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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111화 (111/651)

제111화: 모래바람(2)

워낙 에반이 놀랐으므로 권총수 또한 마른 침을 삼켰다.

에반의 안색이 하얗게 굳어진다.

“알겠네.”

전화를 끊은 에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히 무장하고 나와 갈 곳이 있네.”

그러면서 캐비닛을 열더니 탄창이 끼워진 M4 한 자루를 건네준다.

권총수는 얼떨결에 총을 받아 들었다.

박갑철은 퇴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격일제, 24시간 근무하고 다음 날 24시간 쉬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과한 노동시간은 짧게 여러 번 일 하는 것보다 훨씬 육체적 정신적 피로도가 높다.

박갑철은 쉬임없이 터져 나오는 하품을 해가며 오늘 근무자 김새홍에게 밤사이 있었던 아파트 내 크고 작은 사건들을 전달하고 도시락이 든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수고하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경비실을 나왔다.

집까지는 버스로 2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비가 오려는지 하늘은 먹구름으로 잔뜩 뒤덮였다.

날씨 탓인가 갑자기 막걸리 한 잔 생각이 난다.

막걸리를 떠올리자 침이 꼴딱 넘어간다.

박갑철은 버스에 올랐다.

세 정거장만 지나면 영흥시장이 있고 그곳에 자신의 단골집이 있다.

5천 원짜리 머리 고기 하나 놓고 3천 원짜리 장수 막걸리 한 병이면 딱 좋다.

세 번째 정류소에서 버스가 멈추고 박갑철은 차에서 내렸다.

정류소가 바로 시장입구다.

안쪽으로 한참 들어가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작은 골목 입구에 단골집 ‘고항집’이 있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서자 50이 훌쩍 넘은 주인아주머니가 아는 체를 하면서 어서 오라고 한다.

“머리고기 작은 것 하고 막걸리 한 병 줘.”

“네 그래요.”

박갑철은 항상 자신이 앉던 창가 자리에 앉으려다 멈칫 했다.

한 사내가 혼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단골집이라고 하여 내 자리이니 비키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앉으십시오.”

그런데 박갑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쉰 중반의 사내가 일어났다.

“아니오. 난 괜찮소.”

막상 먼저 앉았던 사람이 일어나려 하자 미안한 마음이 든 것이다.

“그러지 말고 합석 하죠. 어르신.”

“그럴까요.”

혼자 마시는 술도 나름대로 묘미가 있지만 술은 역시 대작(對酌)이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박갑철은 못 이기는 척 사내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한 잔 드리겠습니다.”

사내는 자신 앞에 놓인 빈 잔을 박갑철 앞으로 내 밀며 막걸리가 든 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이런!”

박갑철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받았는데 사내가 웃는다.

“한 손으로 받으시지요.”

“허허!”

박갑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손으로 잔을 받았다.

쭈욱!

박갑철은 단숨에 비우고 잔을 내 밀었다.

“한 잔 하시오.”

“감사합니다.”

사내는 두 손으로 잔을 받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한쪽으로 비스듬히 돌리며 술을 비운다.

적은 나이도 아닌 것 같은데 예의를 갖춘다.

요즘 사람들에게서는 좀 체 볼 수 없는 주도(酒道)다.

박갑철이 주문한 안주와 술까지 더해지면서 술판은 커졌다.

한 병만 마시고 가겠다는 애초의 계획은 잊은 지 오래였고 막걸리를 담은 주전자가 세 번째 들어왔다.

내일 근무가 없기 때문에 출근할 걱정은 없지만 마신 술이 적지를 않다.

“뭐라고?”

그때 전화를 받고 있던 사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전산 기록은 남아 있을 거야. 그럼 이 사람아, 은행 관계자에게 사정 해봐. 알아 볼 수 있을 거야. 오케이.”

전화를 끊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사내는 불콰한 얼굴로 앉아 있는 박갑철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은행 전산기록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아 형님 별것 아닙니다. 제 아는 후배가 25년전 은행 기록을 보고 싶다는데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취중 기운을 빌려 형님 아우 하기로 했다.

“뭔 일인데 그러나?”

