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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36화 (36/651)

제36화: 신고(1)

그리고 터져 나오는 실소 한 가닥.

사실 6개월 동안 지옥 생활보다 더 험하고 가혹하다는 스나이퍼 훈련을 받을 때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돈(錢).

오직 유로화 말고는 어떤 생각도 담지 않았다.

자신은 프랑스를 향한 충성도, 세계 평화에 이바지 따위에는 관심 없었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왔을 뿐이었다.

언젠가, 어느 한순간 프랑스 합동참모본부의 명령을 듣는 프랑스 군인이라는 걸 깨달을지 모른다.

돈 이전에 인류 평화를 생각하고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순간이 올지 모르지만 최소한 아직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주위 분위기가 돌아가고 있다.

‘넌 멋진 군인이다’

카스텔노다리 훈련소를 떠나올 때 중대장 가브리엘이 했던 말이다.

‘너의 적은 불행하다’

스나이퍼 스쿨을 떠날 때 교장 에르난데스 대위 또한 말했다.

둘 모두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기분이 묘해졌다.

내가 지금 군인으로서 인정을 받고 있는가.

그렇다면 좋은게 뭐지.

공을 세우면 월급이 오르나.

월급 인상은 공을 세우는 것과 전혀 상관없다고 했다.

단지 계급이 올라간다거나 훈장을 받을 뿐이었다.

자신에게 계급이나 훈장은 솔직히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 훈련소도 그렇고 스나이퍼 스쿨 관계자도 그렇고, 장군인 여단장까지 자신을 엄중하게 보호하여 데려오라고 내린 명령의 의미는 뭘까.

자신이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군인이라는 것 하나는 분명해 보였다.

어쨌든 기분은 좋다.

권총수는 헬기의 프로펠러가 만드는 자욱한 먼지에 입을 가렸다.

오르간 상사의 베레모가 벗겨져 땅에 떨어졌다.

권총수는 굴러가는 모자를 재빨리 주워 건네면서 두 사람은 서둘러 프로펠러가 만드는 바람의 영향권을 벗어났다.

헬기는 다시 떠올라 어디론가 사라졌고 권총수는 대기하고 있던 지프에 올랐다.

모르간 상사는 귓속말로 여단장 지프라고 말해 주었다.

27보병여단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후세인 시절 이라크 34기갑 여단이 근무했던 곳인데 파괴된 도로망과 통신 시설을 구축하여 매우 잘 정돈되어 있었다.

10여분을 달린 지프는 콘크리트로 된 이 층 건물 앞에 섰다.

권총수는 다시 한번 복장을 갖추고 녹색 베레모를 단정하게 썼다.

이어 모르간 상사와 나란히 현관을 들어섰는데 낯익은 인물이 서 있었다.

여단 행정관이었던 요리스 소령이었다.

권총수가 부동자세에서 거수경례를 하자 요리스 소령 또한 힘차게 받는다.

“환영한다 코리안 스나이퍼.”

“감사합니다.”

권총수는 요리스와 모르간을 따라 여단장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 지휘관의 집무실은 생각보다 초라했다.

10여평 정도 되는 사무실에 이라크 지도를 포함해 국경을 맞대고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터어키, 이란의 지도가 한쪽 벽을 전부 채웠다.

군복차림의 한 사내가 등을 돌린 채 길이 5미터 정도 되는 책상위의 작전지도(operation map)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단이 활동할 공격지역의 지형과 지물 난외주기(欄外註記:지도, 도표, 사진 등의 여백에 내용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될 만한 자료를 표시해 놓은 기호나 문자)는 물론 적과 아군의 배치, 군사 시설의 위치, 전투지경선, 공격축선(攻擊軸線), 공격목표, 사격금지선 등이 축척되어 있었다.

“여단장님!”

군인이 돌아섰다.

50초반 가량의 백인이었는데 검정색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보병 제27여단장 머큐리 준장이었다.

“권총수 이등병을 데려왔습니다.”

척!

권총수는 온 힘을 다해 거수경례를 했다.

머큐리 여단장은 권총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입을 중심으로 부드러운 미소가 만들어졌다.

미소는 순식간에 온 얼굴로 퍼졌고 오른손을 내민다.

“이등병 권총수!”

권총수가 여단장 손을 잡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자네로군. 자네가 권총수야. 환영한다.”

“감사합니다.”

“앉아!”

권총수는 요리스 소령이 가리키는 의자에 앉았다.

“편히 앉게!”

하지만 권총수는 꼿꼿한 상체를 풀지 않았다.

여단장 머큐리는 자신이 직접 물을 끓이고 커피를 탔는데 요리스 중령과 모르간 상사 모두 자신들이 하겠다고 전혀 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기의 주인인 여단장이 찾아온 손님인 자신들을 대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여단장은 세 사람 앞으로 한 잔씩 커피를 놓고 자신도 잔을 들어 마셨다.

