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KAS(Kilo Alpha Services)1
영국은 이라크와 다르기 때문에 따로 준비할 건 없었다.
속옷과 간편복 두 벌만 챙겨 가방에 담았다.
내년 이맘때에 서울에 있을지 아니면 다른 곳에 있을지는 모른다.
이런걸 두고 싱숭생숭 하다고 하는 걸까.
외인부대 입소 때와는 또 다른 애틋한 감정은 어디서 생기는 걸까.
“건배!”
오민철과 생맥주잔을 들어 힘차게 부딪혔다.
채명천은 종로 경찰서 수사과장 차영수와 마주 앉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순경으로 들어왔다가 오늘날 수사과장인 경정까지 진급한 입지 전적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업은 잘되고?”
“그럭저럭!”
채명천은 잔을 비운 뒤 안주로 나온 참치회 한 점을 기름장에 찍어 입에 넣고 씹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 날 보자고 한 거야?”
차영수가 채명천의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차 경정 나 좀 도와 줘.”
“뭔데?”
채명천은 5년 전 비리에 연루되어 옷을 벗었다.
불법 성매매 업소 뒤를 봐주고 돈을 먹은 것이 들통 난 것이다.
나만 뒷돈 받아먹었냐면서 한바탕 소란을 피웠지만 재수 없게도 시범 케이스라는 것에 걸려 옷을 벗어야 했다.
“25년 전 사건.”
“25년 전 사건? 그게 뭔데?”
“왜 이래 또, 자네나 나나 경찰생활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 하면 그것 아냐. 여배우 설지 교통사고.”
설지라는 이름이 나오자 차영수가 움찔했다.
“자네 입으로 이건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라고 한 것 같은데, 내 귀가 거짓말 할리는 없고.”
“이 사람 진짜 왜 이래.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래. 도대체 몇 년이 흐른 사고를 가지고.”
쭈욱!
소주잔을 비운 채명천이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 고객이 그 사건에 대해 알고 싶어하네. 느낌이 와. 돈에 인색할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고.”
제대로 된 고객을 만난 것 같으니 좀 도와달라는 의미였다.
“술맛 떨어지는데 그만 하지.”
“난 술맛만 좋은데 뭘.”
“정말 이럴거야.”
차영수가 노려보았다.
“이런 말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뭔데 그러나 말이나 해보게.”
“자네에 대한 투서가 적지 않네. 물론 경쟁 업체들이 보낸 것이겠지만, 불법 투성이라는 거야.”
심부름 센터를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법적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말이다.
“흣흣! 불법이 있으면 경찰이 조사 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당시 자료가 있을 거야. 복사만 할 수 있게 해주게.”
“어이 채 사장, 정말 왜 이래? 알 만한 사람이.”
“한번만 도와줘. 어려울 것 없잖아.”
“채 사장, 지금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 같네. 못들은 걸로 하지.”
쭈욱!
채명천은 잔을 비우고 일어섰다.
“섭섭하군. 먼저 일어나겠네.”
채명천은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드륵!
문을 반쯤 열던 채명천이 돌아섰다.
“아, 차 경정 혹시 안국동 네바다이( ねたばい: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속이는 일)사건 기억하나. 그때 네바다이 당했던 다이아 반지가 아직까지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한 것으로 아는데 말일세.”
탁!
문이 닫혔다.
차영수의 표정이 우그러져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온 몸을 휘감아 돌았다.
14년 전 안국동에 있는 ‘가파도’라는 횟집에서 술을 먹고 나올 때였다.
후배들이 경사 시험에 합격한 채명천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자리였다.
회식에 참석한 인원은 다섯.
불콰한 얼굴로 골목을 걸어 나오는데 누군가 휙 하니 번개처럼 앞으로 지나갔다.
평소라면 모를까 술기운에 젖은 차영수는 피하지 못하고 달리는 사내와 충돌을 하고 말았다.
사내는 나동그라졌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더니 사라졌다.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린 사내를 한 번 노려본 뒤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차영수의 눈이 빛났다.
골목 전봇대 아래 뭔가 반짝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보지 못했던 물건인데다 워낙 밝게 빛났기에 다가가 주워들었는데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건 다이아 반지였다.
그리고 다음 날 뉴스가 흘러나왔다.
어제 밤 안국동 4거리에 있는 금은방 ‘청보석’에서 시가 2억8,000만원짜리 다이아 반지를 도난당했다는 것이다.
