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훈련소(2)
훈련소에 도착하자 앞으로 4개월 간 훈련을 지도할 교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대편성이 시작되었다.
54명은 22명씩 2개 소대로 나뉘어 졌는데 이번에도 오민철과는 같은 소대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같은 나라 출신끼리는 가급적 한 소대에 놔두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자칫 패거리 문화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생활관으로 들어서자 녹색 베레모를 쓴 세르죵(Sergent:하사) 한 명이 서 있었다.
“난 하사 앙드레이다. 앞으로 4개월 동안 너희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할 것이다. 즉시 자신의 이름이 쓰여진 침대 앞에 선다.”
권총수는 매트리스가 깔린 침대를 살폈다.
입구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첫 번째 침대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다다닥!
여기저기 자신의 이름표를 찾아 뛰는 발자국 소리가 요란했다.
“관물함을 열어보면 앞으로 4개월 동안 사용하게 될 피복과 소총이 있을 것이다. 확인한다.”
권총수는 벽 쪽에 붙은 케비닛 만한 관물함을 돌아보았다.
오바뉴에서 맞췄던 훈련복이 도착해 있었고 소총 한 자루가 세워져 있었다.
총을 이토록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권총수는 손을 뻗어 소총을 쥐었는데 묵직했다.
“누가 지금 소총을 만지는가? 엎드려뻗쳐.”
앙드레 하사의 목소리가 쩌렁하게 울렸다.
권총수는 재빨리 소총을 제자리에 놓고 엎드렸다.
“앞으로 4개월 동안 너희는 철저히 나의 꼭두각시다. 내가 지시하지 않는 일은 절대 하지마라. 알겠나?”
“예!”
“팔굽혀 펴기 20회를 실시한다.”
지금은 사라졌다고 해도 간헐적인 구타도 발생한다고 들었다.
언어가 다르고 피부와 문화가 다른 그야말로 인간 잡종들이 몰려들다 보니 대화로서의 통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외인부대의 군기가 센 건 그러한 환경적 요인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스물!”
권총수는 힘차게 소리쳤다.
“이름?”
“권총수입니다.”
“한 번 더 어길 시에는 팔굽혀 펴기로 끝나지 않는다.”
신체검사에 합격했다고 외인부대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었다.
훈련소에서도 탈락자는 수시로 발생했다.
“예!”
앙드레는 곧장 전투복으로 갈아입도록 지시했다.
오바뉴에서 2주 동안의 생활이 어느 정도 경험치가 된 것일까 환복하는 동작들이 굉장히 빨랐다.
빠르다고 자부하는 권총수가 22명 중 20번째로 상하의를 제대로 갖춰 입었다.
앙드레의 면도날 같은 시선이 복장들을 살피며 지나갔다.
“저기 뭐가 보이나?”
앙드레가 한쪽 벽을 가리켰다.
큼지막한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는데‘외인부대원의 복무수칙’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는데 영어와 프랑스어로 되어 있었다.
“내일 아침까지 암기하도록.”
앙드레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생활관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액자 앞으로 다가가 수첩에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꿀꺽!
권총수는 침을 삼켰다.
두 눈에 긴장이 가득 배인 시선으로 복무수칙을 노려보았다.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이 닥치면 본능적으로 두렵다.
권총수는 지급 받은 외인부대 수첩에 복무수칙 7가지 내용을 적기 시작했다.
사사삭!
수첩 위를 굴러가는 볼펜 소리 말고는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츠츠츠츠!
볼펜이 만들어낸 기묘한 소리가 생활관을 울렸다.
뚝!
모조리 옮겨 적었다.
혹시 빼먹은 글자나 단어는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을 한 권총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공부는 고통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장르이고, 성적이 뛰어날수록 좋은 대학을 가고, 굴지의 기업에 취직할 가능성이 높다는 원장수녀의 말에 따뜻한 인생이 되는 건 포기했다.
책을 펼치면 잠이 쏟아졌고, 절규하듯 외치는 선생님의 설명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장수녀가 매달리다시피 하면서‘그래도 고등학교는 나와야 한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등하교만큼은 빠지지 않았고 그렇게 졸업장을 받았다.
그런 과거사를 갖고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긴장을 피할 수 없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복무수칙을 외우지 못해 탈락한 사람도 있다고 했다.
‘할 수 있을까’
불길한 기운이 온몸을 덮는다.
누군가는 하면 된다고 했다.
‘난 해도 안 될걸’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외인부대원은 명예로써 프랑스에 충성을 다하는 지원병이다’
적어 놓은 글씨를 작은 소리로 읽은 뒤 눈을 감았다.
‘복무수칙 하나, 외인부대원은...외인부대원은...그러니까 외인부대원은.’
결국 눈을 뜨고 옮겨 적은 수첩을 보았다.
‘명예로써 프랑스에...’
다시 눈을 감았다.
‘명예로써 프랑스에...최선을 다하는 지원병이다’
팟!
재빨리 흥분 가득한 시선으로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최선이 아닌 충성을 다하는 지원병이라는 내용에 이마를 찡그렸다.
고작 25글자 밖에 되지 않는 첫 번째 규칙도 한 번에 외우지 못하는 머리에 위기는 더욱 밀려온다.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모두가 눈을 감고 외우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아이 씨’
속으로 투덜거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외인부대원은 명예로써 프...랑스에...프랑스에...’
슬쩍 실눈을 뜨고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충성을 다하는 지원병이다.’
‘어휴 이걸.’
탁!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고통스러운 시선으로 수첩을 내려다보던 권총수 눈이 갑자기 빛나기 시작했다.
‘아,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그걸 써볼까’
재빨리 결가부좌한 뒤 대력금강심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심법을 운용한 상태에서 어떤 일에 몰두하면 믿을 수 없을 만큼 모든 걸 배우고 소화했다.
‘호흡은 삶(生)의 시작이고 끝(終)이니라’
대력금강심법을 외우자 정신이 모아졌고 감은 눈인데도 앞이 훤해졌다.
그러더니 수첩에 기록한 복무수칙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혹시 자신이 수첩을 보고 있는가 싶어 눈썹을 찡그리고 비틀어봤는데 분명히 감고 있었다.
‘이럴수가. 수첩의 글씨 내용이 보이다니’
엄격히 얘기하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뇌리에 떠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된다.’
눈 앞에 펼쳐진 수첩의 내용을 읽기만 하면 되었다.
‘좋다’
흥분으로 온몸이 떨린다.
그때 1소대 문이 슬그머니 열리더니 머리 한 개가 삐죽 나타났다.
안에 교관이 있는지 없는지 살피다 없는 것을 확인하고 오민철이 들어왔다.
다른 훈련병들의 시선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외웠냐?”
“형 소대도 이것 외우래?”
형이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타국인데다 군 경험이 있는 오민철을 가까이 해서 나쁠 일 없다는 생각이었다.
“당연하지. 외웠냐?”
“아직, 형은?”
“끝!”
“허걱! 진짜?”
“볼래.”
이어 오민철은 외인부대원의 7가지 복무규칙을 말했는데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소방, 경찰 공무원 모두 필기에서 떨어졌다면 좋은 머리는 아니다.
그런데 1소대 교관인 앙드레와 2소대 교관 다비드가 동시에 지시를 내렸다고 쳐도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
“흐흐! 동생아 내가 뭐라고 했니? 군인정신은 제정신이 아니다. 제정신이 아닐수록 뛰어난 군인이 된다.”
오민철이 히죽 웃으며 문을 열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