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121화 (121/651)

제121화: 폭풍전야(3)

사막의 밤은 춥다.

낮이 덥기에 유난히 더 춥게 느껴지고 신체 역시 뜨거운 낮 더위로 한기에 버티는 저항력이 약해져 있다.

최대한 온기가 있는 곳, 가장 좋은 곳이 바위가 병풍역할을 해주는 곳이다.

두 순례자는 한참 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두 개의 바위가 마주보고 있는 작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거리는 스가에게서 5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스가는 바지를 대충 추스른 뒤 현장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런데 스가의 발걸음이 멈췄다.

바람결에 두 순례자의 음성이 들려왔는데 영어였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스가이며, 유창한 영어 실력이 큰 플러스가 되어 미츠이라는 큰 건설회사에 입사 할 수 있었다.

영어도 더듬거렸다면 그냥 지나갔을 것이지만 너무 유창했고 유학을 다녀온 스가의 귀에도 본토사람이 아니고서는 들려줄 수 없는 완전한 발음이다.

무슬림이라고 영어 하지 말란 법은 없으나 너무 놀라운 실력이다.

‘죽음을 도외시 하며 사막을 떠도는 순례자가 저토록 완벽한 영어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스가는 급히 서둘러 조금이라도 더 많은 거리를 측량해야 한다는 걸 잊고 자신도 모르게 살금살금 순례자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나 둘, 경비 초소가 모두 다섯 개라고 하지 않았나?”

“글쎄 나도 그렇게 아는데.”

경비초소란 말에 스가의 눈이 커졌다.

스가는 최대한 발자국 소리를 줄여 가며 두 순례자가 은신해 있는 두 개의 바위 쪽으로 다가갔다.

흡!

하마터면 소릴 지를 뻔했다.

동쪽으로 앉아 있는 순례자 옆에 커다란 총 한 자루가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쪽으로 앉은 사내는 쌍안경으로 공사장 쪽을 살피고 있었다.

이 정도면 순례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는 것쯤은 충분히 간파된다.

전쟁이 끝났어도 크고 작은 테러, 그중에서도 이라크 재건에 뛰어든 서방 기업들에 대한 공격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스가는 곧장 후퇴했다.

그리고 어떻게 측량기기가 있는 곳까지 달려왔는지 기억하지 못할 만큼 거칠게 숨을 헐떡거렸다.

혹독한 사격훈련이었다.

총열이 달아오를 만큼 쏘아댔는데 주로 40미터에서 60미터 거리를 두고 당기는 전술사격과 100미터 거리에서 쏘는 일반사격이었는데 소비한 총알만 일 인당 500발이었다.

하워드 말은 정확했다.

전역한지 하루도 안됐기 때문에 이른바 그 실력 어디갈까 했지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초반 100발까지의 사격은 엉망이었다.

일행의 얼굴들이 굳었다.

변한 것이라고는 부대와 부대 밖이라는 것 뿐인데 도무지 총알이 말을 듣지 않는다.

‘정신세계는 무한하다’

언젠가 권총수가 했던 말이었다.

육신은 컨디션이라는게 있으나 정신은 그렇지 않다.

언제든지 내가 집중하고 열정을 쏟으면 그 만큼의 결과를 이루게 해주는 것이 정신세계이다.

정신 차리라는 말은 마음을 다잡으라는 뜻이다.

300발이 넘어서면서부터 외인부대 시절의 수준에 올랐다.

오민철은 운기행공을 막 끝내고 자세를 풀면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권총수를 바라보았다.

권총수는 깊은 운기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항상 백회혈 세치 위에 나타나던 연꽃이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다섯 가닥의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스팔트를 태울 듯 이글거리는 열기처럼 머리 위로 솟아오르는 다섯가닥의 열기는 어둠속에서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설마 그것 아닐까’

내공의 단계에 대해 배웠다.

그리고 삼화취정 다음 단계로 다섯 기운을 조절하여 으뜸이 된다는 오기조원(五氣調元)이 있다.

설명과 지금의 그림이 너무 일치했다.

다섯 개의 투명한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꿈틀거리더니 조금씩 소멸되며 사라졌다.

팟!

권총수는 눈을 떴다.

천장에 붙은 희미한 취침등이 켜져 있지만 실내는 어둡다.

그런데 권총수의 두 눈이 서쪽하늘을 밝히는 천극성처럼 빛난다.

“오기조원?”

오민철이 물었다.

권총수는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불침번을 서던 비렌드라가 누구냐고 묻자 놀랍게도 서툰 영어가 들려왔다.

“쏘리, 현장소장 세이초입니다.”

