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명불허전(名不虛傳)1
새벽 4시40분.
CIA 중동지역 책임자인 맥보란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지이이잉! 울림 소리가 들린다.
5시에 맞춰놓은 알람이 소릴 지르려면 20분은 더 있어야 했다.
알람이 아닌 핸드폰이 몸을 떠는 소리였다
맥보란이 오른손을 뻗었다.
“여보세요.”
어제 늦게까지 회의가 있어 잠이 부족한 맥보란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무왈리드입니다.”
“무왈.”
잠겨 있던 맥보란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무왈리드는 알자지라 방송 현직 기자이며 맥보란과 상당이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미국 CNN에 대항해 설립된 알자지라는 반미국적, 범이슬람적 시각에서 아랍인의 목소리를 전 세계에 전파하고 있다.
어느 방송보다 공정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도 알자지라는 미국과 대척점에 있는 중동의 방송이다.
그런 방송국 기자가 CIA요원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는데 아직까지 침대에 있습니까?”
“말해보게. 세상이 뒤집힐 일이라니?”
“아침 조간에는 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방송 뉴스에는 나오겠죠. 이라크에서 굵직한 테러가 일어났어요.”
이라크 테러란 말에 바짝 곤두섰던 맥보란의 눈이 푹 가라앉았다.
‘그놈의 나라는 아직도 자기네들끼리 지지고 볶는 건가’
속으로 그따위 사건이 무슨 중요한 것이기에 새벽같이 전화를 했느냐면서 불편한 표정을 할 때 눈이 번쩍 뜨이는 말이 이어졌다.
“반군들이 일본 미츠이 건설의 고속도로 복구공사 현장을 공격했는데.”
뺨을 베개에 대고 있던 맥보란의 얼굴이 들렸다.
“미츠이면 현장 경비가?”
“KAS죠.”
“그래서?”
“다행히 현장 근로자들에게는 피해가 없었는데 문제는 무려 70여명이 사망했습니다.”
벌떡!
맥보란은 급하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누가 죽었단 말인가? KAS쪽인가?”
CIA 중동 책임자답게 지역에서 활동하는 민간 보안업체들의 움직임을 거의 손바닥 보듯 꿰뚫고 있다.
특히 보안업계 빅 쓰리로 불리는 아카데미, 다인코프, 마르케스 반체 마르케스의 움직임은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특히 욱일승천의 기세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영국 업체 KAS또한 관심 회사중 한 곳이다.
“대단합니다.”
“무슨 소린가?”
“반군측에서 Kord-6P50 두 자루가 동원됐는데도 무너진 모양입니다. 어엇, 지금 막 우리쪽에서 중요한 인터뷰를 성공 시켰다는 사인이 들어왔습니다. 좀 더 자세한 얘길 듣고 싶으면 채널 고정하고 들어보세요.”
전화가 끊어졌다.
비몽사몽이라는 말이 이럴 때 나오는건가 싶다.
맥보란은 재빨리 텔레비전을 켜고 채널을 돌렸다.
알자지라 채널에서는 지금 어제 열린 월드컵 남미 예선 경기를 녹화 중계 해주고 있었는데 화면 왼쪽 상단에 93분이라는 글씨를 보아 인저리 타임인 듯 보인다.
뚝!
갑자기 축구 화면이 사라지고 스튜디오의 앵커가 나타났다.
‘긴급 속보입니다. 어제밤 일본의 미츠이 건설이 참여하고 있는 이라크 고속도로 복구사업 현장에 자칭 ‘이라크 아말(이라크의 희망)’이란 단체가 공격을 해왔습니다. 다행히 현장 경비를 맡고 있던 KAS의 침착한 대응으로 격퇴 되었는데 공격을 해온 테러범들 거의가 사살된 것으로 보입니다.’
뉴스는 계속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있었다.
지이잉!
바로 그 순간부터 맥보란의 핸드폰이 바빠졌다.
모두가 평소 자신과 알고 지내는 서방기자들이다.
CIA 중동 책임자라면 뭣좀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 전화를 했지만 맥보란은 입을 열 방법이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중동에서 일어난 사건은 CIA 보다 알자지라 방송이 훨씬 빠르다.
모든 테러범들은 공격을 하고 난 뒤 가장 먼저 알자지라에 전화하여 자신들 소행임을 자랑스럽게 밝힌다.
그들이 알자지라 방송을 찾는건 CNN이나 BBC보다 더 공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몰라!”
