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일이 풀린다(1)
턱걸이는 마른 사람이 유리하다.
177센티미터에 72킬로의 권총수 체격으로 턱걸이 열 개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2000미터를 10분 안에 들어오는 것 또한 자신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육상 중거리선수로 잠시 뛴 적이 있을 만큼 폐활량과 기록 모두 좋다.
수영 역시 30미터 정도는 너끈히 간다.
양쪽 시력은 모두 2.0이다.
문제는 복부에 있는 흉터였다.
살아가면서 후유증이나 어떤 장애를 남기는 상처는 아니지만 외인부대에서 가장 강력하게 살피고 체크하는 것이 과거 병력(病歷)이었다.
어이없게도 칼을 맞았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 마침내 혼자서 일진이란 아이들을 무너뜨렸다.
그러자 곧장 학교 밖 즉, 지역 조폭에서 스카웃제의가 온 것이다.
권총수는 거절했다.
자신은 시설출신 아이들을 놀리는 일진들에게 분노의 주먹을 휘둘렀을 뿐이지 뒷골목에 뜻이 있다거나 그런 물에서는 놀고 싶지 않았다.
잠재적 위험 요소라고 판단했을까.
친구들과 당구 한 게임 치고 돌아가는 밤길에 치고 들어왔다.
그것은 경고였다.
들어오던가 아니면 눈에 띄지 말라는 뜻이다.
지구에서 가장 오지라는 남, 북극부터 시작해 아프리카와 뜨거운 사막 등 잔혹하기 짝이 없는 환경에서 전투를 벌이다보면 몸의 아주 작은 병력도 재발 가능성이 있다.
신체란 극한의 위험에 노출되면 약한 부위부터 고장 나는데 조그만 문제라도 과거에 있었다면 백발백중 사달을 일으키는 것이다.
의사 말로는 흉터만 있을 뿐 살아가는데 전혀 지장은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왠지 마음에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 *
영어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였다.
그건 실로 우연찮게 이뤄진 사건 때문이었다.
2000미터 달리기를 연습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골목길에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탄 8살쯤 되는 소년이 빠르게 튀어나왔다.
때마침 오른쪽 골목에서 봉고차 한 대가 달려 내려왔는데 갑자기 나타난 아이를 피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왜 그랬을까.
마치 권총수의 몸은 자석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그대로 허공을 날아갔다.
퍼억!
권총수는 아이를 안고 나뒹굴었고 봉고차와 가까스로 충돌을 피했다.
문제는 권총수가 구출한 아이의 부모였다.
‘아이비(Ivy) 영어’라는 제법 규모가 있는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병원을 찾아와 고마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 부모를 향해 권총수는 진지하게 더듬거렸다.
“부,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그토록 고마워 어쩔 줄 몰라 하던 아이 부모는 부탁이라는 말에 자못 긴장한다.
권총수 입에서 혹시라도 보상금 요구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영어 학원을 하신다고 들었는데 제가 그곳에서 조금 배우면 안 되겠습니까. 돈이 없어서.”
권총수는 태어나 그토록 안도하는 인간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올리는 것 보다도 간단하고 쉬운 일이라고 판단한 듯 두 부부는 합창하듯 대답했다.
“우리 사회가 더 이상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 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든지 오십시오. 확실히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영어와 인연을 맺었다.
강압적인 보육원의 교육열(?)에 고등학교까지는 나왔지만 내가 아는 영어란 형편없었다.
그냥 영어자체가 싫었다.
권총수(Kwon chong-soo)라는 이름 석 자 꿰어 짓는데도 나름대로 불면의 밤은 아니었지만 꽤 고생했다.
주위에서 가끔 영문 이름을 놓고 알파벳 철자가 틀렸니 맞니 하는 다툼을 들을 때마다 나도 혹시 잘못 짓지는 않았는가 싶어 다시 한번 확인하고 살피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하나를 가르쳐서 그 하나를 알면 수재다.
하나를 가르쳤는데 두 개 세 개를 알면 천재이고, 하나를 가르쳤는데 죽어도 모르면 그런 놈은 절대 영어를 배워서는 안 되는 돌대가리다.
중학교 3학년 때 영어 선생님이 했던 말이었다.