비렌드라가 잠금쇠를 풀고 문을 열어주었는데 머리가 벗겨진 세이초 현장소장이 들어섰다.

“총수를 좀 만나러 왔습니다.”

“불 좀 켜!”

권총수의 말에 비렌드라가 스위치를 올렸다.

“이리 오세요!”

권총수는 침대에서 내려와 한쪽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현장소장 세이초는 조심스럽게 앉았다.

“이 시간에 무슨 일입니까?”

“사실!”

세이초는 긴장한 듯 목소리가 떨렸다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더니 번호를 눌렀다.

“자네가 이리 와서 말해.”

전화를 끊고 5분여 기다리자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비렌드라가 다시 열어 주었는데 측량기사 스가가 들어섰는데 그 역시 위축되어 있었다.

더욱이 잠을 자던 다른 대원들 모두 환한 불빛에 눈을 떴고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해. 빨리 말해? 우리 회사 측량기사입니다. 어서 본대로 말해.”

“사실은.”

측량기사 스가는 조심스럽게 해질 무렵 자신이 보고 들었던 상황을 말해주었다.

“정말입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대원들이 깜짝 놀랐다.

“두 명이라고?”

“무슬림 복장이고?”

여기저기서 소리치자 권총수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조용히 좀 해.”

주간 근무자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권총수는 종이와 펜을 꺼내더니 스가에게 내 밀었다.

“당신이 보았다는 그 총을 그려 보시오?”

스가는 주춤 다가오더니 볼펜을 쥐고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측량기사인 까닭에 어떤 물체를 그리는데 상당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사사사삭!

스가의 그림은 순식간에 한 자루 소총을 만들어냈다.

“AK-74 아냐.”

AK47보다 좀 더 가벼워졌고 유효사거리가 늘어난 두 단계정도 업그레이드 된 소총이다.

권총수는 재빨리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어딜 가는데?”

오민철이 물었다.

“금방 다녀올게. 늦을지도 몰라.”

그리고 밖으로 사라졌다.

금강부동신법이 펼쳐졌다.

극성에 이르며 신체를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날아간다.

하지만 아직 그 정도까지의 경지를 되지 않아 양팔과 양 다리를 힘차게 벌렸는데 마치 궁신탄영(弓身彈影)처럼 상체를 약간 구부렸다가 두 팔을 힘껏 치며 나아가는 방식이다.

쉬이이익!

한번 도약에 10여 미터를 훌쩍 넘게 난다.

이 십분 정도 되어 스가가 말한 두 개의 바위가 보이는 근처에 도착했다.

권총수는 잔뜩 끌어올린 내공을 귀에 집중했다.

들리지 않는다.

사람이 있었다면 숨소리라도 들려야 정상이다.

오기조원의 경지에 올라선 내공이므로 30미터 거리면 눈동자 굴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스으으!

소리없이 접근했다.

완전한 초상비는 아니어서 지면과 발 바닥 사이의 높이가 들쑥날쑥 했다.

제대로 된 초상비라면 지면과 일정한 높이를 지니고 날아간다.

두 개의 바위가 마주보고 서 있다.

두 사람이 웅크리면 머무를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었는데 사람은 없었다.

스가가 잘못 본 것일까.

다가선 권총수는 지면에서 사람의 흔적을 찾아냈다.

형형한 안광으로 지면을 살피던 권총수의 눈이 반짝하고 빛을 냈는데 눈에 익은 신발자국이 보인다.

쭈그리고 앉은 권총수는 좀 더 자세히 살폈다.

‘벨빌(Belleville)’

잘 알고 있는 신발 브랜드이다.

미군에 전투화를 납품하는 회사인데 특히 사막화 제조에 탁월한 기술력을 자랑한다.

벨빌에서 만든 미군 사막화 바닥 창 문양이 찍힌 것이다.

‘스가는 이슬람 복장을 했지만 영어가 완벽했다고 했다’

권총수는 어둠속을 살폈다.

스스슷!

근처에 찍힌 자신의 발자국을 지우고 20여 미터 뒤에 있는 커다란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권총수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팟!

어둠속을 바라보던 권총수의 눈이 빛났다.

‘온다!’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발자국 소리는 이미 들려오고 있었다.

잠시 후 어둠속에서 무슬림 복장을 한 두 사내가 나타났다.

둘은 곧바로 두 개의 바위가 서 있는 작은 공간으로 들어가더니 품속에서 핸드폰 보다 약간 큰 기계 하나를 꺼냈다.

‘B8-1K무전기’

20미터 떨어져 있지만 권총수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중대 단위의 무전기로 이렇게 사방이 툭 터진 곳이라면 백킬로까지도 충분하다.

