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일이 풀린다(2)
승객들 표정은 밝았다.
프랑스가 한국인들이 가장 가보고 싶은 나라 1위로 뽑혔다는 어느 여행사의 발표가 아니더라도 승객들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연인끼리, 가족끼리, 이마와 뺨에 이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설익은 주름살, 드문드문 피어나는 흰머리를 보면 아직 쉰 줄에 들어서지는 않아 보이는 아줌마 관광객들.
권총수는 아마 초, 중, 고, 어느 학교의 동창쯤 될 것이라고 짐작하면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자신도 여행의 추억은 있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이라는 제목을 달고 떠난 제주도 여행이 그것이었다.
뭔가를 보고 감탄하며 느낀 여행이 아닌 그저 보육원에서 보내 주었고, 가는 날부터 시작해 오는날까지 이른바 연예인들 신상을 놓고 치열한 입심 대결을 벌인 것이 전부였다.
피식!
권총수는 실소를 지었다.
미지의 세상, 그것도 한국 군대도 아닌 외국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떠나는데 가슴 한쪽이 뜨겁게 설레는 이유는 뭘까.
‘설마했던 군대 체질?’
첫 휴가를 나온 친구들 입에서 군대에 대한 험담이 쏟아질 때마다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불과 3개월 생활하고 저토록 거품을 무나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서 훈련을 받는 군인들 모습을 볼 때마다 힘들어 보인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하다
인터넷에는 외인부대에 대한 많은 얘깃거리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훈련이 빡세고, 군기가 엄하여 중도 포기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니 어쩌니 하는 수기인지 허풍인지 모를 기사를 보면서도 떠오른 생각은 군대가 다 거기서 거기지 뭐 하는 정도였다.
스무 살.
다들 인생이 만만치 않다고 하지만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보육원 원장의 말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 * *
마르세이유 프로방스 공항에 곧 착륙할 예정이라는 안내 방송에 승객들이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권총수는 창문을 통해 밑을 내려다 보았지만 아직 건물이나 사람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 비행기 고도가 낮아지면서 점차 지상의 모습이 들어왔다.
바다 옆으로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간 경유지에서 햄버거로 배를 채웠는데도 벌써 허기가 졌다.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비행기가 내려앉았고 권총수는 낡은 여행가방 한 개를 어깨에 메고 천천히 통로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프랑스다.
남들은 낯선 곳에 도착하면 긴장이 된다는데 전혀 그런 감정은 없었다.
마침내 오고야 말았다는 쾌감이 온몸을 덮는다.
“버스 터미널!”
택시 기사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오케이!”
흑인 기사는 씨익 웃었는데 룸미러로 연신 살피더니 불쑥 묻는다.
“차이니스?”
중국인이냐고 묻는다.
권총수가 인상을 썼다.
내가 어딜 봐서 짱깨로 보이느냐는 호통이었다.
“사우스 코리아.”
기사는 미안하다는 듯 한 손을 들어 보였다.
몇 마디 얘기를 나누지도 않았는데 기사는 외인부대 지원하기 위해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즉 마르세이유에서 버스 터미널을 찾는 사람 백이면 백 모두가 오바뉴의 외인부대 본부로 가기 위해서라고 했다.
“외인부대에 대해 잘 아십니까?”
묻지 않았으면 크게 실례할 뻔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흑인 기사는 외인부대 썰을 풀기 시작했다.
상대가 하는 말에 대한 신뢰도는 듣는 사람이 평가한다.
듣는 사람이 알아서 받을 건 받고, 흘릴 건 흘려야 하는 것이다.
친구들이 흥분하여 군대를 씹을 때 그들 말속에 적지 않은 거품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을 부각시키거나 높여 보이기 위한 자기 자랑 같은 것이었다.
택시 기사 역시 프랑스의 외인부대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후했다.
심지어 미국의 특수부대인 네이비 씰이나 델타포스와 견주기까지 했다.
“월급은 얼마에요?”
제일 중요한 질문이다.
이미 알고는 있지만 혹시 오는 도중에라도 호봉이 조정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레죠넬(Legionnaire:이등병)1300유로.”
변동이 없다.
홈페이지에서 본 것과 일치했다.
“행운을 빕니다.”
택시기사는 내리는 권총수에게 악수를 청했다.
척!
