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헐리우드에 가고 싶은 사람들(6)(완)
한달 뒤, 동훈은 제작기획서를 완료하고 본격적으로 프리 프로덕션에 들어가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을 배경으로 했기에 세트장 설계 및 로케이션 지정, 현지 스텝 채용까지 미리 준비해야 할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현지에서 주연배우와의 미팅 겸 캐스팅 진행이었다.
“감독님 시나리오를 본 순간부터 바로 감독님의 전작을 모조리 살펴봤어요. 굉장히 독특한 영화들이었어요. 감독님과 함께 하는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답니다.”
제니퍼 로랜스는 평소 TV에서 보여지는 이미지처럼 털털했고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성격 같았다.
동훈은 그녀의 말을 다 믿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녀가 작품에 최선을 다해 연기해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는 않았다.
제니퍼 로랜스가 캐스팅을 확정짓자 나머지 배역들은 전부 오디션을 통해 결정하기로 했다.
헐리우드는 한국과 달리 거의 모든 배역, 심지어 주연 배우조차도 오디션을 통해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핵심이 되는 주연배우 한두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배역은 현지 스탭이 미리 공지한 스케줄을 통해 오디션을 봤는데 제니퍼 로랜스가 여주인공으로 확정됐다는 소식 때문인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지원했다.
한가지 안타까운건 보통 오디션에서 캐스팅을 결정짓는 결정권자는 감독이 되기 마련인데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영어를 잘 못하는 동훈은 지원자의 연기실력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이번에 현지에서 조감독으로 함께 하게된 에디 파울러가 연기를 보고 동훈이 배우의 느낌을 보는 식으로 진행했다.
그렇게 현지에서 진행된 프리 프로덕션에서 잡힌 제작비는 약 7,000만 달러.
한국 돈으로 약 830억에 달하는 거액이다.
한국 시장만 생각한다면 결코 제작할 수 없는 금액이었지만 당연히 가장 중심이 되는 시장이 미국이었기에 진행할 수 있었다.
다만 제작비의 80%를 빈센트 리치 앤 컴퍼니에서 대기로 했는데 90%를 제안하며 너무 많은 이익을 챙기려고 하기에 DH미디어에서 더 많은 돈을 투자하기로 하고 몇 가지 수익구조를 유리하게 바꾸기도 했었다.
[장동훈 감독, 헐리우드 감독 데뷔 눈앞!]
프리 프로덕션에서 동훈이 직접 손을 대야할 일은 모두 처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왔을 때 포털 연예란에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걸렸다.
보도자료를 뿌리기도 전에 이미 기자들이 현지 기사를 토대로 기사를 작성에 내보냈던 거다.
이후 보도자료를 통해 후속기사가 나가자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동훈이 미국으로 건너가 촬영을 할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기사가 나간뒤 동훈이 미국으로 건너간건 반년이 지난 후였다.
어지간한건 모두 CG처리하면 되지만 기본적인 배경이 되는 장소는 준비가 되어야 하는데 이건 뚝딱 만들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장소를 섭외하고 섭외한 장소에 세트장을 만들어내는데 걸린 시간이 딱 6개월이었다.
본래 계획했던 기간에 비해 늦지 않게 된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미국으로 떠나기 전 그 기간동안 박광효 감독이 보조연출로 들어가는 작품은 크랭크인에 들어갔고 최순길 감독이 연출하는 드라마도 제작일정을 확정지었다.
이렇게 모든 일이 착착 맞아떨어졌고 회사에 돈은 넘쳐나서 외부에서는 다들 부러워했지만 사실 동훈이나 직원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다들 큰 프로젝트였고 만에 하나 어느 한 작품이라도 크게 실패하는 순간 회사에 적지 않은 충격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특히 동훈의 작품이 실패한다면 회사 입장에서는 다시는 헐리우드 작품을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큰 충격이 올 것이기에 내외부적으로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미국에서 약 넉달의 촬영을 끝내고 다시 한국에 돌아온 동훈은 가장 먼저 최순길 감독의 드라마 작업부터 체크했다.
“각본은 몇 회까지 나왔어요?”
“12회까지 나왔구요. 작가님이 이번주 내로 14회까지 뽑아준다고 하셨어요.”
유지은 팀장이 대답했다.
“시청률은 어디까지 보고 있어요?”
“6%만 나와주면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내부적으로는 각본이 너무 좋아서 초반 시선만 끌어주면 4회차부터는 10%이상 노려본다고 하구요.”
DH미디어에서 처음으로 제작을 시도하는 드라마에다가 주연배우도 나쁘지 않아서 기대감이 오르고 있었다.