“커리입니다. 초소는 다섯 곳이 맞습니다. 화기는 M4와 HK-416입니다. 중화기로는 M240 세 자루입니다.”

미군도 특수부대가 아니면 무전교신 때 음어나 암호 따위는 쓰지 않는데 아카데미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소의 말씨 그대로 무전을 교신 했다.

“인원은 12명입니다. 주야간으로 교대하는 근무 형태로 확인 됐습니다. 특별히 위협이 될 만한 중화기는 있지 않습니다. 예!”

커리라는 사내는 몇 마디 더 주고받더니 교신을 끝냈다.

권총수 표정이 굳었다.

무전 송수신기에서 나오는 음성을 엿들었다.

교신대상자는 남자였다.

약간 탁한 목소리였고 말 끝마디를 딱딱 잘랐는데 마치 군기가 든 신병 같은 말투였다.

‘오늘 새벽 5시쯤에 푸스락에 도착할 것이라고’

푸스락은 여기서 북쪽으로 5킬로 정도 떨어진 유프라데스강 지류 근처의 마을 이름이다.

권총수는 무전 교신을 되새기며 상황을 떠올렸다.

강가이기 때문에 숲이 우거졌고, 그건 은신하기 좋은 여건을 제공한다.

‘그곳에서 낮을 보내고 밤이 되면 공격할 모양이군.’

5킬로의 거리라면 특수부대 출신들이니 넉넉잡고 30분이면 주파할 것이다.

야간 전투는 11시를 넘어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때 두 명의 무슬림 복장을 한 사내들이 AK를 들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가는 곳은 푸스락 마을이었다.

숙소 분위기가 굳어버렸다.

권총수가 떠난지 2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안되겠어. 내가 가봐야지.”

오민철이 총을 들고 나가려 하자 나카야마가 입을 열어 말했다.

“늦을 수도 있다고 했잖아.”

오민철은 고개를 돌려 나카야마를 보았는데 흠칫 놀란다.

항상 웃고 부드러운 얼굴을 한 나카야마가 긴장해 보였다.

쪽바리 운운하며 쏘아붙이려던 오민철은 입을 다물었다.

엄청난 연봉을 받았다.

기업은 군대가 아니다.

반드시 투자 한 만큼 수익을 창출하려 들 것이다.

또한 군대와 달리 죽는다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국기로 관이 덮이는 영광도 없다.

용병에게 포로대우라는 건 없다.

잡히면 무조건 죽는다.

어찌보면 군대보다 훨씬 살벌한 곳인데 리더인 권총수가 돌아오지 않자 불안했다.

그러나 이내 나카야마는 얼어붙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듯 헛기침을 했다.

“별일 없을 거야. 총수가 누구야. 우리의 오야붕이라고, 곧 올 거야 걱정하지 말자고.”

나카야마의 말속에는 권총수에 대한 신뢰가 굳게 담겨 있었다.

절대 불행한 일 따위는 당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믿음서린 음성에 오민철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당연하지.”

오민철이 맞장구를 쳤다.

벌컹!

그때 문이 열리고 권총수가 들어섰다.

“총수!”

“왔구나.”

모두가 놀라며 권총수에게 몰려들었다.

“왜들 이러고 있어? 어디 작전 나가는 거야?”

“오야붕이 오지 않는데 어떻게 맘 편히 누워 있을 수가 있어.”

나카야마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권총수 또한 갑작스런 오야붕이라는 호칭에 얼굴을 붉혔다.

“넌 이제 우리들의 오야붕이다.”

오민철이 쐐기를 박았다.

다른 동료들이 수군거리며 오야붕이 무슨 뜻인지 질문을 했다.

그러자 오민철이 단호하게 뱉는다.

“영어로 형님.”

오민철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혀...형엉님!”

몇 몇 동료들이 서툰 우리말로 더듬거린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부대중 하나인 SAS 출신이지만 오민철에 대해서는 여러 경로를 통해 알고 있다.

특히 며칠 전 사우디 사무실에서 회의도중 벌어진 싸움소식은 발 빠르게 소문이 되어 퍼져 나갔다.

한 주먹 하는 조지 루니가 단 두 방으로 떡이 되고 말았다.

오민철은 태권도 고수이고 외인부대시절 누구도 그의 주먹을 이기지 못했을 뿐 아니라 IS 대원 한명은 그의 주먹에 맞아 죽었다는 출처 불분명한 말까지 나돌면서 동료들은 알았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총수 형님!”

“흐흐흐!”

그걸 보며 오민철이 짓궂게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