용의자는 대범하게 사흘 전 결혼을 앞두고 있다면서 필요한 다이아 반지를 주문했고 어제 다시 가게를 찾아와 가짜를 놓고 진짜를 훔쳐 달아났다는 것이다.
뉴스 화면에 나온 동일 모델의 다이아반지를 보는 순간 차영수는 소스라쳤다.
어제 밤에 주운 다이아 반지였다.
범인은 보름 만에 잡혔다.
하지만 범인은 도주하다 길 가던 사람과 부딪혔는데 집에 와서 보니 반지가 없어졌다고 했다.
경찰은 범인의 진술을 토대로 동선을 철저히 수색했다.
또한 금은방 주인은 가져다주는 사람에게 천만원을 주겠다는 약속까지 했지만 끝내 다이아 반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 달 동안 고민하던 현직경찰이 반지를 내 놓을 수는 없었다.
이미 주운 바로 그날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 부터가 문제 있는 행동이었다.
자신이 반지를 주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채명천 뿐이었다.
결국 나중 채명천이 아는 장물아비에게 1억을 받고 팔아 오천씩 나눠 가졌다.
콱!
차영수는 소주병을 거머쥐었다.
‘이 자식이’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인천에서 런던 직항으로 12시간 정도 소요된다.
그동안 권총수에게 접근해온 민간 보안업체는 많았다.
아카데미를 비롯해 지금 가고 있는 킬로 알파 서비스, 그리고 아프리카 경제 개발과 정치에 깊이 개입 하고 있는 마르케스 반체 마르케스(MVM)다인 코프(DynCorf)등 대략 10여 곳이다.
그중 가장 큰 돈을 제시했던 곳은 예상대로 아카데미였다.
계약금은 150만달러까지 올랐고 일급 1,800달러였다.
이곳 역시 고액의 계약금에는 최소 3년 동안 자기 회사에서 일한다는 조건으로 지불되는 것이다.
장비도 좋고, 지명도는 물론 회사에서 제공되는 여러 가지 복지 혜택도 가장 나았다.
의외였던 곳은 다인코프였다.
주로 아프리카 분쟁지역, 그중에서 금광개발에 뛰어든 세계적인 광산 업체들 경비에 많이 투입된다.
개발을 반대하는 원주민들과 그린피스를 포함한 지역 환경단체와의 싸움은 중동전쟁보다 더 험악하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 회사에서 100만달러 계약에 일급 2,500달러를 제시 한 것이다.
아무리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서구 자본에 착취당하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싶지는 않았다.
오민철은 어느 새 잠이 들어 있었다.
권총수는 비행기에 오르면서 가지고 왔던 신문을 펼쳐들었다.
화악!
권총수 눈이 커졌다.
‘퀸의 남자, 그는 정말 누구인가’
라는 타이틀 기사가 큼지막하게 실렸다.
권총수는 눈을 빛내며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출판사는 소설적 픽션일 뿐이라고 거듭 강조 하지만 책을 읽어본 서울대 김판석 교수는 ‘소설을 빙자한, 차라리 다큐멘터리라고 하는게 적절할 것으로 본다’고 했다.
여주인공 퀸은 누가 뭐라고 해도 25년 전 세상을 떠난 여배우 설지씨가 맞다고 본다.
문제는 남자다.
출판사와 작가가 자꾸 소설임을 강조하므로 더 이상 왈가왈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여권의 어느 고위 정치인을 떠올리게 만드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신문은 온통 ‘퀸의 남자’에 대한 소식으로 도배가 되다시피 했다.
문제는 A, B, 즉 영문 이니셜만 난무할 뿐 누구라고 콕 집어 쓴 기사는 없었다.
그건 퀸의 남자로 추정되는 사람의 정치적 위치가 막강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촤락!
신문 여기저기를 더 훑어 본 권총수는 접어 의자에 꽂아 놓고 조용히 잠이 들었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 대항항공여객기가 내려앉았다.
런던은 처음이다.
런던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첼시와 아스널이라는 EPL소속의 두 축구팀이다.
축구를 좋아하다 보니 어린시절부터 두 팀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난 아스널이야.”
오민철이 단호히 말했다.
“좋아하는 선수 있어?”
두 사람은 입국통로를 따라 걸어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없어.”
“좋아 하는 선수도 없는데 아스널을 좋아 한단 말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정 선수 때문에 그 팀을 좋아 하잖아.”
“당연하지.”
“난 아니야.”