“정말 몰라.”
“모르니까 모른다고 하지.”
맥보란은 모른다는 말만 반복했다.
“나도 자네들 보다 더 아는 것이 없네. 나야 말로 부탁 좀 하지. 좋은 정보있으면 나누세.”
할 수 있는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무왈리드는 조금 전 분명 자기들 쪽으로 인터뷰 정보가 들어왔다고 했는데 깜깜 무소식이다.
뚝!
바로 그때 다시 날씨 예보를 하던 화면이 꺼지고 조금전 앵커가 나타났다.
“어제 밤 이라크 아말이라는 테러단체와 교전을 벌인 KAS 소속 직원과 인터뷰를 보시겠습니다.”
화면이 잠지 정지되는 듯 하더니 어두 컴컴한 실내에 검정색 천으로 눈 밑 까지 덮은 사내가 나타났다.
사전에 녹화가 된 듯 복면 사내는 말했다.
‘우린 평소와 다름없이 근무에 열중했죠. 그런데 자정쯤 되어 동쪽 사막으로부터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적은 러시아의 PKP와 두 대의 Kord-6P50으로 무장했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습니다. 우린 항상 불리한 위치와 여건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죠. 그들은 우리의 고객(미츠이 건설)을 괴롭히려고 했지만 그건 안되는 일입니다.’
‘침입자는 정확히 몇 명이었습니까?’
기자의 얼굴은 나오지 않고 사내가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카메라는 정면에서 돌아가지만 질문하는 기자는 측면에 있는 듯 했다.
‘아직 모릅니다. 광범위하게 공격해 온 것을 보아 족히 일백여명은 되지 않을까 생각 합니다.’
‘소문에 의하면 70여명이 사살되었다고 하는데?’
‘그것도 모릅니다. 분명한건 우린 그들을 완전히 격퇴했다는 것이고 몇 명이 피를 흘리며 도망쳤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혹시 이름을 밝힐 수 있습니까?’
‘내 이름은 K, A, S입니다.’
화면이 꺼지고 다시 앵커가 나왔다.
앵커는 아리크 아말이라는 반군조직에 대한 정보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면서 확실한 사실은 후세인의 죽음에 대한 복수와, 이교도 축출을 외치는 이라크 반군은 소규모이지만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잠은 달아났다.
조금 전 다섯 시를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다시 자리에 눕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맥보란은 출근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에 부엌으로 들어가 느긋하게 아침 준비를 했다.
식빵을 굽고, 버터와 치즈를 바른 뒤 우유를 마신다.
덥석!
우유에 젖은 입안으로 바짝 구워진 식빵이 들어갔다.
한참 식빵을 씹고 있는데 다시 핸드폰이 울린다.
액정에 직힌 숫자는 영어 M이었다.
M은 한 사람을 가리킨다.
자신의 랭글리 M(Middle East:중동)팀의 리더이기도 했다
“점심은 드셨습니까?”
그쪽 시간으로는 지금 한참 점심을 먹을 때이다.
“자네는 여전히 느긋하군.”
조금은 비아냥 섞인 화난 음성이었다.
어제 밤 사건소식이 랭글리에까지 들어왔다.
그러나 중동팀 책임자인 자신의 정보가 주위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정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에 화가 난 듯 보인다.
중동책임자이므로 상부에서는 당연히 자신에게 상태를 물어왔지만 마땅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저도 조금 전 연락을 받았습니다.”
“당장 사건 내용을 조사해서 보고하게.”
“알겠습니다!”
맥보란은 차려 놓은 아침도 뒤로 하고 집을 나섰다.
그날 오후 늦게 포드 익스플로러 한 대가 미츠이 건설 현장 사무실 앞에 멈췄다.
조수석 문이 열리고 맥보란이 내렸는데 핸들을 잡고 왔던 이라크 활동요원이 내리려하자 말렸다.
“자네는 차에 있게.”
사내는 다시 차안으로 들어갔다.
맥보란은 사무실로 다가가 닫힌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맥보란은 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섰는데 에어컨 냉기가 얼굴을 감쌌다.
컴퓨터를 놓고 업무를 보던 십여명의 직원들이 고개를 돌려보았다.
“어떻게 오셨죠?”
가장 문과 가까이 앉아 있던 서른 중반 가량되는 사내가 물었다.
파랑색 작업복을 입고 있었는데 왼쪽 가슴에 ‘미츠이 건설’이라는 글씨가 박음질 되어 있었다.
