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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64화 (64/651)

제64화: 화려한 휴가(4)

호텔 컴퓨터를 켰다.

곧바로 포털에 들어갔는데 한 남자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집권여당인 민국당 대통령후보 권철태의 광고 영상이었다.

올해 예순둘의 나이로 국회의원만 6선을 지냈다.

서울대를 나왔고 민국당 대변인, 정책의장, 원내대표를 역임했다는 화려한 정치경력이 나열되었다.

얼마 전 프랑스도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정권이 교체됐다.

젊은 대통령이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면서 거센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었다.

프랑스는 군인 신분인데도 불구하고 정치적 의사표시가 자유로웠다.

부대 안에서도 웬만한 정치 행위는 문제 삼지 않았다.

지지하는 후보가 달라 작은 언쟁정도는 있었으나 목소리를 높이며 싸우거나 얼굴 찌푸리는 일은 보지 못했으며 오직 철저한 도덕성과 정책만을 놓고 따졌다.

여론조사를 보면 민국당 권철태 후보가 15프로 내외로 쭈욱 앞서고 있었다.

일부 기사는 차기 대통령으로 권철태를 지목해 버리기까지 할 만큼 지지기반이 탄탄했다.

호텔을 나와 길 건너 해장국집으로 들어갔다.

호텔조식은 막 자고 일어난 컬컬한 입맛을 살리는 데는 맞지 않았다.

권총수는 콩나물 국밥 한 그릇을 주문했다.

식당 안은 여기저기 직장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후루룩 소리를 내며 바쁘게 아침을 먹고 있었다.

컵에 냉수를 따라 목을 축인 권총수는 뉴스가 진행되고 있는 텔레비전을 주시했다.

광화문 네거리를 점거한 채 즉각 북한을 향한 보복을 촉구하는 여러 단체들의 시위 모습을 보여주었고 국방부 대변인이 카메라 앞에 나와 우리군은 주한미군과 긴밀한 협력체계를 유지하면서 이번 총격사건을 반드시 짚고 넘어갈 것이라고 했다.

이어 대통령선거 뉴스가 이어졌는데 각 언론사들이 경쟁적으로 쏟아낸 여론 조사가 이목을 끌었다.

여론조사 기관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민국당의 권철태가 작게는 7퍼센트 내외에서 많게는 25퍼센트까지 앞서고 있었다.

누군가 이번 대통령 선거는 해보나 마나라고 중얼 거렸다.

“식사 나왔습니다.”

김이 펄펄 나는 콩나물 국밥이 왔다.

권총수는 고춧가루를 한 숟갈을 넣고 휘휘 저었다.

쭈욱!

수저로 국물을 떠서 맛을 보았다.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국물 맛.

이 맛을 본지 언제인지 기억에도 없다.

보육원에서 독립한 이후 제대로 끼니다운 끼니라고는 프랑스로 떠나기 전 USB에서 벗겨 낸 금을 팔아 마련했던 삼겹살이 마지막이었다.

후루룩!

며칠 굶주린 사람처럼 권총수는 소리를 내며 콩나물 국밥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택시 한 대가 멈추고 권총수가 내렸다.

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선 시장골목이었다.

차에서 내린 권총수는 뭔가를 찾는 듯 주위를 휘둘러보다 눈을 빛냈다.

멀리 십자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권총수는 교회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사랑교회’

벽에 붙은 교회이름을 중얼거리다 말고 멈칫했다.

교회 담벼락 한쪽으로 초록색 하트가 그려져 있었는데 ‘베이비 박스(BABYBOX KOREA)’라고 쓰여 있다.

권총수는 천천히 다가가 자세히 살폈다.

‘눌러주세요’

박스 위쪽으로 노란 벨이 하나 있었다.

아마 벨을 누름으로써 이 안에 아이가 들었다는 걸 알려주는 신호인 듯 했다.

벨이 울리면 교회 관계자가 뛰어나와 박스 안에 들어있는 아이를 데려가는 모양이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베이비 박스를 한참이나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을 때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예순 중반으로 보이는 점퍼 차림의 초로의 노인이 서 있었다.

손에 목장갑을 끼고 드라이버가 쥐어져 있는 것이 교회 어딘가를 수리하고 있었던 듯 보였다.

“저는 권총수라고 합니다. 22년전 이곳에 버려진 아이였죠. 가톨릭 재단인 노향 복지원으로 넘겨져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노인이 눈썹을 찌푸렸다.

