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시장진출(1)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옆으로 다가와 자신과 나란히 섰음을 알 수 있었는데 끝까지 모른 체 하기로 했다.
“바다를 보십니까?”
낭랑한 목소리에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둘이 왔는데 한 사람뿐이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남자는 멈칫했다.
동행한 사내가 어느 새 바닷물이 닿는 절벽 아래에 내려가 있었다.
결국 자신에게 용무가 있는 사람은 청춘의 음색을 가득 담고 있는 왼쪽의 사내로 보인다.
“픽션 치고 너무 적나라했습니다. 그 만큼 자세히 쓰시면 웬만한 사람은 눈치 채죠. 하물며 당사자는 말할 필요조차 없겠죠.”
홱!
성영재는 놀라며 돌아보았다.
지그시 웃고 있는 사내, 필시 뭔가를 알고 있는 듯 한 얼굴이었다.
“책속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퀸이라는 여자의 본명은 오 설지겠죠. 설지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여배우?”
“누구십니까?”
“맞습니까?”
기자도 아니고 경찰 쪽도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고 있던 국정원쪽 사람은 더욱 아니었다.
학창시절 학생운동을 하면서 경험한 국정원 직원들은 이렇게 오지 않는다.
다짜고짜 낚아채듯 끌고 가 반쯤 죽여 놓고 일을 시작한다.
“어느 쪽이오?”
그건 퀸의 남자가 단순히 소설만은 아님을 인정하는 행동이었다.
그때 권총수가 느릿하게 왔던 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자신과 오민철이 걸어왔던 구불구불한 산길에 등산객 복장을 한 두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꿈틀!
성영재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권총수와 오민철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었던 건 바람결에 실려 온 웃음소리 때문이었고 거리도 훨씬 가까웠다.
그러나 지금 오는 사람들은 거리도 멀 뿐 아니라 자신의 귀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자신은 누군가 오고 있다는 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슬쩍 권총수를 살폈다.
명동이나 홍대 앞에 가면 발길에 채일 만큼 볼 수 있는 그런 청년들과 비슷한 나이로 보인다.
‘족히 300미터는 될 터’
어떻게 그 먼 곳에서 나누는 대화를 듣고 사람이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딸칵!
권총수는 양손으로 바람을 막으며 라이터를 켰다.
“겨울 바다 겨울 바다 하지만 10분도 서 있지 못하죠. 성 작가님에게 용건이 있는 사람들인 모양입니다. 기자들 같아 보이지는 않고.”
권총수는 바다를 향해 연기를 내 뿜었다.
“하던 얘긴 계속 하죠. 설지라는 여 배우에 대해 조금 알게 됐습니다. 책은 거의 그 여자의 삶을 다뤘더군요. 남자 또한 현직 정치인인 것 같고.”
성영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표현을 한다는 것이 주제넘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책 곳곳에 상당한 분노가 스며 있었습니다? 여주인공 퀸이 사랑한 정치인에 대한 노골적인 증오에 대해 설명 좀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 온다.
빨간색과 노랑색 자켓을 걸친 그들일 것이다.
권총수의 말처럼 남자 둘이서 겨울 바다를 구경하기 위해 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척!
처처척!
발자국 소리가 둥글게 맴도는 것이 주위 경관을 살피는 모양이다.
성영재는 마른침을 삼켰다.
도망치지 않았던 건 권총수와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오민철 때문이었다.
연행을 하든 납치를 하든 목격자가 있다는 건 자신의 신변을 상당히 보장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성영재 작가님.”
그제 서야 성영재는 돌아섰다.
등산객 차림의 두 사내는 서른 초반정도로 보였다.
“경찰입니다. 이번 작가님의 작품 퀸의 남자로 인해 자신의 명예가 심각하게 실추됐다는 고소장이 접수되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옆에 서 있는 권총수의 눈치를 살폈다.
성영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시죠.”
“영장 있소?”
두 사내가 멈칫 하며 끼어든 권총수를 보았다.
“사람을 데려가려면 체포 영장이 있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권총수의 말에 귀마개를 걷어 올린 검정색 야구 모자를 쓴 사내가 말했다.