“별 것 아닙니다. 잔 드시죠.”

“내가 은행일은 좀 알지.”

“형님께서 알아 봐준다구요?”

“나 은행출신이야.”

박갑철이 어깨에 힘을 주었다.

“형님께서요?”

“중간에 사고가 생겨 옷을 벗긴 했지만 국가은행 본점에서 20년을 근무 했어, 우습게보지 말라고.”

“우습게 보다뇨. 그럼 형님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물어보게. 은행 업무라고 하면 훤히 들여다보니까.”

대붕 흥신소 사장 채명천은 눈을 빛냈다.

“25년이 지났는데 은행 거래 내역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까?”

“보통 사람은 쉽지 않지. 그러나 난 가능하네.”

“형님께서요.”

박갑철은 곧장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더니 전화번호부를 열람했다.

한참을 뒤지던 박갑철이 마침내 번호를 찾은 듯 발신기능을 눌렀다.

꿀꺽!

지켜보는 채명천은 마른침을 삼켰다.

“날세, 목소리를 잊었나. 헛헛 박갑철이.”

잠시 듣고 있던 박갑철이 말을 이었다.

“자네가 영업 관리본부장이 되었다더군. 늦었지만 축하 하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네. 그냥 안부전화 한번 한 걸세. 시간나면 한 번 보세나.”

전화를 끊은 박갑철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자신의 파워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과시하는 것이 분명했다.

쭈욱!

채워진 자신의 술을 비운 박갑철이 손수 빈 잔을 채우며 말했다.

“동생 하던 말 계속해보게.”

“이거야 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는데 우린 오늘 이렇게 앉아 막걸리 잔을 비우고 있네. 이건 운명이네.”

“허허! 그렇습니까. 사실 25년 전 국가은행 오류동 지점에서 한 사람이 8천만 원을 인출한 일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돈이 누가 보낸 건지 알지 못한다는 거죠.”

“그게 무슨 말인가? 돈을 찾은 사람에게 물어 보면 알 것 아닌가?”

“죽었습니다.”

박갑철이 흠칫했다.

그러더니 잔에 반쯤 남은 막걸리를 비웠다.

“예금주가 죽었다면 송금한 사람을 찾는 것이 쉽지 않지. 통장이 남아 있을 리는 없고?”

한때 전문가답게 단 번에 핵심을 찌른다.

예금주는 정지숙의 남편 덤프기사 오동철이다.

스윽!

채명천은 지체 않고 품속에 준비해둔 봉투를 꺼냈다.

스윽!

박갑철은 갑작스런 상황인데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이미 채명천의 사정이 심각하고 다급하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뭘 이런걸.”

확인해 보지도 않고 품속에 집어넣은 동작이 무척 자연스럽다.

그건 현역시절 적지 않은 봉투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비록 몸은 늙었지만 성품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200억 대출사기사건에 관여했다가 옷을 벗었다.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기로 하자구. 시간은 많으니까 말일세. 아우님.”

“그러죠.”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채명천이 계산을 했다.

밖으로 나와 박갑철을 택시에 태워 보낸 채명천은 미소를 지었다.

‘만만찮아’

채명천은 천천히 도보를 따라 걸어갔다.

국가은행 본점 영업관리본부장 최도국의 표정이 굳어 있다.

뭔가 깊은 생각을 하는 듯 이마를 찌푸린 채 꼼짝하지 않았다.

닷새 전 젊은시절 자신의 상사직원이었던 사람이 전화를 걸어왔고 어제 밤 만났다.

그의 이름은 박갑철.

그의 말을 빌리면 아파트 경비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차장일 때 최도국은 창구 직원이었다.

당시 최도국의 눈에 비치는 박갑철은 곡예사였다.

합법과 불법을 교묘하게 넘나들며 고객들을 상대하다보니 그의 주머니는 항상 빵빵했다.

같은 남자로서 박갑철의 비즈니스는 예술의 경지였다.

어느 날 최도국은 스스로 박갑철의 마부 되기를 자처했다.

지방 대학을 나온 자신에게 승진과 출세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충성을 다해 박갑철을 모셨다.