“노향 복지원이라고 했소?”

“예!”

노인은 권총수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주위를 한번 살폈다.

“잠깐 들어오시죠.”

권총수는 노인을 따라 들어갔다.

노인은 예배당 입구 오른쪽으로 붙어있는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교회 행정업무를 보는 곳인 듯 사십가량의 남자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아줌마가 컴퓨터에 매달려 있었다

권총수가 들어서자 두 사람이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집사님 권사님, 20년전 우리 교회 베이비 박스에 넣어졌던 청년이랍니다.”

순간 두 사람은 무척 반가운 표정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세요.”

“어머, 반가워요.”

권총수는 환한 미소를 건네는 둘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이 교회의 담임목사인 이칠규였다.

사랑교회는 신학교를 나와 목사 안수를 받고 자신이 개척한 교회라고 했는데 올해로 꼭 사십년이 되었다고 말했다.

“뭘 알고 싶습니까?”

이칠규는 종이컵 안에 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물었다.

권총수는 품에서 원장수녀에게 받았던 목걸이를 내밀었다.

“저의 목에 이것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름 생년월일은 종이에 적혀 있었고.”

목걸이를 살피던 이칠규의 시선이 두 개의 십자가에 멈췄다.

한참을 바라보던 이칠규가 목걸이를 놓고 상체를 바로 세웠다.

“가물가물 합니다만.”

이칠규는 담담한 목소리로 20년 전 얘기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1996년 12월31일.

세상은 연말연시라는 사회적 분위기에 잔뜩 취해 있었다.

그러나 바깥과 달리 묵은 한해를 보내고 다가오는 새해를 엄숙히 맞이하는 곳도 있었다.

이곳 사랑교회도 그중 하나였다.

송구영신(送舊迎新)예배.

10시30분쯤 예배가 끝나고 조촐한 다과가 있었다.

교인들은 음료와 과자를 먹으면서 몇 시간 남지 않은 새해 덕담을 나누고 11시 30분쯤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이칠규 부부 역시 교인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12시가 조금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

딩동!

잠결에 들리는 종소리에 이칠규 목사는 눈을 떴다.

베이비 박스에 아이를 넣고 누군가 벨을 누른 것이다.

재빨리 잠옷차림 그대로 달려나갔을 때 한 아이가 포대에 싸여 있었다.

“혹시 몰라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가끔은 숨어서 자신의 아이가 안전하게 내 품에 안기는지 확인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권총수는 권사라는 여자가 가져다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휴가를 올 때까지만 해도 버려진 자신의 운명을 추적해보리라는 마음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공항 입국장에서 목격했던 오민철과 가족들의 가슴 뛰는 상봉만 없었다면 지금쯤 혼자 호젓하게 여행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과거로 빠져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조금은 우습기 조차했다.

“도움이 될까 모르겠습니다만.”

이칠규 목사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들었다.

“아무거라도 괜찮습니다.”

권총수는 슬쩍 웃음을 지었다.

“아이에게서 아주 독특한 냄새가 났어요. 냄새라기보다는 향기라고 해야할까요.”

“향기?”

아이들은 이른바 젖 냄새라고 하여 약간 비릿한 모유냄새가 난다.

일반 분유를 먹더라도 엄마 품에 자주 안기다 보니 그런 냄새가 배는 건 일반적이다.

그럴 때 그냥 젖 냄새라고 하지 향기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어떤 향기였습니까?”

“글쎄 가끔 교우의 결혼식을 갈 때면 집사람이 향수를 쓰는데….”

“향수였단 말입니까?”

“화장품 냄새라고 하기에는 뭔가 경건하다 싶을 정도 였으니까요.”

권총수 눈이 커졌다.

냄새를 표현하는데 경건하다는 단어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았다. 보육원 시절을 떠올려 볼 때 그 말은 주로 종교적 용어로 쓰였다.

어떤 향기였기에 공경하고 엄숙하다고 말하는 걸까.

“저기 목사님!”

그때 업무를 보고 있던 권사라는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지금 목사님께서 경건하다고 말씀하신 향수말인데요. 얼마 전 어떤 쇼 호스트가 향수 광고를 하면서 그렇게 표현한 걸 본적 있어요.”

“그래요?”

목사의 눈이 커졌다.

“텔레비젼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KJ쇼핑을 보게됐어요. 쇼호스트가 향수 설명을 하는데 표현하기를 프랑스의 유명한 조향사 잭 브리더가 차라리 경건하다는 표현을 한 극상의 향수라더군요.”

