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타오르는 구름(1)
그건 SAS 출신에게는 치욕이다.
SAS는 명예를 먹고 살아간다.
그런데 지금 마르셀로 회장은 자신의 편을 들어주기로 작정이나 한 듯 킬로 알파 서비스에 대해 거품을 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900미터 저격인데 1,100미터라고 말했다.
또한 APC 300으로 무장한 납치범들을 상대한 직원은 고작 셋이라고 했다.
셋은 맞다.
피식!
오랜만에 진실을 말했기에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피터는 실소를 지었다.
“세 명이서 납치범들과 맞섰단 말입니까?”
“그렇소. 정녕 놀라운 사람들이었소.”
피터는 잔잔한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돌렸다.
권총수를 바라보았는데 컴퓨터와 씨름을 하고 있다.
모든 건 권총수 작품이다.
한마디로 권총수가 시나리오를 썼고 감독, 주연까지 그의 차지였다.
900미터 저격도 일품이었지만 누구보다도 상파울루 뒷골목 사정을 잘 아는 전직 경찰관 자르델을 찾아간 건 자신은 생각지도 못했다.
솔직히 자신은 총무과 직원 자뉴의 말을 무시했다.
강력계에서 삼십년을 근무하다 은퇴한 경찰과 이번 사건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떤 병사가 뛰어난 군인인지 아는가.
삼류는 수적 우세로 적을 잡는다.
이류는 앞선 화력을 이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그러나 일류는 다르다.
그들은 머리로 전쟁을 한다.
자신을 지휘했던 지휘관은 최소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장사꾼 론을 강조했다.
군인이 아닌 장사꾼이 되라.
전쟁도 장사다.
그걸 알면 이긴다.
지휘관의 말대로라면 권총수는 일류 군인이다.
권총수는 메일을 보다 이마를 찡그렸다.
보낸 이는 대봉실업, 흥신소 사장 채명천이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을비 치고 쏟아지는 빗줄기가 굵다.
두 사람은 한참 만에 다시 만나 술잔을 나누었다.
지난번과 달리 술좌석 분위기는 어딘가 날이 서 있었다.
마치 잘 벼려진 칼 한 자루가 탁자 위에 올려진 기분이었다.
“그때 그 돈으로 큰 아이를 예술고에 보냈지. 알겠지만 예고에 보내려면 얼마나 돈이 들어가는지 자네도 알걸세.”
“그 녀석이 지금 독일에서 활동중이던가?”
수사과장 차영수의 장남은 피아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장물로 자식 뒷바라지를 할 줄이야.”
차영수는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USB를 한 개를 꺼냈다.
딱!
술잔 옆에 USB를 놓고 물었다.
“이걸 어디에 쓰려고?”
“흥신소 사장이 어디에 쓰겠나?”
채명천이 흘리듯 웃는다.
“한 가지 명심하게. 자칫 하다가는 죽을 수도 있어.”
차영수는 USB를 채명천에게 건네주었다.
USB를 받아 넣은 채명천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건배 하지.”
쨍!
두 사람은 가볍게 잔을 부딪치며 단번에 비웠다.
자정이 넘었는데도 대봉실업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한 사람이 컴퓨터를 켜놓고 업무를 보고 있었는데 채명천이었다.
눈이 약간 붉어진 것이 오랫동안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었다.
한참 화면을 보던 채명천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담배를 한 개비 물어 불을 붙였다.
소파로 자리를 옮겨 주저앉더니 말없이 담배만 피웠다.
‘오동칠.’
채명천은 담배를 길게 빨아 당겼다.
‘여배우 설지의 차를 뒤에서 들이 받아버린 트럭 운전사.’
부욱!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가 죽었다. 사고가 나고 8개월이 지나 운전부주의에 의한 교통사고로.’
사고당시 트럭운전사 나이는 마흔 한 살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1살부터 택시 운전을 하다 31살에 모아놓은 돈과 할부로 15톤 덤프트럭을 구입해 공사장을 뛰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택시 십년, 15톤 트럭 10년 몰았다면 운전에 관한 베테랑이라 할 수 있다.
자리에서 일어난 채명천은 컴퓨터를 끄고 윗도리를 들고 일어났다.