지상파로 편성이 난건 아니었지만 요즘 지상파나 케이블이나 큰 차이가 없었고 오히려 젊은 층에서는 지상파보다 케이블을 더 선호했기에 첫방을 앞두고 다들 기대감이 오르고 있다 했다.
“선판매는요?”
“어제까지 발생한 매출이 총 32억이에요. 제작비의 절반 정도는 뽑았고 PPL이랑 방송사에서 준 지원금까지 합하면 제작비는 거의 회수했다고 보고 있어요.”
“이후 매출이 문제겠네요.”
“네. 시청률이 나오고 반응이 긍정적으로 나오면 추가적으로 수입을 원하는 곳들이 생길거예요. 나중에 IPTV에서 들어올 수입까지 생각하면 손해볼 걱정은 안하셔도 될 것 같아요.”
“그럼 이제 시청률만 남았네요.”
“그렇죠. 시청률이 폭망이면 제작비 조금 손해보는걸 떠나서 체면 문제니까...”
시청률 폭락하는 순간 장동훈이 ‘드라마에 손을 대더니 완전히 감을 잃었네’, ‘드라마는 잘 모르네’ 하는 소리가 들릴게 뻔했다.
적어도 시청률이 평균 정도는 돼야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었다.
“잘 하겠죠. 1, 2회 나온건 어때요?”
“저도 아직 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지금 그쪽 스탭들 분위기 좋아요.”
분위기가 좋다고 하니 다행이다.
물론 분위기만 좋고 시청률이 폭망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지만 일단 분위기라도 좋은게 어딘가?
“다행이네.”
“그것보다 지금 다들 대표님 들어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던거 아시죠? 기자들 지금 회사 밖에서 진치고 있잖아요.”
원래 각 언론사에서 DH미디어에 동훈이 언제 귀국하냐고 줄기차게 물어보았는데 회사에서 계속 침묵했다.
혹시라도 동훈이 기자들의 질문공세에 괜히 불편할까봐 최대한 보안을 유지했고 동훈이 사무실에 출근하고 나서야 동훈이 한국에 입국했다는 이야기가 기자들 사이에 돌기 시작했단다.
“그냥 촬영 끝나고 왔어요. 뭐 해줄 이야기가 없네.”
“그게 다에요?”
유지은 팀장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헐리우드 톱스타들을 데리고 영화를 찍었는데 에피소드가 한 트럭은 나와야 하지 않겠냐는 눈빛이다.
“별거 있겠어요? 그냥 옆에 통역사 하나 두고 디렉팅하다 보니까 뭘 친하게 지내려고 해도 한계가 있더라구요. 그리고 첫 헐리우드 영화라서 그런지 저도 현장에서 배우들이랑 더 친해져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든 성공시키려는 마음에 모니터만 바라봤던 것 같아요.”
“에이~ 너무 심심하다. 기자들한테 말 할 것도 없겠는데요?”
“그냥 뭐... 제니퍼 로랜스 성격이 어떻고 헐리우드 스탭들이 어떤 식으로 일하고 이런 정도 얘기해주면 적당히 기사 쓰겠죠. 중요한건 나중에 얼마나 흥행이 되느냐는 거니깐...”
“그럼 후반 작업은 어느 정도나 걸린대요?”
“7개월 정도 걸릴 것 같다고 해요. 일단 내가 계속 미국에 왔다갔다 해야 할 것 같아요. 작업 맡겨만 놓고 두손 놓을수는 없으니까.”
“그럼 언제 또 가세요?”
“일주일 뒤에 다시 가요.”
“헐... 너무 금방 가시는거 아니에요?”
동훈도 원래 한국에서 조금 더 많이 쉬다가 가려고 했는데 현지 CG제작 업체가 워낙 작업을 늦게 한다는 말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조금만 휴식을 취하고 바로 미국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조감독인 에디 파울러의 우는 소리도 한몫 했었다.
작품의 최종 조율권이 감독에게 있는데 그런 감독이 오랫동안 작업에 참여하지 못하면 자신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리라.
“할 일이 많아서요. 저도 오래 쉬고 싶은데 아쉽네요. 사실 근데 여기에 있는게 쉰다고 하기도 뭐하긴 한데. 하하하.”
“하하, 맞아요. 여기에 있어도 쉬는게 쉬는게 아니긴 해요.”
동훈은 기자들이 물어볼만한 질문을 예상해서 보도자료를 뿌린다음 저녁 늦게까지 회사에서 시간을 보냈다.
회사에 도시락을 배달해 먹는 정성으로 밤 10시까지 이런저런 일로 시간을 보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나 이제 끝!]
도착한 문자는 은정의 것이었다.
은정의 스케줄이 끝나는 시간까지 회사에서 기다렸던거다.