“미국 대사관에서 왔소.”
미국 대사관이라는 말에 모든 직원들 눈이 일어섰다.
그때 맨 안쪽 의자에 앉아 있던 현장 소장 세이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국 대사관에서 무슨 일로? 이쪽으로 좀 앉으시죠.”
맥보란은 사무실을 스윽 한 번 훑더니 소파에 앉았다.
“현장 책임자인 세이초라고 합니다.”
“피해는 어느 정도입니까?”
“미국대사관에서 왜 우리 회사의 피해를? 이미 이라크 경찰에서 조사를 끝냈습니다만?”
“직원들 인명피해는 없었습니까?”
“그 문제는 나보다 저 옆 건물로 가보시죠. 거기가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KAS 사무실입니다.”
맥보란은 세이초를 가만 바라보더니 히죽 웃었다.
“감사합니다.”
맥보란은 돌아섰다.
만만치 않다.
가급적 자신과는 말을 나누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인다.
필시 위에서부터 어떤 지침을 받았음이 분명했다.
혹시 미국 대사관이나 관계자가 찾아와 어제 밤 사건에 대해 묻거든 모든 걸 KAS경비대장에게 맡기고 넌 빠져라.
탁!
문을 닫고 나간 맥보란은 오른쪽 건물로 고개를 돌렸다.
판넬로 지은 2층 건물이 있었다.
“왜 벌써 나오십니까?”
차에 앉아 있던 부하직원이 고개를 내밀고 묻는다.
“아니야. 자네는 신경쓸 것 없네.”
맥보라는 KAS경비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척!
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세웠다.
아카데미 사무실은 수시로 드나든다.
물론 회사(CIA)와 여러 가지로 거래 관계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KAS는 처음이다.
노크를 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잠깐!”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소리가 사무실을 울려퍼졌다.
맥보란도 워낙 목소리가 컸기 때문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소파 탁자에서 포커 게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내들은 모두 여섯, 그중 한명은 구경을 하고 있고 게임을 하는 사내는 다섯이었다.
한 눈에 KAS용병들이라는 걸 알아 볼 수 있었는데 맥보란은 이마를 찌푸렸다.
필시 어제 밤 전투를 벌인 당사자들일 것이다.
전쟁에서 이겼든 졌든 격렬한 피 보라가 휩쓸고 지나가면 며칠은 몸과 마음이 무거워진다.
제아무리 특수부대원이라고 해도 이른바 트라우마라는 것이 짧지만 분명히 있다.
자신의 총에 맞아 죽은 사람, 내장이 배 밖으로 나와 가망이 없는데도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머리가 반쯤 날아갔는데 남은 한쪽 눈을 부릅뜨고 있는 시체를 보면 무쇠로 만들어진 간담이라고 해도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무자비한 살육을 저질러 놓고 낄낄 거리며 포커게임에 빠진 사내들을 보며 맥보란은 CIA 교육 팀장 레너드의 말이 떠올랐다.
‘인간 보다 더 잔인한 동물은 없다.’
그때였다. 구경하던 사내, 비렌드라가 맥보란을 발견한 듯 물었다.
“당신 누구요?”
포커치던 사내들 또한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맥보란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들을 훑어보다 왼쪽 끝에서 멈췄다.
실물은 처음보지만 사진으로는 오래전에 낯을 익혔다.
어느 날 랭글리로부터 긴급 지시가 내려왔다.
외인부대에 상상을 초월하는 저격수가 있으므로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라는 것이었다.
저격수는 CIA뿐만 아니라 각국 정보기관이 가장 탐내는 자원이다.
그들이야 말로 따로 시간과 자금을 투자하여 가르칠 필요없이 곧바로 실전 투입이 가능한 완성된 프로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회사의 지시를 받고 여기저기서 모은 정보를 훑어 보던 맥보란은 매우 놀랐다.
사격솜씨는 경이적이었다.
백발백중이라는 말도 그에게는 모자랐다.
결정적인건 그에게는 과학으로 이해되지 않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했다.
‘저 친구가 사막의 흑새로군’
맥보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장님 좀 뵙고 싶어 왔습니다.”
그때 출입문이 열리고 경비대장 하워드가 들어섰다.
“대장님 손님입니다.”
비렌드의 말에 하워드는 맥보란의 곁을 스치듯 지나더니 안쪽에 있는 자신의 의자에 앉았다.
"어디서 왔습니까?"
앉으라는 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