덕분에 유능한 사원 표창을 자주 받았으며 대출 커미션을 긁어모아 삼십 중반에 35평짜리 아파트를 마련하는 기염을 토했다.

박갑출의 수법은 갈수록 대담해졌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끝내 대출비리에 걸려들었다.

물론 자신은 그 사건에 전혀 관계 하지 않아 생존할 수 있었지만 박갑철은 옷을 벗고 징역형까지 살아야 했다.

징역 6년형을 받았다는 소식과 함께 더 이상 박갑철에 대한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런데 25년 만에 전화가 와 만났다.

박갑철의 마부가 되어 그가 벌인 적지 않은 대출비리에 자신도 발을 담갔었다.

아니, 담글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25년 만에 나타나 그때 일을 들먹인다.

법적으로는 시효가 지났지만 회사 규정은 다르다.

임원급들은 과거 드러나지 않은 도덕적 문제가 발생하면 무조건 물러나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스윽!

접힌 쪽지 한 장을 지갑에서 꺼냈다.

박갑철로부터 건네받은 종이였는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25년전 국가은행 오류동 지점에서 예금자 오동철에게 8천만 원을 입금한 사람의 신원만 알아주면 되네’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전산화되어 2,30년 년 예금관계서류도 얼마든지 확인이 가능하다.

물론 일반인은 불가능하고 국가기관만 필요에 의해서 들여다 볼 수 있다.

최도국은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김과장, 잠깐 내 방으로 좀 올라오지.”

전산실 김과장을 부른 것이다.

이번엔 고향집이 아니라 번듯한 갈비집이다.

박갑철은 미리 도착해 있었는데 방으로 들어서는 채명천을 보며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채명천은 직감적으로 일을 성공시켰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우님 이 집 갈비 안 먹어 봤지. 강남에서 알아준다는 곳이지.”

조그만 중소기업에 다닌다고 소개한 때문인지 박갑철은 채명천을 가볍게 판단하고 있었다.

“제가 어떻게 이런 비싼 곳을 들락거리겠습니까?”

이럴 땐 더 낮춰 주는 것이 좋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여자 종업원이 들어섰다.

“여기 갈비 5인분하고 언제나처럼 한 병.”

“네!”

여종업원이 나가자 박갑철이 품에서 봉투를 꺼냈다.

“예전의 부하직원이라고 하지만 아주 까탈을 부리더군.”

고생 좀 했으니 알아달라는 뜻이다.

채명천은 미리 준비한 봉투를 꺼내 건넸다.

“약속한 200입니다.”

박갑철은 그 자리에서 돈을 세어 확인했다.

“더 없나. 그놈 달래느라 좀 들어갔는데.”

은행관계자에게 돈을 먹였다는 뜻이다.

물론 채명천은 진짜로 먹였는지 먹이지 않았는지 보지 못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다.

지금와서 불편하게 할 이유는 없다.

“그럼 드려야죠.”

오늘 이후 두 번 다시 볼 필요도 없는 70이 넘은 노인에게 자선한다는 마음으로 지갑에든 현금 50만원을 전부 꺼내 주자 그제서야 미소를 짓는다.

슥!

채명천은 박갑철이 건네준 봉투를 받아 서류를 꺼내 펼쳤다.

‘5월15일 오후 12시7분 윤태섭’

전산망에 찍힌 그대로를 인쇄한 내용이다.

“아는 친군가?”

박갑철이 물 한 컵을 마시며 물었다.

그도 서류 내용을 보았을 것이다.

채명천은 싱긋 웃으며 소주잔을 비웠다.

갈비 5인분에 소주 세병을 마셨다.

세병의 소주에서 두병 반은 박갑철이 마셨다.

무척 기분이 좋은 듯 그는 권하는 소주를 거절하지 않았고 1인분에 8만원하는 한우 생갈비 5인분 또한 혼자 거의 먹어 치웠다.

부우웅!

비틀거리는 박갑철을 택시에 태워 보낸 채명천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조금 전 받았던 종이를 다시 펼쳤는데 ‘윤태섭’이라는 이름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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