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죽음의 신사(1)
외인부대 시절 항상 글록 22를 썼다.
어느날 야간전투를 나가기 위해 장비 점검을 하는데 저격수 권총인 글록 22가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고장 부분을 찾아 정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는데 때마침 중대장이 자신이 차고 있던 글록 17을 건네주며 한마디 했다.
“총수, 17도 한번 써봐. 이게 굉장하다구.”
일반 병사들도 그렇지만 저격수는 유난히 총기에 예민하다.
22를 수리해 가지고 나가고 싶었지만 시간이 촉박한데다 상대가 중대장이었다.
자신을 생각해 빌려준 것인데 거절한다는 것이 자칫 민망한 상황을 만들 것 같아 못이긴 체 옆구리에 찔러 넣었다.
그런데 생각 없이 받은 글록 17이 자신의 생명을 살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작전 지역에서는 어떤 일이 생겨도 정해진 구역 밖으로의 이동은 명령권자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다행히 위험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용변을 보기 위해 소대원들과 떨어졌다.
하필 자리를 잡고 앉은 그곳에 IS대원 세 명이 매복을 하고 있었다.
몸에 지닌 것이라고는 중대장에게 넘겨받은 글록 17이 전부였다.
IS들 역시 갑자기 적이 나타날 것이라고는 예상을 못한 듯 소총을 들어올렸다.
빠른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탕!
타탕!
전광석화와 같이 차고 있는 글록 17을 뽑아 세 명의 IS를 사살하는데 성공 한 것이다.
그때부터 글록 17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설혹 우연일 수도 있겠으나 전장의 군인은 별것 아닌 일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분석한다.
그날 이후 글록 17을 과감히 저격수 제식 권총으로 선택한 것이다.
잠시 옛날 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피터가 다가왔다.
자신도 현역시절 17을 애용했다는 것이다.
“글록 시리즈중 가장 현명한 녀석이죠.”
피터는 분명히 말했다.
* * *
상파울루에서 북쪽으로 20여킬로 떨어진 곳에 작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러브롱강이다.
강은 갈대로 덮여 있었는데 검정색 랭글러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갈대가 드문드문한 강가에는 많은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건설사 오데브레시의 마르셀로 회장을 경호했던 킬로 알파 서비스 소속 경호원 넷이 살해 된 장소이다.
“뭐 좀 있어?”
권총수와 오민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건이 일어난지 20일이 넘어가는데도 브라질 경찰에서 수사중이라는 답변 말고는 아직 어떤 의견도 전달해 오지 않고 있었다.
“그만 가자!”
권총수가 손에 묻은 흙을 털어 내면서 차에 올랐다.
부우웅!
랭글러는 갈대숲을 나와 다시 상파울루 시내로 향했다.
상파울루시 8지구에 있는 통루한 병원에 검정색 랭글러가 들어섰다.
병원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린 권총수와 오민철은 곧장 별관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간 두 사람이 찾아간 곳은 시신을 냉동 보관해 놓은 안치실이었다.
입구에 앉아 있는 경비원에게 킬로 알파 서비스에서 나왔다고 하자 군말 않고 일어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끼이이이!
경비원은 모두 네 개의 냉동관을 꺼내 놓고 나갔다.
하얀 시트가 덮여 있는 건 모두 살해당한 킬로 알파 서비스 경호원들이었다.
회사에서는 만약을 대비해 유족들에게 시신 인수를 조금 늦춰달라는 도움을 요청했다.
“뭐하고 있어.”
오민철이 시트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
“한두 명 죽인 것도 아니면서.”
“그러니까 말이야.”
피식 웃으며 오민철은 시트를 걷어 올렸다.
건장한 체구의 백인 사내다.
흠칫!
시신을 보던 권총수는 놀랐다.
온 몸에 핏물이 범벅이 되어 있었는데 그건 한두 발이 아닌 두 자릿수 이상의 총알을 맞았다는 뜻이다.
나머지 세구 역시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잔인한 놈들, 갈대숲으로 데려가 앉혀 놓고 조져 버렸는데.”
권총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얼굴에서부터 가슴까지 총알이 집중되어 있다는 건 사람을 꿇어 앉혀 놓고 면전에서 갈겼다는 뜻이다.
