 잔 올리겠습니다. 민정수석님!”
윤태섭이 잔을 비우자 마낙춘은 소주병을 들었다.
“묘하군. 자네 입에서 나온 민정수석님이란 호칭이 왠지 비아냥처럼 느껴지니 말일세.”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하게!”
“솔직히 난 각하보다 수석님을 더 좋아했습니다.”
“호오!”
윤태섭의 눈이 커졌다.
“세조가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이 될 수 있었던 건 한명회라는 책사 때문이 아닙니까?”
“내가 한명회란 말인가?”
윤태섭이 놀란 표정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