“선생은 누구시죠?”
“조금 전 경찰이라고 하셨는데 신분증 좀 볼 수 있을까요?”
두 사내는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텔레비전에서 보면 나쁜 놈들 데려 갈 때 경찰입니다 하면서 신분증 내 보이던데?”
절벽 아래 바닷가에서 놀던 오민철이 어느새 올라왔다.
오민철까지 나타나자 두 사내의 표정이 굳었다.
“왜 그러십니까? 신분증 좀 보자는데 그게 어려운 일입니까?”
권총수는 이미 두 사내가 경찰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다고 검찰도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두 기관이 아니면서 사람을 데려 갈 수 있는 곳은 딱 한곳이 있다.
권총수는 야릇한 표정을 짓더니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삼척 경찰서죠. 여기 경찰이란 사람들이 왔는데 신분을 밝히지도 않고 사람을 데려가려고 합니다. 예, 예!”
권총수가 전화기를 내리고 물었다.
“어느 경찰서에서 왔는지 물어 보라는군요. 전화 받아 보시겠습니까?”
권총수가 핸드폰을 건넸다.
피식!
검정 야구 모자를 쓴 사내가 실소를 지었다.
“매우 똑똑한 분이시군요. 실례지만 이름이?”
“대충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은데.”
권총수가 유들유들 웃자 사내들이 쏘아 보았다.
“실례했습니다.”
사과는 성영재를 향해 했지만 시선은 권총수에게 고정되었다.
한번 두고 보자는 싸늘한 눈빛이었다.
백련사 절로 돌아왔다.
조용한 방에는 차향이 피어나고 있었다.
“맞습니다. 내 책에 있는 내용은 90프로가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성영재가 침통한 표정을 했다.
“일찍 나왔어야 할 책이었지만 세상이 너무 험악했소.”
“세상이 너무 험악했다는 말은 우리 사회가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까?”
권총수가 물었다.
“당신은 국민들의 인권이 충분히 보호되고 있다고 보시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은 상대진영을 용서하지 않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나라였소.”
일찍 책을 내고 싶었지만 시대가 너무 엄혹하여 미뤘다가 지금에서야 낸 것이라는 뜻이었다.
“내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갑자기 성영재가 환히 웃었다.
“이래 봬도 만인의 여인으로 불렸던 배우 설지씨의 남자 친구였소.”
권총수의 눈이 커졌다.
“왜 믿기지 않소? 여성지에 실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땐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천하제일 도둑놈, 나쁜 놈이라는 질투의 손길을 받았고.”
옛날을 떠올리자 즐거운 듯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면서 안쪽에 있는 가방을 열더니 낡은 여성지 한권을 꺼냈다.
툭!
성영재는 권총수 앞으로 책을 밀었다.
그러자 오민철이 중간에서 재빨리 낚아채듯 가져가더니 펼쳐들었다.
여성대한이라는 월간지였다.
“키햐, 옛날 생각난다.”
오민철이 잡지에 실린 빛바랜 옛 광고들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태우전자 광고 진짜 오랜만에 본다.”
깔깔 거리며 옛 추억을 더듬어가던 오민철이 눈을 빛냈다.
“여깄다.”
그러면서 책 페이지를 보여주었다.
‘우리들의 퀸(Queen)을 사로잡은 남자’
라는 타이틀 기사와 함께 기사가 빼곡하게 시작되었다.
“그러고 보니 묘하군요.”
성영재는 권총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닮았습니다. 볼수록 그녀의 옛 모습 그대로군요.”
권총수는 빙그레 웃었다.
“혹시!”
“아직은 모릅니다. 단지 닮았다는 말은 많이 듣고 있죠. 그래서 작가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한 가지만 대답해 주십시오. 여 주인공은 설지라는 배우이고 남자는 지금 청와대에 앉아 있는 사람이 맞습니까?”
“그렇소.”
“됐습니다.”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가려고? 내용을 한번 읽어 보지 그래.”
“봐서 뭐해.”
오민철이 주춤 따라 일어났다.
딸칵!
권총수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눈이 오잖아.”