[바로 달려감]
동훈은 답장을 보내고 바로 출발했다.
은정이 사는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주차하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시차적응 때문에 서서히 졸음이 밀려올 때.
똑똑.
차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서 밖을 보니 은정이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언제 왔어요?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 금방 왔어.”
은정은 열린 보조석 문을 열고 후다닥 탔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충혈된 눈과 툭 튀어난 입으로 동훈을 빤히 바라보았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 그랬어. 보고 싶었어.”
“힝...”
은정은 동훈에게 폭 안기더니 말했다.
“언제 또 가요?”
“미국에? 일주일 뒤에 가야 할 것 같아.”
은정은 품에서 쏙 빠져나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헐... 너무 빠른거 아니에요?”
“어쩔 수가 없었어. 내가 총감독인데 후반 작업을 놓고 여기서 쉴수는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럼 나랑 계속 놀 수 없어요?”
동훈은 황당한 얼굴로 소리쳤다.
“야, 너도 안 놀잖아.”
지금 신인 여배우 중에 누구보다 바쁜 일정을 보내는 사람이 바로 은정이었다.
수많은 예능과 화보, 잡지 촬영 스케줄이 줄줄이 밀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밤에는 시간 뺄 수 있잖아요.”
“그래, 여기 있는 동안에는 자주 놀자.”
은정은 마음에 드는지 다시 동훈의 품에 안겨왔고 동훈은 그런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
동훈이 미국으로 가고 얼마후 최순길 감독이 연출하는 드라마는 시청률 5%로 시작해 평균 시청률 10%로 마무리하며 나름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호평받았다.
반면 동훈보다 일찍 프리 프로덕션에 들어갔던 박광효 감독의 작품은 안타깝게도 야구장을 비롯한 각종 로케이션 섭외가 차질이 생겨 촬영 일정이 많이 늦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동훈이 헐리우드판 마녀 후반 작업을 마치고 개봉을 앞뒀을 때 그제야 촬영을 끝냈을 정도였다.
그나마 촬영을 무사히 끝냈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떨리지 않으세요?”
유지은 팀장의 옆에 오히려 동훈보다 더 떨고 있는 은정이 눈길을 끌었다.
“많이 떨릴줄 알았는데 너무 안 떨려서 더 이상해요. 청심원도 안 먹었는데 이상하네.”
이번 언론시사회 겸 제작보고회는 굉장히 특별했다.
영화 Witch는 헐리우드 영화임에도 전세계 동시개봉으로 한국에서 첫 시사회를 가진 것에 언론에서도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한국 영화가 헐리우드 수준에 이르렀다고 연신 떠들어댔다.
물론 제니퍼 로랜스를 비롯한 헐리우드 스타들은 한국으로 오지 않고 현지 스탭들 주도로 미국에서 현지 언론들에게 홍보 이벤트를 진행했다.
“완전 재밌었어요. 힘내세요.”
미리 편집본을 봤던 은정이 작은 주먹을 쥐어 보이며 파이팅을 해준다.
그래, 확실히 원작 영화보다 스토리는 간결해졌고 스케일은 커졌으며 시각적인 효과도 더 뛰어나졌다.
배경설명을 길게 늘어놓던 대사를 줄이고 러닝타임을 늘여 관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했다.
미국 현지에서도 편집본을 보고 굉장히 만족했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밖의 수많은 기자들을 두고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나도 재미있더라.”
“누가 들으면 남이 만든줄 알겠어요.”
“남이 만든거 맞아.”
“네?”
이상하다는 눈빛의 은정을 뒤로 하고 미리 준비한 자리에 앉았다.
수많은 기자들의 플래쉬가 불꽃놀이처럼 터져나왔다.
이상하게 이 광경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계속해서 터지는 플래쉬에 눈을 몇차례 감았다 떴을 때 순간적으로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슬로우 비디오 속의 모습처럼 그렇게 천천히 흐르는 시간속에 무언가 가슴 속에서 쑥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즐거운 시간이었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김영웅 감독은 한바탕 즐거운 여행을 마친 것 같은 얼굴로 웃으며 멀어져갔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이번 영화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 기자의 질문에 동훈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어떤 대단한 감독님에게서 영감을 받은 작품입니다. 만약 영화가 흥행한다면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김영웅 감독이 떠났지만 동훈은 실망하지 않았다.
온전히 자신의 작품을 할 수 있게 됐으니까.
이제 진짜 자신의 작품을 만들 시간이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작품을 성공시켜야 할 것이다.
“흥행을 자신하십니까?”
“물론입니다. 전 여러분들이 말씀하셨던대로 흥행의 신이잖아요.”