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양귀비(4)
“모두 서른 아홉구입니다.”
2소대장 야닉 소위가 다가와 보고를 했다.
매복에 걸렸는데도 전원(全員)으로 추정되는 적을 죽였다는 건 이쪽이 승전이다.
그러나 가슴속에 야망이라는 것이 존재하면 나쁘지 않은 결과 앞에서도 만족하지 못한다.
중대장 튀랑 대위가 그러했다.
장교들은 사병과 달리 프랑스 국적자여야만 한다.
생시르 사관학교(우리나라 육군사관학교)졸업 당시 차석이었고, 이후 여러 부대를 걸치면서 작전과 전술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외인부대로 자원한 뒤 몇 차례 크고 작은 전투에서 공훈까지 세웠다.
지금 추세로 나간다면 어깨에 별을 다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것이 주위의 평가다.
그런 그에게 오늘일이 향후 진급과정에 적지 않은 스크래치로 작용 할 수도 있다고 본 모양이었다.
권총수와 오민철이 다가오고 있었다.
중대장은 권총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권총수는 부동자세로 악수를 받았다.
손은 잡았으나 둘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사람은 표현으로 마음을 전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침묵이 어떤 것 보다 상대를 감동시키기도 한다.
권총수의 중대장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권총수가 제때에 나타나주지 않았다면 피해는 훨씬 컷을 것이다.
그건 치명타가 될 수도 있었다.
‘유일하게 실수를 용서하지 않은 곳이 군대다’
생시르 사관학교 교수가 했던 말이다.
중대장은 지금 형언할 수 없는 고마움을 손바닥을 통해 전달하고 있었다.
지켜보던 1소대장 다리다 상사가 슬며시 웃는다.
오늘 작전이 중대장에게 플러스가 될지 마이너스로 작용할지는 아직 속단할 수 없다.
분명한건 진짜 승자는 위기에서 벗어난 중대장도, 몰살당한 IS도 아닌 권총수였다.
권총수의 저격은 가히 신기였다.
전쟁 경험이 풍부하고 아군 적군을 포함해 많은 저격수들을 봤지만 권총수 만큼 차분하고 냉철한 군인은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권총수 성격이 안정적이고 묵직하느냐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제일 크다.
거기에 가끔 뱉어내는 말속에 담긴 재치있는 유머는 항상 소대를 웃음바다로 만든다.
우글거리는 형들 속에 살면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자기 주장이 확실한 22살의 청년.
그런 청년이 저격이 시작되면 돌변 한다.
입을 닫고, 작전과 상관없는 말은 일체 뱉지 않는다.
이름하여 포커페이스.
방아쇠를 당기는데 망설임 따위는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무념무상.
일체의 어떤 감정을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임무에 충실 할 뿐이다.
그때 중대 통신병은 부지런히 여단본부로 이곳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 * *
화려한 꽃들의 잔치다.
갑자기 나타난 산속의 꽃밭에 숨죽이며 이동하던 소대원들 표정들이 환해졌다.
사막을 횡단하던 상인들이 오아시스를 발견하면 너무 반가운 나머지 앞 다투어 뛰어가 목을 적신다.
야만에 물들어 있는 전장의 군인들이지만 형형색색의 꽃들을 보며 마음이 누그러지는 모양이었다.
바람에 꽃이 춤춘다.
핑크 색채가 낀 붉은 꽃, 묵직한 향기가 쏟아질 듯 한 보라색과 가을의 감국을 닮은 노란 꽃, 바늘로 쑤시면 금방 핏물이 흘러나올 것 같은 빨간 꽃들이 바람에 살랑거린다.
“형 저게 무슨 꽃인지 알아?”
오민철은 아까부터 이쁘다 이쁘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튜울립 같기도 한데 줄기가 다르고.”
“양귀비야”
“양귀비라면 그거 아냐. 아편 나온다는 꽃?”
“잘봐봐. 꽃 아래 길쭉하게 달린 것 보이지.”
“어, 보여.”