들려오는 목소리에 오민철이 재빨리 밖을 내다보았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 * *
브리티시 항공소속 여객기 한 대가 막 인천공항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많은 사람들이 입국장을 들어서고 있었다.
사람들 가운데 눈에 띄는 두 명의 백인 사내가 돋보인다.
한 사람은 조종사 선글라스를 꼈고 오른쪽 회색 양복을 걸친 사내의 손에는 가죽 가방 하나가 들려 있었다.
두 사람은 뭔가 얘기를 나누며 공항청사를 빠져나와 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밖에 나와 동료들과 얘기를 나누던 택시운전사가 재빨리 운전석에 앉았다.
두 사람이 올라타자 기사가 물었다.
“어디로 모 실까요?”
“구기동.”
“우이동?”
“세검정 구기동.”
“오케이.”
기사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차는 출발했다.
택시가 멈추고 권총수와 오민철이 내렸다.
“이 집이야.”
차에서 내린 오민철이 단독주택을 보며 물었다.
“괜찮네. 야 얼마 줬다고 했지.”
“6억!”
마당으로 들어선 오민철이 주위를 살핀다.
“혼자 살기에는 딱인데, 창문과 현관은 이번에 새로 고쳤냐?”
“천 만원 주고 대충 손 좀 봤지. 손 대려면 한도 끝도 없겠더라고.”
거실로 들어온 오민철이 이방 저 방 살피며 말했다.
“좋다. 야 내 동생 성공했다.”
권총수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커피?”
“좋지.”
권총수는 전기주전자에 수돗물을 담고 코드를 꽂았다.
“얼마 대출 받았다고 했지?”
“3억!”
“가진돈이 3억 조금 넘는다고 했지?”
“공사비 주고 이것저것 좀 사들이다 보니 통장 잔고 바닥이야.”
“조용하고 좋다. 나중 나 서울에 올라오면 재워주는 거지?”
“당근.”
권총수는 끓는 물을 커피 잔에 부었다.
티스푼으로 휘휘 젓은 후 식탁에 놓았다.
“그만 보고 커피 마셔.”
“화장실도 예술이군.”
마지막으로 화장실까지 살핀 오민철이 맞은편에 앉았다.
“한국에 있었으면 5년 사이에 무슨 수로 이런 집을 사냐? 안 그래?”
“돈은 지금부터 벌어야지.”
“어떻게 결정했어?”
오민철은 민간 보안업체와의 계약 일체를 권총수에게 일임했다.
권총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데?”
바로그때 누군가 벨을 눌렀다.
인터폰을 바라보던 오민철이 눈을 크게 떴는데 백인 둘의 얼굴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어?”
누구냐는 듯 권총수를 보았다.
권총수는 대문을 열어주고 바깥으로 나갔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자 두 명의 백인이 들어서며 미소를 짓는다.
“총수?”
“어서 오십시오 제임스 이사.”
권총수는 두 사람과 차례대로 악수를 나눴다.
“형, 영국에서 오신분들이야. KAS(Kilo Alpha Services).”
오민철의 눈이 커졌다.
“락까에서 우리 소대원들을 도와준?”
“이 사람들이야. 킬로 알파 서비스 간부.”
“늦었지만 고맙습니다. 그때 두 분이 아니었다면 우리 소대가 조금 위험해 졌을텐데.”
“민철?”
“제임스.”
“헨더슨.”
오민철은 두 사람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날, 조금이 아니라 결정적인 도움이다.
만약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자신과 권총수는 몰라도 소대장과 동료들 상당수가 역습을 받았을 것이고 어떤 피해를 입었을지 예측할 수도 없다.
처음 만났지만 공기는 훈훈했다.
분위기를 나쁘지 않게 한 가장 결정적인건 역시 돈이었다.
KAS에서 계약금으로 50만 달러를 제시했다.
계약금 액수로만 본다면 결코 많은 돈이 아니다.
아카데미를 비롯해 마르체스, 다인코프등 굵직한 전쟁 기업들이 네이비씰과 델타포스, 러시아 스페츠나츠, 영국 SAS 출신들에게 지불하는 계약금 평균액이 67만 달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