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추격전(1)
벤저민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이런 식은 바람직하지 않는 듯 합니다.”
“그럼 어떤 것이 바람직한가? 자네 의견을 말해보게”
“마주보는 야채 가게 주인들이 서로 자주 싸우면 손님들이 가겠습니까? 물건의 품질은 차치하고 주인의 성품을 불만스럽게 보기 때문이죠.”
“가게 매출 떨어지는 건 내가 책임져야 할 문제일세. 그가 바큘라를 죽였다는 것이 모두의 의견 아닌가?”
“전 증거가 없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자네 지금 나에게 증거를 요구 하는 건가?”
“회장님!”
“민간 전쟁기업이라고 해서 규율과 질서가 없는 건 아니네. 오히려 군대보다 더 정확한 선을 그어야 하네.”
군대처럼 명령이 내려지면 무조건 이행하라는 뜻이었다.
위에서 까라고 하면 까야 하는건 맞다.
그러나 내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기 때문에 작전에 대한 의견 개진 정도는 군대에서도 허용된다.
“증거 없는 공격은 감정싸움일 뿐입니다.”
“그럼 바큘라가 파흐드 왕세자를 공격했다는 증거를 그들은 제시했나?”
“예!”
“무슨 소리야. 증거라니.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잠시 전 저에게 소포 하나가 배달 왔습니다. 포레스트라는 이름으로 왔는데 믿을 수 없게도 그 안에 바큘라가 알 살만 왕세자로부터 받았던 교검장이 있었습니다.”
뚝!
순간 목소리가 끊기고, 당혹스러운 신음이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상당히 놀란 모양이었다.
그때 벤저민은 미리 찍어 놓은 소포에 담긴 교검장 사진을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아카데미 총수에게 보냈다.
“어엇!”
사진을 본 듯 다급성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곧바로 잠잠 해졌고 벤저민은 침묵했다.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전달했고 증거품까지 보여줬으니 할 일은 다 한 것이다.
“없애 버리게.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탁!
전화가 끊어졌다.
벤저민은 한동안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레스트 즉, 소포를 보낸 인물이 권총수인지 아직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교검장을 보낸 건 한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용병시장의 룰은 간단했다.
각자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다 상대를 공격 하는 건 인정된다.
바큘라에게 주어진 임무는 알 살만 왕세자를 경호하는 일이지 KAS쪽을 공격하는 건 아니다.
어쨌든 교검장은 바큘라만 갖고 있다.
교검장을 보낸 건 자신의 바큘라 암살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반면 이쪽에서는 그가 바큘라를 죽였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아카데미는 지금 추측에 기반해 칼을 뽑으려 하는 것이다.
벤저민은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간다.
“윌리엄 진행해야 할 것 같네.”
탁!
벤저민은 던지듯 핸드폰을 놓았다.
킹 킬리드 국제공항에 사우디아 소속 항공기 한 대가 내려앉았다.
승객들은 비행기에서 곧장 이어진 통로로 내리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에어컨 바람이 세차게 쏟아졌다.
“하하핫!”
커다란 웃음소리에 흰색의 구트라를 쓰고 검정색 이갈을 둘러 찬 이슬람 복장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큰소리로 웃는 사람은 오민철이었는데 뭐가 좋은지 권총수를 향해 목청을 높였다.
“쪽바리 그 자식 우리 회사에 오면 나한테 죽었어. 절대 가만 안 둘거야. 건방진 놈.”
오민철은 나카야마가 오면 선배로써 관계를 분명히 정리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통로를 걸어 계단을 내려갔다.
입국 수속을 밟고 검색대를 통과한 두 사람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건물 바닥에 수화물 찾는 곳이라는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지이잉!
걸어가던 권총수가 주머니에 들어 있는 핸드폰을 꺼냈다.
“지사장님.”
상대는 에반이었다.
그런데 몇 마디 주고 받던 권총수의 표정이 굳어진다.
지켜보던 오민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왜 그러는데?”
오민철은 핸드폰을 내리는 권총수를 향해 물었다.
권총수는 눈썹을 찌푸리며 잠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뭔 일이야?”