“그럼 뭣 때문에 아스널을 좋아하는데?”
“4-3-3-시스템.”
“허걱!”
권총수의 눈이 커졌다.
시스템을 운운할 정도면 평범한 팬이 아니다.
이미 축구에 대한 어느 경지에 오르지 않고는 시스템이 좋아 특정 팀의 팬이 될 수는 없다.
“4-3-3의 장점이 뭐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권총수는 물었다.
“너 지금 날 의심 하냐? 4-3-3이라는 거 별것 아냐. 아주 간단하고 쉬운 거야.”
“그러니까 뭐냐고?”
“이른바 쓰리 톱, 공격수에 3명을 배치 한다는 건 공격위주의 축구를 하겠다는 거지. 특히 세명의 미드필더가 포인트인데 두 명을 수비형으로 한 명을 공격형으로, 이때 한명의 공격형은 볼 배급뿐만 아니라 공격수에게 슈팅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야. EPL에서 아스널이 4-3-3에 가장 최적화된 팀이지.”
꿀꺽!
권총수의 눈이 커졌다.
전문가적 설명이고 어휘 구사력이다.
“국가대표로는 네델란드가 4-3-3을 즐겨 쓰지. 체격 좋고, 힘 좋고 운동장을 넓게 쓰는 그들의 4-3-3은 단연 압권이야.”
“형 가자 우리 둘만 남았다.”
승객들 모두 떠나고 둘만 남아 있다.
입국 수속을 밟고 들어서자마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스터 총수.”
총무이사 제임스와 직원 헨더슨이 나와 있었다.
일행은 반갑게 맞으며 악수를 나눴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제임스 얼굴이 조금 상기되었다.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된 일이지만 킬로 알파 서비스에서는 권총수 영입에 회사의 사활을 걸었다고 했다.
한 명의 뛰어난 용병이 천명의 직원을 먹여 살린다는 것이 킬로 알파 서비스 창립자이자 현 대표인 존 스톤스의 지론이다.
많이 뽑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는 분명한 직원이 필요하다.
그가 말하는 분명한 직원은 권총수 같은 업계에서 위력을 떨치고 있는 사람이었다.
붉은 색 롤스로이스 한 대가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회사 대표인 스톤스가 자신이 타고 다니는 롤스로이스를 직접 내주었다는 말에 권총수는 깜짝 놀랐다.
이쯤 되면 고마운 것이 아니라 부담스럽다.
군대서 배운 것 중 하나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었다.
군대야 말로 가장 완벽한 중용의 집단이다.
넘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을 정도로만 행동하는 것이야 말로 완벽한 타의 모범인 것이다.
차가 육중한 다리에 진입했다.
권총수는 속으로 타워 브릿지라고 생각 했다.
오기 전 런던에 대해 조금 공부를 했고 런던 하면 가장 먼저 이 다리를 떠올린다고 했다.
다리는 고풍스럽고 오랜 세월의 풍상이 곳곳에 배어 있었는데 한국의 획일적인 교각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강은 보잘 것 없었는데 한강의 폭과 비교하면 작은 개천 수준이다.
차가 멈췄다.
공항을 떠난지 40분 만이다.
조수석에 탄 제임스가 재빨리 내려 뒷문을 열어주자 권총수가 한마디 했다.
“앞으로는 내 손으로 열어 보고 싶소.”
공항에서 탈 때는 처음이니 하고 넘어갔으나 내릴 때 또다시 문을 열어주는 서비스에 웃음을 짓고 말했다.
높이 날수록 떨어지는 속도는 빠르다.
물론 떨어지지 않을 자신은 있지만 어쨌든 지나친 친절도 불편하다.
일행은 로비를 가로질러 곧장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49층을 올라가는데 30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49층 전부가 대표인 스톤스의 사무실이라고 했다.
작은 수영장을 비롯해, 미니 골프 연습장, 헬스장, 집무실등 다양한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비서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짧은 치마를 걸친 백인여자가 돌아보았다.
“이사님!”
제임스를 발견한 여자가 놀란 얼굴을 하더니 권총수와 오민철을 돌아보았다.
“회장님 계시죠?”
“네 조금 전 운동을 끝내고 쉬고 계세요.”
피익!
인터폰을 눌렀다.
“회장님 이사님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시고 와요.”
착 가라 앉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비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오세요.”
여비서가 앞장서 들어갔고 일행은 뒤를 따라 갔는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선 권총수는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