“무슨 향수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권총수가 물었다.

“KJ쇼핑에 전화해서 그때 팔았던 향수가 뭔지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에요.”

“권사님 지금 전화 한 번 해보시죠. 인터넷 찾아보면 전화번호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네 목사님!”

다다닥

여자는 키보드를 두들겼다

“여기 있네요. 1588.”

여자는 곧장 통화를 시작했다.

광고했던 향수이름을 묻더니 예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맙습니다하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프레땅(printimps)이라는데요”

향수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다.

“어떤 향수인지 검색해봐요.”

“네!”

여자는 프레땅 향수에 대해 검색하기 시작했다.

“말도 안돼.”

여자가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깜짝 놀랐다.

“50밀리가 미화 4,500달러,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거의 500만원.”

여자의 눈이 튀어 나올 듯 커졌다.

피아노 소리가 격하게 흘러나왔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이다.

점심시간이 지난 샤이닝 호텔 커피숍은 다소 한산했다.

잘 차려 입은 두 명의 아줌마와 중절모를 쓴 노신사가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고 어느 회사의 팀원들인 듯 여섯 명의 남녀가 각자 앞에 커피잔을 놓고 웃고 떠든다.

권총수는 손목 시계를 보았다.

약속 시간에서 5분이 지났다.

초고가의 향수를 판매하는 쇼호스트는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진다.

“실례합니다.”

권총수는 고개를 돌렸다.

검은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서른 초반 가까운 여자가 우뚝 서 있었다.

향수 판매 전문 쇼호스트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진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찌른다.

“채미휴입니다.”

“권총수입니다. 바쁘실텐데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응당한 댓가를 지불 하셨는데.”

소속사가 있었고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대뜸 30분에 100만원이라고 했다.

즉 사람을 만나 차 한 잔 하는데도 텔레비전에서 물건을 판매할 때와 다르지 않은 출연료를 요구한 것이다.

순간 당황했지만 유명인인데다 프로라면 그런 요구가 지극히 상식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오케이 했다.

“향수 전문가라고 들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손가락에 꼽히죠.”

자신감있는 얼굴이다.

“프레땅이라는 향수 얼마 전에 방송 내 보내셨더군요?”

“네! 기억해요. 워낙 고가품이기 때문에 판매보다는 대중에게 알리려는 광고 목적이 큰 프로그램이었어요.”

“프레땅에 대해 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가격대로 따지면 최고 비싸죠.”

이어 채미휴는 프레땅이란 향수에 대해 설명했다.

프레땅은 향도 진본의 보틀도 최상의 예술이다.

강하면서도 유연하게 조각된 보틀 자체만도 경이롭단다.

보틀의 뚜껑은 하늘에 떠있는 반달을 엎어 놓은 듯 하며, 표면에 새겨진 가느다란 실선들은 각도에 따라 황홀한 무지개 빛 색상을 만들어 낸다.

해변의 여인에게서 영감을 얻은 황금색의 로고는 가히 걸작이라고 했다.

“그 안에 든 향수는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권총수는 향수를 담고 있는 병에 그토록 뛰어난 찬사가 붙는다면 향기가 경건하다는 표현이 넘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20년 전에도 국내에서 판매됐습니까?”

“아뇨.”

그녀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20년 전이면 제가 중1이죠. 하지만 향수 전문 쇼호스트가 되면서 많은 역사를 배워야 했죠. 당시에는 한국에 매장이 없었어요.”

“매장이 없었다고 사용한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군요?”

“물론이죠. 연예인들 같은 경우는 해외 나갈 일이 많다보니 얼마든지 사가지고 올수가 있죠. 나이차 큰 선배 언니에게 들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된 영화배우 설지씨께서 즐겨 사용했다고 들었어요. 향수 광이었다더군요. 고가의 향수를 수집하는 것을 취미로 가졌는데 엄청났다고 들었습니다.”

“설지라고 했습니까?”

“딱 두 편 출연한 게 전부인데 갑잡스런 죽음이 충격적이었다고 들었어요. 영화의 흥행은 말할 것도 없고 뛰어난 미모로 국내 뿐만 아니라 헐리우드에서까지 손을 뻗을 만큼 인기를 누렸다더군요.”

권총수는 계속 물었다.

“왜 죽은 것입니까?”

“교통사고였대요.”

권총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내용 몇 가지를 더 물어본 뒤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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