대답 대신 우두커니 서 있던 권총수가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한 번 해보자는 건가?”
“뭘 해봐?”
권총수는 수화물을 싣고 돌아가는 컨벨트를 바라보았다.
오민철은 권총수의 얼굴을 살피며 재차 묻는다.
“중요한 일이야?”
“공기가 심상 찮나봐.”
“공기?”
“아카데미 움직임이 부산한가 본데.”
탁!
권총수는 자신의 가방을 들어 올려 어깨에 멨다.
“좀 자세히 말해봐.”
오민철도 가방을 챙겨 어깨에 멨다.
권총수는 입을 꾹 다물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입국장을 들어서자 에반이 마중나와 있었다.
권총수의 눈은 마중 나온 사람들을 스캔 하듯 쭉 훑었다.
살기는 없다.
그렇다면 저들 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있는 사람은 없다.
“차 한 잔 하지.”
에반이 앞장섰다.
공항에는 여러 개의 커피숍이 있는데 에반은 맨 안쪽으로 데려갔다.
창문이 하나도 없고 사방이 시멘트 벽 뿐인 커피숍이다.
권총수는 에반이 일부러 이런 곳에 자리를 잡았음을 알았다.
권총수와 에반은 자리에 앉았고 오민철이 재빨리 커피를 주문하고 돌아왔다.
“지사장님 무슨 일입니까?”
오민철이 눈을 빛냈다.
“총수를 노리고 있네. 지난 며칠 그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일세.”
“구체적으로?”
질문을 던져 놓고 오민철은 입을 다물었다.
눈에 보이게 움직이는 것이 있고 가만히 있어도 굉장히 뭔가를 꾸민 듯 보일 때가 있다.
에반이란 SAS 최고 사냥꾼의 본능은 지금 후자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꼭 찍어 어떤 형태로 움직이고 있다는 말은 할 수 없지만 숲속의 공기가 팽팽하다는 뜻이다.
오민철이 번호에 불이 들어오자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가져왔다.
“혹시 몰라서 권총을 준비하긴 했네.”
승용차에 넣어 놨다고 했다.
리야드 시내까지 들어가는 고속도로는 대략 20킬로 정도 된다.
20킬로면 얼마든지 작정하고 공격할 수 있는 거리이다.
가장 큰 문제는 사건이 일어나도 언론에 보도될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현 권력의 실세인 알살만 왕세자가 그쪽 편에 서서 모든 것을 덮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건 이쪽이 완벽하게 불리했다.
권총수는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검정색 랜드로버가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핸들은 오민철이 잡았으며 조수석에는 에반이 앉았는데 오른손에 권총을 움켜쥐고 있다.
오민철은 좌우 백미러와 룸미러를 통해 수상한 차량의 접근을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뭐야 씨이.”
갑자기 운전을 하던 오민철이 소리치며 재빨리 오른쪽 차선으로 방향을 틀었다.
두두두두!
바로 뒤를 따라오던 포드 익스플로러 좌우 문 밖으로 두 명의 사내가 M4를 내놓고 갈겼다.
파파파팟!
오민철이 재빨리 차선을 바꿨지만 총알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파파팍!
뒷 유리가 거미줄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바로그때 전혀 다른 총소리가 들렸다.
드르르륵!
“이건 또 뭐야?”
오민철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 맨 바깥 차선으로 일제 혼다 SUV가 나란히 붙더니 두 사내가 HK416을 갈기며 미소를 짓는다.
파악!
오민철은 가속 폐달을 힘껏 밟았다.
부우웅!
운전중 공격을 받았다면 절대 멈춰서는 안된다.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리는 것 만이 위험에서 벗어 날 수 있는 최선책이다.
“더 밟아! 최대한!”
뒷좌석에 앉은 권총수가 소리쳤다.
속도계는 순식간에 130킬로를 넘어 있었고 뒤에서 쫓는 익스플로러와 오른쪽 차선의 혼다SUV 역시 엔진 터지는 소리를 내며 쫓아왔다.
휘익!
오민철은 다시 오른쪽으로 차선을 바꿨다.