“저게 열매인데 면도칼을 표면에 살짝 긁으면 검은 액이 흘러나와 그게 아편이야.”
오민철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우리가 지금 마약 밭을 지나가고 있잖아.”
“그렇지.”
오민철이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빛냈다.
실감 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양귀비를 알아보는 사람은 네팔에서 온 비렌드라 뿐이었다.
그도 사진으로만 봤을 뿐이라고 했다.
“소대장님!”
갑자기 권총수가 헤드셋에 대고 말했다.
“뭔가? 총수 이등병!”
행군은 계속 이어졌고 소대장이 옆으로 다가왔다.
“꽃밭 저 안쪽을 좀 보시죠?”
다리다 상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양귀비 밭 건너 편을 보았다.
“걸어가면서 꽃을 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시선만 던지세요.”
권총수의 목소리가 낮다.
그건 어떤 징후를 간파했다는 의미였으므로 소대장의 표정이 굳었다.
소대장도 저 꽃이 양귀비라는 걸 알고 있다.
서남아시아 산악지역에서 생계수단으로 아편을 재배하는 농민들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다.
거기까지가 양귀비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다.
“채취 흔적입니다.”
“채취라니?”
“아편을 채취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권총수는 채취 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소대장은 그래서 어떻다는 것이냐는 듯 바라보았다.
왜 권총수가 긴장하는지, 그리고 아편 채취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지 소대원 누구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원래 이 밭은 이 지역에 모여 사는 야지디족의 소유 일 것입니다.”
“여단에서 내려온 정보에 의하면 이쪽 배투카 분지에 사는 야지디족은 두 달 전 IS에 의해 모조리 학살되었네.”
“맞습니다. 그렇다면 저 아편들은 누가 채취했을까요?
소대장은 눈을 크게 떴다.
“아직 겉에 묻어 있는 검은 액이 완전히 굳지 앉을 것을 보면 누군가 우리가 도착하기 최소한 30분 전까지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안됩니다.”
권총수가 재빨리 소대장의 군복을 잡아 당겼다.
소대장은 당장 확인하겠다는 듯 밭으로 들어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린 아름다운 꽃에 반해 잠시 구경하며 지나가는 겁니다. 아편채취 사실은 전혀 모르는 거죠”
“자연스럽게!”
소대장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울렸다.
“행군하면서 잘 들어라. 확인 된 건 아니지만 근처에 적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라크 반군인지 아니면 IS인지는 아직 확인 할 수 없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기는 하되 눈에 들어날 만큼은 하지마라.”
소대원들은 앞서 해왔듯 주위를 살피며 경계했다.
그러나 어떤 매복이나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긴장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몇 명쯤으로 판단하나?”
소대장이 물어왔다.
권총수는 조용히 대답했다.
“아편 채취 상태를 보아 10여명 정도 추정합니다.”
“정체는 아직 모르는가?”
“이곳에서 활동하는 자들이라면 IS일 확률이 높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30분 전에 미리 우리의 존재를 간파하고 피했다면 혹시?”
“매복이나 부비트랩을 설치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30분이면 어떤 덫을 깔기에 촉박한 시간이다.
덫이란 잘못 설치하면 오히려 역으로 화가 되어 돌아온다.
자신들이 근처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꼴이기 때문이었다.
묵묵히 걸어간다.
그러나 모든 내공은 소리(聽覺)와 냄새(嗅覺)에 집중 하고 있었다.
현재 권총수의 내공은 일갑 자에서 조금 모자란다.
여기가 강호라면 모를까 그 정도만 되어도 일반인에 비하면 수십 배 뛰어난 능력을 지닌다.
‘비릿한 악취’
권총수의 눈이 빛났다.
‘생선 썩은 듯한 냄새’
얼핏 하수구 냄새와 비슷하기도 했는데 권총수는 생 아편을 채취한 사람들이 아니면 이런 냄새가 바람결에 맡아질리 없다고 생각했다.
아편을 정제하다보면 굉장한 악취가 난다.
그것도 1시간 전까지 채취를 했다면 아무리 옷을 갈아 입고 비누로 씻는다고 해도 쉽게 냄새를 지워내지 못한다.