영어를 절대 배워서는 안 되는 놈으로 분류 된 권총수였기에 다소 긴장을 했다.
레벨테스트를 했는데 예상대로 가장 등급이 낮은 D를 맞았다.
D레벨은 그야말로 처음 영어를 접하는 사람들의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굿모닝(Good Morning), 굿바이(good-bye), 와츄어네임(What's your name)정도 배우는 과정 말이다.
두 부부는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권총수 영어 실력에 실망한 듯 했지만 자식을 구해준 은인이라는 것 때문에 열심히 가르쳤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권총수 스스로도 너무 놀라 더럭 겁이 날 정도였다.
중학교 3학년 영어 선생님이 구분 지었던 권총수의 영어등급은 분명히 돌대가리였다.
그런 지금 천재로 탈바꿈 한 것이다.
말 그대로 하나를 가르치면 두 개 정도는 기본이었다.
세 개, 네 개, 심지어 다섯 개까지 배우고 깨우치자 두 부부는 입을 떠억 하니 벌리고 말았다.
레벨 테스트에서는 틀림없는 D였다.
“천재십니다!”
기어이 그들 입에서 천재라는 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목표는 하반기 입대였다.
체력적인 문제로만 따진다면 상반기 입대도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영어 때문에 하반기로 미룬 것이다.
‘그렇군’
결가부좌하며 대력금강심법을 수련하고 있던 권총수는 자신이 왜 영어 천재가 되었는지 깨달았다.
‘틀림없다. 심법 때문이다’
돌대가리가 하루아침에 천재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갑자기 학창시절 보다 뇌가 더 좋아졌다고 볼 수도 없었다.
사람의 뇌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기능이 떨어진다고 배웠는데 권총수의 영어실력은 나날이 쑥쑥 자라났다.
“How was your day?(오늘 일 어땠어)”
퇴근하고 들어서던 유병칠의 눈이 커졌다.
“You are embarrassed(너 당황 하는구나)”
권총수는 히죽 웃었다.
“너 진짜 갈 거야. 거기, 외인부대?”
유병칠이 눈을 빛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왜 힘든 영어를 하겠어. 내 인생 외인부대에 꼬라박았다니까.”
농담처럼 말하지만 두 눈이 빛난다.
그건 어떤 의지였다.
* * *
눈을 떴다.
없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았는데 신발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 프랑스로 떠난다는 걸 말해주었는데도 현장에 출근하고 없다.
일을 나간 것이다.
참 냉정한 놈이다.
새삼 유병칠에게 권총수라는 인간은 어떤 존재였을까 하는 따위의 속 좁은 질문은 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떠나는 친구에게 잘 다녀오라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할 줄 알았다.
‘모질어야 한다’
만18세가 되면 누구든 보육원을 떠나 자립해야 한다.
유병칠과 보육원을 떠나던 날 원장이 했던 말이다.
그 말을 실천하기 위해서였을까.
유병칠은 모질게 살았다.
단 돈 십원도 헛되이 쓰지 않았고, 같이 살지만 휴지 한 장도 네 것과 내 것을 정확히 구분 지었다.
팟!
물을 마시기 위해 싱크대 앞에 선 권총수의 눈이 커졌다.
컵라면 한 개가 있었다.
권총수는 컵라면을 살폈는데 뚜껑이 약간 뜯겨 있었다.
그건 먹어도 좋다는 유병칠의 허락이었다.
녀석은 프랑스로 떠나는 친구를 위해 컵라면 한 개를 놓고 간 것이다.
권총수는 한동안 컵라면을 바라보았다.
흙손(오사이)이 한 번씩 지나갈 때마다 투박한 벽면이 반질반질하게 변했다.
유병칠의 손놀림은 거침이 없었다.
흙 판 위에 있는 묽게 버무려진 시멘트를 흙손으로 긁어 벽에 바르는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다.
이제 그는 완전한 A급 기술자가 되어 있었다.
쐐애애애!
공항 근처 작업장인 탓에 비행기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온다.
뚝!
한참 벽에 시멘트를 바르던 유병칠이 뭔가 생각 난 듯 사다리를 내려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비행기 한 대가 서쪽 하늘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유병칠이 중얼거렸다.
“넌 잘할 거야.”
유병칠은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 하던 일을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