사무실 불을 끄고 퇴근 하려는 것이다.
건물 뒤에 주차장이 있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11층으로 내려간 뒤 후문을 이용하면 곧바로 주차장이다.
도어로 된 철문을 밀고 주차장으로 나갔다.
퇴근한 주차장은 낮과 달리 한산했는데 채명천의 차까지 포함해 다섯 대가 전부였다.
딱!
키를 누르자 자동차 라이트가 깜빡 하면서 차문이 열렸다.
운전석 문을 열려던 채명천이 멈칫 했다.
갑자기 목덜미가 싸아 했다.
딸칵!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은 채명천은 허리를 숙여 의자 밑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에 잡혀 나온 것은 50센티 가까이 되는 날이 시퍼렇게 선 회칼이었다.
기어를 넣고 채명천은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표적 지금 출발 한다’
어디서부턴가 무전 교신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로로 진입한 채명천은 핸드폰으로 후배이자 부하직원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성철아 나다. 너 사냥할 때 쓰는 엽총 갖고 있냐. 그래 잘됐다. 지금 당장 실탄 빵빵하게 채워 가지고 나와라.”
통화를 끝낸 채명천이 가속 폐달을 세차게 밟았다.
뿌우웅!
차는 굉음을 내며 무서운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고 무전교신이 바쁘게 울렸다.
‘뭔가 눈치를 챈 것으로 보인다. 놓치면 안 된다.’
어둠속에서 몇 대의 승용차가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빨간불이다.
달리던 차들이 모두 멈춰섰지만 부우웅 강력한 엔진소리가 들리며 검정색 승용차가 교차로를 통과했다.
빠아앙!
뒤이어 검정색 승용차를 뒤쫓는 두 대의 승용차가 교차로에 진입했다.
때마침 좌측에서 신호를 받고 달려오던 승용차가 소스라치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이이!
급브레이크에 차는 측면으로 쏠리더니 신호를 받고 대기중이던 다른쪽 차선에 있던 택시를 들이 받았다.
택시와 승용차 문이 동시에 열리며 저 멀리 사라지는 두 대의 승용차를 쏘아보았다.
“아 씨파아아! 돌겠구만.”
승용차 운전자가 욕을 뱉더니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사건 신고를 했다.
채명천은 한남대교를 건너 곧장 1호 터널을 빠져나갔다.
새벽 1시가 넘어 혼잡통행료를 받지 않는다.
통행료 징수박스를 빠져나간 채명천의 승용차 라이트에 한 사내가 보였다.
퇴계로 쪽으로 꺾어지기 직전에서 가방을 맨 사내가 손을 흔들었다.
“성철이!”
채명천은 재빨리 차를 세운 뒤 뛰어내렸다.
“야. 총!”
박성철이 가방을 열고 재빨리 엽총을 꺼내 주었다.
“장전됐냐?”
“예, 그런데 총은 갑자기 왜.”
“저기 온다 개자식들.”
부아앙!
채명천을 추적하던 2대의 승용차가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엽총을 발견 한 듯 방향을 틀어 시청쪽으로 그대로 달려갔다.
“넘버 찍어.”
박성철은 어느새 카메라로 사라지는 승용차 두 대를 찍었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한 채명천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제 밤 자신을 추적하던 2대의 승용차 번호를 아는 후배를 통해 추적했는데 도난 차량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내들의 정체를 추적하는 건 불가능하다.
굳은 얼굴로 담배를 피우던 채명천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더니 낯익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우리 사이에 또 전화할 일이 있던가?”
종로경찰서 수사과장 차영수였다.
“나도 더 이상 전화할 마음이 없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말이야.”
채명천은 어제 밤 일어났던 사건을 말해주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대한민국 경찰이 그렇게 한가한 사람들인 줄 알아?”
차영수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 그만하라면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차 과장이 아니라면 누구지’
채명천의 이마는 아침부터 잔뜩 찌푸려졌다.
여기까지가 채명천이 보내온 메일 내용이었다.
메일을 한 번 더 읽고 난 권총수는 빙긋 웃었다.
‘흥미롭군’
마치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경찰이 아니라면 누굴까.
