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해보자(1)
밤에 불침번을 섰다.
오바뉴에 있을 때 불침번이 뭐냐고 오민철에게 물었더니 적의 침입을 대비해 잠을 자지 않고 보초를 서는 일이라고 했다.
불침번이 아닌데도 잠을 자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몇 명을 합격 시키느냐가 아니라 외인부대원의 기준에 미달하면 0명이 되어도 뽑지 않는다고 했다.
그건 굉장한 압박이었다.
외인부대 지원자는 낭만을 즐기기 위해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프랑스라는 나라에 목숨을 바칠 목적도 아니다.
오로지 돈이다.
과거의 외인부대는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기 위해 들어오는 일명 모험주의자들도 있었고, 사랑하는 여자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아니면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불편한 관계를 단절하기 위해 오는 도피자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달라졌다.
이른바 실리파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군대가 아니라 직장으로 입소하려는 것이다.
복무규칙을 외우지 못해 탈락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두 다리 뻗고 자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아침 해가 밝아왔다.
단 한 명도 실수하거나 외우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
열 한 명 모두에 대한 테스트가 끝나자 책을 한 권씩 주었다.
프랑스어로 되었다는 것만 짐작할 뿐 내용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권총수의 바로 옆 침대를 차지한 러시아 출신 세르게이가 서툰 영어로 말해 주었는데‘생활프랑스어’라는 책이라고 했다.
“앞으로 일주일에 다섯 시간씩 프랑스어 공부를 하게 된다. 훈련이 끝나는 4개월 후에는 기본적인 대화 소통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앙드레는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원병 쑨양, 질문 있습니다.”
“뭔가?”
앙드레가 금방이라도 이단 옆차기로 날릴 것 같은 포악한 인상으로 돌아보았다.
덩치가 좋은 쑨양이라는 중국 출신의 지원자가 물었다.
“만약 4개월 뒤에도 대화가 안 되면 어떻게 됩니까?”
“멍청한 놈, 당연히 고향 앞으로닷.”
탁!
앙드레는 문을 닫고 사라졌다.
훈련소장 크리스토퍼 중령(류트낭 꼬로넬:Lieutenant-Colonel)에게 입소식 신고가 이뤄졌다.
원래 신고식 시간은 정오였지만 경례 동작들이 일치가 되지 않고 신고자인 러시아 출신의 세르게이가 계속 실수를 하는 바람에 지연되고 있었다.
한번 틀릴 때마다 얼차려가 주어졌는데 혼을 뺀다.
선착순에서 쪼그려 뛰기, 푸시업이 쉬지 않고 반복되었고 일부는 어제 내린 비로 엉망이 된 물구덩이를 굴러 진흙을 뒤집어썼다.
더 웃기는 건 훈련소장이 아무렇지 않게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학학!
권총수는 땀을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줄이 조금만 틀려도 굴리고, 올라가고 내려오는 경례의 손동작이 한 사람이 하는 것처럼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무자비하게 굴렸다.
“뛰어!”
“박아!”
여기저기서 교관들의 외침이 콩 볶듯 쏟아졌다.
차라리 두들겨 맞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굴리고 또 굴렸다.
양손으로 귀 잡고 쪼그려 뛰기.
어깨동무하고 쪼그려 뛰기.
땅바닥에 누워 발 들고 팔 들고 머리까지 드는 거꾸로 책상, 나중에 오민철이 거꾸로 책상은 우리나라 군에서는 유격체조의 한 가지로 온몸 비틀기라고 했다.
목소리 작다고 뛰고, 동작 안 맞다면서 구르고, 눈동자 움직였다고 대가리 박고, 박고, 또 박는다.
여기저기서 신음이 터지고 거친 가래 끓는 소리가 쉬지 않는다.
팟!
갑자기 땅바닥을 구르던 권총수 눈이 빛났다.
아무리 잘해도 구른다.
축구 골대를 돌아오는 선착순에서 일등 했는데 땅바닥에 머리 박고 있으란다.
‘굴리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꼬투리를 잡아낼 수 있다는 거잖아’
잘해도 구르고, 못해도 구른다는 것을 깨우친 것이다.