주로 IS가 즐겨 사용하는 수법이다.
남미의 갱단들이 IS살인 수법을 흉내 내고 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있는데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거 뭐야?”
오민철이 눈을 크게 떴다.
권총수 손에 돋보기 한 개가 들려 있었다.
권총수는 돋보기를 이용해 시신의 상의 앞자락을 벌리고 돋보기를 들이댔다.
비전문가들 눈에는 단순한 총알자국으로 보이겠지만 전문가 눈은 미세한 것도 구별하고 특이한 점은 짚어낸다.
“AK도 아니고 M4는 당연히 아닌데.”
권총수는 네 구의 시신을 모두 살피더니 연신 고개를 갸웃 거렸다.
“형, 여기 좀 봐봐.”
권총수가 돋보기를 넘겨주었다.
오민철은 넘겨받은 돋보기로 시신의 몸에 난 탄흔을 살폈다.
매우 진중했고 봤던 상처를 다시 보면서 뭔가 어떤 흔적을 찾아낸 듯 보였다.
“그거 아냐. A9?”
“300.”
권총수가 오른손 검지를 들었다.
오민철은 다시 돋보기로 탄흔을 살폈는데 모호한 눈빛을 보이는 걸 보아 판단이 서지 않는 듯 했다.
APC300
분류는 여러 가지로 하지만 미군에서는 기관단총으로 구별한다.
모든 기관단총들이 그러하듯 집탄 효과가 크고 같은 동종과 비교할 때 유효사거리가 가장 길다.
기관단총의 단점은 짧은 시간에 많은 총알을 쏟아 낼 수 있으나 유효사거리가 짧다는 단점이 있다.
물론 총 길이가 짧다 보니 어쩔 수 없지만 APC300은 일반 자동소총처럼 무려 300미터 정도는 너끈히 쑤셔 박는다.
1분에 1,200여 발을 쏟아내고 3발씩 쏘는 점사 기능도 있다.
오민철의 표정이 굳는다.
무기시장의 거래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신형일수록 가격이 오르는 핸드폰과 다를 바 없다.
더구나 파생형이나 개량형은 앞서 나온 것보다 부속 하나라도 더 성능을 개선했기 때문에 비싸다.
“젠장 핸드폰이 안 터져.”
누군가와 통화를 시도했지만 통화가 안 되는지 권총수가 문을 열고 나갔다.
바깥에 있는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전화 한통 사용합시다.”
안치실 직원이 쓰라는 듯 전화기를 손으로 가리켰다.
권총수는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상대는 킬로 알파 서비스 브라질 지사장 피터였다.
“APC300 시장 가격이 얼마입니까?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예! 예!”
권총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다시 문을 열고 시체실로 들어온 권총수가 말했다.
“3,000달러 선에서 거래된다는데.”
“대략 잡아도 한화로 300만원이 넘잖아.”
오민철이 놀란 얼굴을 했다
세계에서 밀거래 순위 1위가 석유이다.
그 뒤를 이어 무기이고 세 번째가 마약이다.
밀거래의 특징 중 하나가 정상가 보다 싸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정품(정품이라 함은 최초 그 총을 생산한 국가를 지칭)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AK소총인데 러시아에서 생산한 것은 동구권이나 중국에서 만든 것보다 훨씬 비싸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정품 소총은 정식 절차를 밟아 유통되거나 아니면 몰래 빼돌려지는 형태의 거래이기에 비싸다.
“암시장에서 최고가 총으로 거래된다는데.”
범죄 집단에서 전쟁하듯 한 번에 수백 발을 쏟아 낼 일은 없다.
즉 웬만한 복제품만으로도 자신들 사업을 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으므로 굳이 거액을 주고 고가의 오리지널을 잡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정품도 드물게 나도는 APC300이 사용됐다는 건 뭘 의미할까.
권총수는 한참 동안 시신을 바라보았다.
뭔가 잡힐 듯 하면서도 그냥 지나가버린다.
“고가의 기관단총을 구입해 사용할 정도의 자금력이 좋은 갱단이라면 시칠리아 마피아이거나 미국의 감비노 패밀리 정도일텐데.”
오민철이 뭔가 좀 아는 척 했다.