아편은 무서운 환각작용 만큼이나 냄새 또한 역한 것이다.
마약범의 대다수가 독한 냄새가 실마리가 되어 붙잡힌다.
‘왼쪽 200미터 지점’
내공을 더욱 집중했다.
숨소리까지 파악은 되지 않는다.
숨소리까지 파악이 되면 몇 명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있다.
“잡힌 것 있나.”
이제 소대장은 권총수의 신묘한 능력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세상사 모든 것이 과학으로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걸 권총수를 통해 분명히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거리와 방향은 알았습니다만 인원 파악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숨어 우릴 지켜본다는 건 두 가지 이유일 것입니다. 화력에서 우릴 압도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지원병력을 기다리는지도 모르죠.”
“만약 우리가 지나간 뒤에 지원 병력이 도착한다면?”
“당연히 추적하겠죠.”
소대는 배투카 분지를 벗어났다.
PKM 두 자루와 AK로 무장한 20여명의 사내들이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사내들은 먼 길을 달려 온 듯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바위 뒤에 은신해 있던 여덟 명의 사내들이 이들을 맞이했다.
“어떤가?”
우두머리로 보이는 구레나룻의 사내가 물었다.
머리에 검은 두건을 썼는데 전체적으로 약간 마른체형이며 광대뼈가 유난히 불거져 보였다.
“조금 전 지나갔습니다.”
“정확히 몇 명이던가?”
“열 한명입니다.”
우두머리는 따라온 사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교도들 사냥이다. 결코 그들을 살려둘 수 없다. 이 땅은 알라께서 축복하며 내 준 성스런 곳이다. 우리 말고는 누구도 이 땅을 밟아서는 안된다.”
사내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고, 상대를 제압하는 흡인력이 넘쳐흘렀다.
“알라후 아크바르.”
우두머리 사내가 선창하자 나머지가 일제히 AK소총을 들어 올리며 합창했다.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
“가자 사냥이다.”
우두머리가 앞장서서 뛰기 시작했다.
정확히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일단 뛰어야 한다.
슥!
선두에서 뛰어가던 우두머리사내가 손을 들어 올렸고 뒤를 따르던 이들이 멈췄다.
우두머리 사내는 지면을 살폈다.
작은 돌멩이 몇 개가 뭔가에 부딪혀 튀어 나와 있었다.
그건 누군가의 지나가는 발길에 채였다는 뜻이다.
산 길 한쪽에는 군화자국도 있다.
선명한 자국과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은 걸보면 지금 막 지났다고 봐야 했다.
“출발!”
우두머리 사내는 길이 아닌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전장의 추격은 마라톤이 아니다.
마라톤은 1등을 추격하려면 반드시 그의 뒤를 따라가야 하지만 전장은 다르다.
뒤를 따랐다가는 오히려 미행이 발각된다.
전장에서는 우회하여 측면에서 치는 것이 정석이다.
30여명에 가까운 IS 대원들은 순식간에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좌측으로 우회하여 비탈진 산길을 2킬로쯤 뛰었다.
화악!
그런데 우두머리 사내의 눈이 커졌다.
없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추월을 했나 싶어 기다려 보기도 하고, 늦은 것 아닐까 하는 마음에 험준한 산길을 백미터처럼 뛰기도 했다.
있어야 할 1소대가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아차’
온 몸이 벼락을 맞은 듯 뜨거워졌다.
역으로 함정에 걸렸다.
드르르르!
HK416 돌격소총 소리가 산을 울렸다.
우두머리 사내는 재빨리 작은 바위 뒤로 몸을 숨기고 고개를 들었다.
자신 머리 위에 여덟 명의 군인들이 나타나 총알을 쏟아 부었다.
채 30미터도 되지 않는 짧은 거리인데다 가장 뛰어난 자동소총중 하나로 꼽히는 HK416이 쏟아내는 총알을 피한다는 건 시간상으로나 거리상으로는 불가능했다.
우두머리 사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완벽한 사냥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