어느 순간 권총수의 동작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날선 칼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는 적절한 위치를 점하며 움직였다.
“흐흐흐!”
“왜 웃어요?”
신고식이 끝나고 10분간 휴식을 주었는데 슬그머니 오민철이 다가오더니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내 동생다워!”
“뭐가요?”
“아까 보니까 완전 말년 병장이던데.”
권총수가 적당히 요령을 피우며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기합을 보며 군대체질이라고 했다.
“군대는 어느 나라든 똑같다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다.”
“무슨 얘긴데요?”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지. 앞장서도 맞고, 뒤에서면 더 맞고, 그게 군대야. 그래서 짬밥이 많을수록 요령을 피우고 적당히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 그런데 넌 군대도 안 가봤다면서 제대 앞둔 말년 병장처럼 아주 우수한 잔머리를 보였어.”
히죽!
권총수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살려니 어떡해요.”
“말하는 뽀대 보소. 우리 동생 굉장하겠는데.”
탁!
오민철은 잘하고 있다는 듯 어깨를 툭 치고 자신의 소대로 걸어갔다.
* * *
외인부대 훈련은 총 4단계로 이뤄졌다.
첫 단계는 한 달(4주)동안 기초군사 훈련과 외인부대의 시스템을 배우는 것이었다.
기초라는 말에 수월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후일 누군가 외인부대 훈련 중 가장 힘든 과정이 언제였냐는 질문에 권총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1단계라고 말했다.
제식훈련(Pushkar:制式訓鍊)이라고 했다.
나폴레옹이‘제식은 곧 전투다’라는 말을 했다는 것도 처음 들었다.
영내든 전장에서든 지휘관이 병력을 통제하고 이해하며, 통일성이 필요한 군인에게 복종과 충성심을 함양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군인의 훈련이라고 했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차렷(Attention)
열중쉬어(Parade)
쉬어(At Ease)
Forward, MARCH (앞으로 가)
Backward, MARCH (뒤로 가)
Double Time, MARCH (뛰어 가)
우향 앞으로 가.
좌향 앞으로 가.
행진 간의 보폭은 30센티고.
예령이 어떻고, 동령이 어떻고, 차렷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목소리 터져라 외친다.
사실 강의를 들을 땐 별것 아닌 듯 보였다.
걸어가고, 방향 바꾸고, 열중쉬어는 학교 다닐 때 해봤기 때문에 제1단계 제식훈련은 가볍겠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안 된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같은 방향의 발과 팔이 같이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이럴수가’
당황한 권총수는 재빨리 좌우에서 걸어가는 동료들을 보았다.
그들은 반대쪽 팔과 다리가 자연스럽게 교차했다.
‘아 씨발!’
그러다 퍼득 인천 17사단에서 근무하던 친구 말이 떠올랐다.
‘아 그 고문관 새끼 때문에 소대가 편할 날이 없다’
‘고문관? 그게 뭔데?’
‘있어. 멍청한 새끼. 그 한 놈 때문에 온 소대가 피본다’
친구의 말을 자신에게 적용해보았다.
화악!
눈이 커졌다.
‘내가 고문관’
자신 때문에 1소대는 죽어가고 있었다.
기합!
계속 기합이다.
기합 훈련인지 제식훈련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학학학!”
입에서 단내가 나고 제대로 서 있기조차 어려울 만큼 눈앞이 핑 돈다.
교관들은 차갑다 못해 잔인할 지경이었다.
결국 쉬는 시간을 이용해 세르게이가 개인과외에 나섰다.
“평소 걷듯 해”
자연스럽게 발을 내딛고 양팔을 맞춰 흔들면 된다면서 시범을 보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세르게이를 따라 하며 천천히 걸었더니 된다.
“걷는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과 맞춰야 한다는 것에 집착하다 보니 그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세상에 발과 팔이 동시에 올라오는 걸음을 걷는 사람은 없잖아.”
돌이켜 보면 제식훈련은 외인부대 4개월 생활 중 지우고 싶은 오점이었다.
어쨌든 제식훈련에서 권총수로 인한 참사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아 쪽팔려’
소대원들 볼 낯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