그 바람에 타고 있는 랜드로버가 혼다 SUV 앞을 막는 셈이 되었다.
더 이상 오른쪽의 차선은 없다.
도로 가장 바깥 차선이다.
스륵!
바로 그 순간 뒷문 유리가 내려가고 권총수의 상체가 창밖으로 나가는데 두 손으로 권총을 쥐고 있었다.
타아앙!
가장 손에 익은 글록 19의 총성이 울렸다.
총알은 정확히 혼다 SUV핸들을 잡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뚫었다.
퍽!
끼이익!
혼다SUV는 찢어지는 비명을 터뜨리더니 도로 밖으로 튕겨 날아 가버렸다.
스으으으!
권총수의 몸이 열린 창문을 그대로 빠져나갔다.
꿀꺽!
에반이 고개를 돌려 지켜보았는데 두 눈이 파르르 떤다.
꿈을 꾸는 듯 했다.
어떻게 사람이 시속 160킬로를 달리는 자동차에서 저토록 안정적인 자세로 빠져 나갈 수가 있을까.
포드 익스플로러가 굉장한 속도로 달려왔다.
그런데 운전자가 소스라쳤다.
도로에 권총수가 우뚝 서 있는 것이었다.
탕!
권총수는 달려오는 익스플로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파악!
총알은 운전석 유리를 뚫고 들어갔고 익스플로러는 왼쪽으로 꺾어지더니 중앙선을 넘어가 버렸다.
쾅!
콰아아앙!
거대한 버스가 중앙선을 넘어온 익스플로러를 쳤고 퉁겨나간 차량을 승용차 세대가 연거푸 들이 받았다.
반대편 차선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권총수는 도로를 벗어나 몸을 날렸다.
혼다 SUV가 쳐박힌 사건 현장으로 달렸다.
슈우우우!
금강부동신법이다.
붉은 암석 사막을 바람처럼 날아가다 뚝 내려섰다.
혼다 SUV가 나동그라져 있다.
권총수는 주위를 살렸다.
그러다 20여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가시나무 넝쿨을 바라보았다.
한 사내가 쓰러져 있었다.
아마 차 밖으로 튕겨 나왔으리라.
퍽!
발로 엎어진 사내를 걷어차 바로 눕게 한 뒤 총구로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며 살폈다.
‘자식 갔군’
권총수는 피식 웃곤 근처를 살폈다.
“으음!”
희미한 신음 소리가 들린다.
크고 작은 암석들 사이로 한 사내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권총수는 천천히 다가가 사내를 내려다보았는데 키가 굉장히 컸다.
사내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듯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들어 올렸다.
내려다보는 권총수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권총수는 천천히 쭈그리고 앉아 사내의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잠시 후 지갑을 찾아 꺼내더니 살피기 시작했다.
스윽!
가장 먼저 꺼내는 건 아멕스 카드였다.
지갑에는 사우디 돈 600리얄화 다섯 장과 백 달러 지폐 넉 장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신분증이 나왔는데 검정색 세권의 책과 ‘ACADEMI’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아카데미? 윌리엄?”
권총수는 담담하게 웃었다.
스으으!
손가락으로 가슴 앞자락 옷을 벌렸다.
차에서 튕겨 나오며 단단한 바위에 찢긴 듯 살덩이가 푹 패여 나갔고 허연 갈비뼈까지 드러나 보였다.
커럭!
커러럭!
사내의 목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권총수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사내의 입에 물려주고 불까지 붙여 주었다.
윌리엄은 입술을 꼼지락 거리며 담배를 피웠다.
히죽!
자신도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고서 윌리엄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지리리링!
어디서 핸드폰 벨이 울렸다.
권총수는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리다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핸드폰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핸드폰 액정을 보던 권총수가 중얼 거렸다.
“벤저민.”
츠으윽!
자신의 손으로 통화 버튼을 터치하고 스피커폰을 눌렀다.
“윌리엄.”
낯선 사내의 목소리다.
권총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윌리엄, 내 말 듣고 있나?”
사내의 목소리가 좀 더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