여단장은 부동자세로 앉아 있는 권총수를 보았는데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드르륵!

서랍을 열더니 서류 한 묶음을 꺼냈다.

“이등병 권총수, 국적 대한민국, 올해 나이 열아홉 살!”

“스물한 살.”

스물한 살이라고 말하려다 한국과 달리 프랑스는 만으로 얘길 한다는 걸 알고 입을 닫았다.

“군 경험도 없고, 세상에 홀로 태어나다니 몹시 유감일세.”

보육원생이라는 걸 의미했다.

권총수는 침묵했다.

“프랑스 외인부대가 왜 세계제일이라고 하는지 이번에 분명히 알게 되었나. 우린 같은 프랑스 군인일세. 자네가 있음으로 인해 외인부대는 물론 중동 전쟁의 판도가 바뀌었으면 하네.”

듣고 있던 요리스 소령과 모르간 상사의 눈이 커졌다.

권총수로 인해 중동전쟁의 판도가 바뀌길 원한다는 말에는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다.

칭찬이면서도 권총수를 평범한 저격수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단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왼쪽 창가로 걸어갔다.

파팟!

권총수의 눈이 광채를 뿜었다.

낯익은 물건이 있었다.

스나이퍼 교육 6개월 동안 단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던 것이 있었다.

TRG-M10.

그곳에 TRG-M10 저격총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여단장은 손으로 총을 스윽 한번 훑더니 양손으로 총을 들어 올렸다.

“받게!”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묵직한 저격총 M10을 받았다.

“총은 군인에게 목숨과 같은 것이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겠네. 그 총으로 자네의 인생을 개척해보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축하하네.”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권총수는 거수경례를 하고 여단장실을 나온 뒤 27여단에 배속된 외인7중대로 향했다.

여단장 지시에 의해 그 지프로 7중대까지 가는 특혜를 누렸다.

앞서 매복에 걸려 사망한 소대장 뒤를 이어 새로 지휘권을 맡은 수 류트낭(ous-Lieutenant:소위) 맥그레인을 필두로 외인1소대 정찰소대가 생활관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지금 사격훈련을 마치고 오는 길이다.

숯처럼 검게 변해 버린 새카만 얼굴과 땀에 젖은 군복은 전입신병들을 완전한 군인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야, 우리 총수 동생은 잘 있는지 모르겠다.”

오민철이 혼잣말처럼 토해냈다.

“그 녀석 입도 짧은데 끼니는 안 거르는지.”

“굶어 죽인 군인 없어.”

나란히 가던 나카야마가 히죽 웃었다.

“나카야마. 너 뒤질래, 이게 아랫 나라 산다고 봐줬더니 기어올라.”

오민철이 주먹으로 때릴 듯한 동작에 나카야마가 재빨리 서너 걸음 뛰며 피한다.

그때 맞은편에서 지프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선두에 선 맥그레인이 힘차게 소리쳤다.

“부대 차렷,”

모두가 눈을 부릅뜨며 똑바로 섰고 맥그레인의 오른손이 힘차게 올라간다.

끼이이익!

그런데 지나가야 할 여단장 지프가 소대 앞에 멈추자 모두가 더욱 긴장했다.

일제히 얼어붙었다.

끽!

지프 조수석 문이 열리고 저격총이 담긴 묵직한 가방과 군장을 짊어진 권총수가 나타났다.

“으헉!”

일제히 소스라쳤다.

“야 쪽바리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냐?”

부우웅!

지프는 지나갔고 권총수는 소대장 맥그레인을 향해 경례를 했다.

“이등병 권총수 스나이퍼 교육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진짜 총수다.”

워어어어!

짝짝짝!

소대원들이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소대장 맥그레인 소위가 힘차게 권총수의 손을 잡으며 끌어안았다.

“네가 권총수구나.”

맥그레인 소위는 미국 출신이었다.

미국에도 많은 직업군인의 길이 있다.

그런데 왜 미군을 놔두고 하필 외인부대를 지원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총수야!”

“우리의 히어로!”

카스텔노다리 훈련소 동기들은 권총수를 끌어안고 볼에 뺨을 비비기도 했다.

세르게이는 아무 말도 않고 손을 내밀었다.

그 흔한 인사말, 고생했다, 기어이 해냈구나, 장하다는 따위의 말 한마디 뱉지 않는다.

그러나 세르게이와 나눈 침묵의 악수는 어느 누구보다 가슴에 와닿았고 뜨겁게 전해졌다.

권총수는 처음 보는 선임 소대원들과도 환하게 악수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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