권총수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도 돈 많이 버슈!”
택시기사가 싱긋 웃으며 차를 끌고 떠났다.
권총수는 곧바로 매표소로 다가가 오바뉴행 버스에 대해 물었다.
뚱뚱한 흑인여자의 1시 10분이라고 말에 손목 시계를 보았는데 바늘이 1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음 차는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재빨리 표를 구해 막 떠나려고 하는 오바뉴행 버스에 뛰어올랐다.
권총수는 멈칫했다.
버스에는 십여 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는데 모두 남자들만 있었다.
여자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더욱 특이한 건 모두가 젊고 건장한 사내들이라는 것이었다.
한눈에 오바뉴를 찾아가는 외인부대 지원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기사는 노랑머리의 백인이었는데 부풀어 오른 풍선마냥 뚱뚱했고, 권총수는 맨 뒤 빈자리에 앉았다.
마르세이유에서 오바뉴까지는 자동차로 2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버스 안은 조용했다.
아무도 입을 열거나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부대가 가까워 오면서 어쩔 수 없이 고조되는 긴장 때문일 것이다.
“어쭈구리.”
버스를 타기 전까지는 은근히 흥분됐는데 조금씩 심장 뛰는 것이 불편해진다.
더욱이 담배 생각까지 났다.
‘나도 어쩔 수 없군’
조금씩 입안이 마르고 있었다.
권총수는 실소를 지으며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시골 풍경인데 차이라면 포도밭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프랑스 와인이 유명하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버스는 20분이 채 안 걸려 오바뉴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권총수는 길가에 걸려 있는 외인부대 이정표를 보고 걸음을 옮겼다.
버스에 동승했던 남자들 모두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어디서 왔을까?’
무척 그들이 궁금해졌다.
프랑스 국적자는 올 수 없으므로 모두가 외국인들일 것이다.
주로 가난한 동구권 나라에서 많이 온다는 얘긴 들었다.
그들의 최종 목적은 프랑스 영주권을 얻어 프랑스 사람으로 사는 것이었다.
별 탈 없이 5년 의무기간을 잘 마치면 영주권을 얻는다.
물론 영주권과는 상관없이 순순히 돈을 벌기 위해 온 사람이 더 많다.
멈칫!
권총수의 눈이 빛났다.
멀리 군부대가 보인다.
말로만 듣던 외인부대 본부였다.
강원도 인제 사단본부에 근무하고 있는 친구의 면회를 간 적이 있었는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당시 친구가 근무하던 사단 본부 정문과 너무 닮아 있었다.
두 명의 군인이 총을 들고 서 있었는데 차량이 통과할 때마다 검문을 했다.
정문 바로 오른쪽으로 영어와 불어로 지원자 대기실이라는 글씨가 쓰인 건물이 있었다.
권총수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실내는 매우 넓었다.
탁자와 의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삼십 여명의 사내들이 무리를 짓거나, 또는 홀로 앉아 있었다.
앉아 있는 사내들 모두 자신처럼 외인부대 지원을 위해 찾아왔을 것이다.
권총수는 창가의 자리에 주저앉았다.
메고 있던 가방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좀 더 상세히 사내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흑인이 가장 많았다.
뒤이어 백인들과 히스패닉계가 그 뒤를 이었다.
아시아계로 보이는 칠팔 명의 사내들도 보였지만 정확한지 알 수는 없었다.
탁자위에 가방을 둔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흡연구역이라는 화살표가 그려진 글씨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출입문과 반대쪽 문을 열고 나가자 이십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같은 무리를 지어 담배를 피우고는 있지만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인 듯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레종 블루를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후우!
연기를 한 모금 내 뿜으며 손에 들린 라이터를 보았다.
불티나.
라이터 이름을 보는 순간 까닭 없이 울컥한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감정에 피식 웃고 말았다.
‘재밌군’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생소한 감정에 다소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이민을 가서, 또는 그다지 길지 않은 해외 출장 중에도 길거리에서 우리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뜨거워진다는 사람들 말을 듣고 어이없어 했었다.
국내에서 없던 애국심이 갑자기 생긴다는 말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처럼 태어나자마자 베이비 박스에 버려진 입장에서 대한민국은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불티나 라이터 하나에 가슴이 찡해지다니 이런 지랄도 없다.
“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