한순간 동해안 백련사에서 만났던 경찰을 사칭했던 두 사내를 떠올렸다.
성영재는 당당하게 경찰을 사칭하고 훤한 대낮에 납치를 시도할 수 있는 기관은 한 곳 뿐이라고 했다.
‘국정원이오’
학생운동 이력은 그를 평생 괴롭혔다.
관할 파출소에서 수시로 자신의 동태를 파악했고 해외여행을 가려면 유난히 절차와 수속이 까다로웠다.
타타탁!
권총수는 채명천에게 메일을 보내기 위해 타이핑을 시작했다.
* * *
피터와 권총수가 차에서 내렸다.
상파울루에서도 지독한 할렘가인 피드로3번지다.
허름한 목조 주택들이 처마를 잇대고 끝없이 늘어서 있고 지붕과 대문 앞에는 걸레인지 옷인지 알 수 없는 빨래들이 바람에 펄럭거렸다.
목줄이 풀어진 애완견들이 골목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싸놓은 배설물과 삼삼오오 모여 바람 빠진 축구공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은 오래전 떠나온 시리아의 난민촌을 떠올리게 했다.
딩동!
붉은 기와를 얹은 처마 낮은 주택의 벨을 눌렀다.
대문이 반쯤 열려 있었지만 남의 집이므로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몇 번 벨을 눌러도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쿨룩쿨룩!
그때 집안으로부터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스윽!
권총수는 오른손에 권총을 쥐고 슬며시 대문을 밀었다.
좁은 마당은 시멘트가 깔렸고 합판으로 만들어진 열린 문을 통해 방안 풍경이 들어왔다.
쉭!
슈우욱!
한 사내가 종이 위에 있는 흰 가루를 한쪽 코로 흡입하고 있었다.
‘코카인’
지독한 마약이다.
코카인은 아주오래전부터 남미의 정글에서 자라온 코카 식물이라는 관목에서 추출한다.
배고픈 원주민들은 코카 식물을 씹으면 일시적으로 배고픔 현상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코카인은 그렇게 배고픔을 가시게 해주는 식물로 알려져 오다 18세기부터 본격적인 마약으로 등장한다.
코카인은 잎에서 추출하는데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코카인을 생산하는 나라는 콜롬비아, 볼리바아, 멕시코, 브라질이다.
“선배님!”
피터가 방안에 축 늘어지듯 누워 있는 사내를 불렀다.
“엉!”
사내는 환청이라 여긴 듯 혼잣말을 했다.
“선배님!”
“흐흑, 누구니? 클라라?”
사내는 완전히 환각 속에 젖어들었다.
“할 수 없군. 저 상태에서는 어떤 대화도 통할 것 같지 않으니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피터는 대문 옆에 방치되듯 놓인 바실리의자(뼈대가 쇠로 된 의자)에 주저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언제 깨어납니까?”
“그건 모르지. 코카인의 흡입 양과 그 사람의 체력에 따라 다르니까. 대화를 나눌 정도라면 40분에서 1시간은 걸릴 거야.”
권총수는 혼자 웃고 중얼 거리는 방안의 남자를 바라보다 멈칫 했다.
본의 아니게 방안까지 살피게 되었는데 방 구석에 멋진 총 한 자루가 세워져 있었다.
‘타보르’
TAR21로 불리며 이스라엘에서 만든 돌격용 소총이다.
유효사거리가 550 정도 나오는데 강점은 집중력이다.
기록에 의하면 쉬지 않고 35,000발까지 쏘았다고 하는데 이스라엘 국방부에서 인정할 만한 동영상이나 정확한 물증은 제시하지 않았다.
아무튼 암거래되는 무기시장에서도 좀체 구하기가 어려운 타보르가 코카인에 중독된 한 사내의 집에서 발견 된 것이다.
사내의 말수가 줄어들었다.
헛소리가 잦아들더니 마치 잠에 빠진 듯 잠잠해졌다.
권총수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흘긋!
손목시계를 보았는데 한 시간이 지났다.
“음!”
방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때 맞춰 오랫동안 기절했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사내는 묵직한 신음을 터뜨렸다.
사내는 일어나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