“돈 자랑하기 위해 사용했을 리는 죽어도 없는데.”
“혹시 추적의 혼선을 주기 위해?”
오민철의 말에 권총수의 눈이 빛났다.
“KAS정도면 강력한 용병회사니 한번쯤 후환을 생각 하지 않을 수 없잖아. 그러자면 당연히 쉽게 구할 수 없는 총으로 작업을 하는 게 좀 더 안전하잖아.”
“결국 용의자들은 갱들이지만 가난한 자들이란 얘긴가. 가난하다는 건 큰 조직이 아니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그렇지.”
오민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 값이라는 것이 있다.
자신의 신변이 언제 어떤 위기에 처할지 몰라 브라질의 부호들은 그럴 때를 대비해 파이트 머니로 불리는 돈을 준비해 놓는다.
재력에 따라 달라지지만 일반적으로 그들이 요구하는 액수는 평균 천만달러.
물론 자신이 가진 재산에 비하면 큰 돈은 아니지만 갑자기 미화 천만달러를 만든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상당수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돈을 준비해 놓는데 오백만 달러였다.
천만 달러는 모두 줄 수는 없고 절반인 오백만 달러로 어떻게 해보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는 그런 형태로 진행되었다.
몸 값도 흥정에 따라 깎을 수 있었다.
하루에도 수많은 유괴와 납치가 벌어지고 있는 브라질이고, 거액의 몸값이 오간다.
그러나 4년 전 부동산 재벌 말디니 회장의 막내 딸이 납치되었을 때 2,000만 달러가 지불되어 브라질 납치 범죄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더욱이 범인들은 2,000만 달러에서 단 한 푼도 뺄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이후 재력가들의 자신의 목숨 값 즉, 파이트 머니는 슬며시 천만 달러로 올라갔다.
그들은 은행 인출을 거부했다.
이쪽에서 돈을 인출 할 수 있도록 자료를 주겠다고 제의 했지만 냉정하게 잘라 버린 것이다.
금융당국과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여러 개의 지점으로 분산하여 돈을 인출해도 어차피 동일한 계좌에서 거액이 빠져나가면 곧바로 체크되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돈을 찾아 가지고와’
아무리 브라질 건설도급 순위 1위를 달리고 있는 오데브라시 회사이지만 갑자기 오천만달러를 준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경찰과 금융당국의 감시망을 벗어나고, 그것도 백 달러짜리로 오천만 달러를 채우자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어제 밤 범인들은 최후통첩을 보냈다.
‘사흘의 시간을 주겠다.’
사흘이 지나고 한 시간씩 늦을 때마다 손가락을 한 개씩 자르겠다고 했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
결국 외부의 눈을 피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회사 간부들의 통장에 들어 있는 예금을 긁어모으는 것이었다.
드르르륵!
십여 대의 지폐 계수기가 불이 나도록 돌아가고 있었다.
백달러짜리 지폐가 백장씩 모아질 때마다 지키고 있던 사내들이 붉은 종이 띠를 이용해 묶었다.
그렇게 만 달러씩의 묶음이 차곡차곡 가방에 쌓이며 다섯 개째 대형 캐리어가 채워지고 있었다.
“오천!”
마지막으로 백 달러짜리 백장이 묶음이 되어 가방에 담겼다.
“서둘러!”
사내들은 캐리어를 회색 밴에 실었다.
아무런 흔적도 실마리도 잡지 못했다.
오데브라시 회사에서는 KAS와 접촉을 끊었다.
그들만의 어떤 움직임이 있어 보이긴 하지만 KAS 인물들이 눈에 띄면 마르셀로 회장을 살려두지 않겠다는 경고를 보냈다며 제발 신경 꺼 달란다.
“전혀 길이 없는 건 아닌데.”
총무과 직원이자 브라질 현지인인 자뉴가 책상에 앉아 끼어들었다.
그러자 모두가 고개를 돌렸는데 지금 무슨 소리하느냐는 시선이다.
자뉴가 어색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가 아는 전직 경찰관 한 분이 있는데 평생 이런 사건만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말해봐.”
“성질이 더러워.”
“어떻게 더러운데요?”
권총수가 추궁하듯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